다도해는 미래다- 강봉룡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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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도해는 미래다- 강봉룡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장
  • 이진미
  • 승인 2014.12.26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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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과 목포의 흥망성쇠 다도해의 숙명과 함께 했다

<글 게재 순서>

강봉룡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장

① 들어가는 말
② 다도해 섬의 현실 진단
③ 다도해 섬의 역사적 성찰과 과제
④ 다도해의 가능성-섬 생태낙원의 건설
⑤ 다도해의 가능성-섬 문화유산의 창조적 활용
⑥ 다도해의 가능성-다도해의 산업의 육성
⑦ 다도해의 가능성-탈경계의 섬 실현
⑧ 다도해 미래 어떻게 할 것인가

세 번째 기회를 맞은 전남 다도해
전남에게 다도해란 무엇인가? 전남은 서해와 남해가 교차하는 대한민국 ‘L’자축의 중심에 위치한다. 또한 서해로 중국과 통하고 남해로 일본과 통하는 동아시아 해양의 중심축에 해당한다.

그 서남해의 바다에 수많은 섬들이 밀집되어 있고, 거기에 영산강, 탐진강, 섬진강 등의 강이 흐르며 육지와 이어준다. 이렇듯 전남의 다도해는 바다와 섬과 강이 만나는 최적의 해양환경을 형성하며, 절대적 비교 우위를 확보하고 있다. 다도해가 살아야 전남이 살고, 다도해가 전남의 미래 비전인 이유다.

역사적으로 전남의 다도해는 전남 흥망성쇠의 바로미터였다. 전남 다도해의 해양환경이 정상 작동될 때 전남은 흥성했고, 작동되지 않을 때 쇠퇴를 면치 못했다. 전남은 다도해의 사정에 따라 부침을 반복해 왔다. 두 차례의 흥성기가 있었고, 두 차례의 침체기가 있었으며, 이제 세 번째 흥성의 기회가 찾아오고 있다.

전남의 부침은 모두 다도해와 관련이 있다. 이를 간단히 개괄하면서 전남의 다도해가 세 번째 기회를 맞이하게 된 내력을 살펴보자.

첫 번째 흥성기는 9세기 전반의 장보고시대에 찾아왔다. 장보고는 완도의 청해진을 중심으로 동아시아 해상교역을 주도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당시 최고의 첨단제품이라 할 청자를 생산하는 대규모 단지를 전남의 서남해안에 건설하였다.

강진 대구면ㆍ칠량면 일대와 해남 화원면 일대에 그 유적이 남아 있다. 장보고의 활동으로 전남 연안과 다도해 해역은 동아시아 해상교역의 중심지로 부상했고, 최첨단 청자산업의 메카로 자리 잡았다.

10세기에는 당대의 영웅들이, 장보고가 남겨놓은 해양활동의 유산인 동아시아 해상무역권과 청자생산단지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쟁패를 벌였다.

압해도의 능창이 ‘포스트장보고’를 꿈꾸며 도서해양세력을 결집하여 세력을 확산시켜갔고, 견훤과 왕건이 서남해 쟁패전에 참여했다.

급기야 왕건이 서남해지역의 제해권을 장악하여 고려를 건국하고 후삼국을 통일하는 최후의 승리자가 되었다. ‘장보고-왕건’으로 이어지는 통일신라-고려시대에는 전남의 다도해가 활기를 띠면서 첫 번째 흥성기를 열었다.
 

첫 번째 침체기는 조선시대에 찾아왔다. 조선은 국초부터 해양활동을 금지하는 해금정책을 채택한다. 이는 곧 바다를 통한 대외교섭을 금지하는 극단적 폐쇄주의 정책을 의미하는 것으로, 흔히 조선의 쇄국정책이라 불리는 것이 그것이다.

해금정책과 병행하여 섬에 사람을 살지 못하게 육지로 강제 이주시키려는 ‘공도(空島)의 조치’를 취하기도 했으니, 이는 해양활동을 효과적으로 금지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이렇듯 조선이 도서해양을 금기의 대상으로 삼으면서 국가의 해양력은 크게 쇠퇴하였고 다도해를 기반으로 번영을 누려오던 전남은 극심한 침체의 시기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전남 사람들은 해양력의 부재에 편승하여 침입해온 왜구의 약탈에 시달려야 했고, 특히 국가의 감시망을 피해 섬에 숨어들어간 섬 주민들은 국가의 감시와 왜구의 침탈이라는 이중고에 시달려야 했다. 이들은 점차 천시의 대상으로 전락하여 뱃놈, 섬놈, 갯것이라 불리는 비칭을 감내해야했다.

그러던 중 두 번째 흥성기는 개항과 함께 찾아왔다. 해금(海禁)을 내용으로 하였던 조선의 쇄국정책은 1876년에 일본과 강제로 체결된 강화도조약에 따라 부산, 인천, 원산을 강제 개항함으로써 종지부를 찍었고, 마침내 1897년 10월 1일 목포 개항으로까지 이어졌다.

목포 개항은 그 절차상 대한제국 정부의 필요에 의해 자주적인 칙령 개항의 모양새를 갖추긴 하였으나, 이미 1894년에 일본 측이 목포를 개항장으로 지목하여 개항해 줄 것을 요청한 바가 있었고, 1895년과 1896년에 목포 현지를 치밀하게 조사하여 개항장으로서의 적합성을 검증했다는 점을 염두에 둘 때, 사실상 목포 개항이 일본의 필요에 의해 이루어진 면이 있음도 부정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일본은 왜 작은 일개 소촌에 불과한 목포를 개항장으로 지목했던 것일까? 영산강의 하구에 위치한 목포는 영산강을 따라 직통하는 나주와 광주라는 배후 대도시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서남해 바다와 섬들을 통해서 중국대륙으로 진출할 수 있는 거점항으로 활용할 수 있겠다는 점이 우선 고려되었을 것이다.

1910년에 조선을 강점한 일제는 동아시아 헤게모니를 확립해 가고자 했으니, 목포가 가지는 이러한 지정학적 위치는 그들에게 매우 매력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후 목포는 일제의 주도 하에 고속 성장을 거듭하여 1930년대 중반에 이르면 한 때 인구 6만이 넘는 전국 6대 도시의 반열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이것이 전남에 찾아온 두 번째 흥성기였다. 비록 그 흥성의 기회가 일제의 동아시아 패권 구축과 수탈이라는 불순한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 하더라도, 일제가 전남 다도해의 중요성을 재발견했다는 점은 일단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두 번째 침체기는 역설적이게도 해방 및 건국과 함께 찾아왔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1948년 8월 15일의 대한민국 정부수립이라는 경축 분위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북한과 중국이 잇따라 공산화되는 사건이 뒤를 이었다.

1948년 9월 9일 북한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공산정권이, 1949년 10월 1일 중국에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공산정권이 들어섰던 것이다. 대한민국과 중국은 국교가 단절되었고, 전남에서 중국으로 통하는 바닷길은 차단되었다. 전남은 국제적으로 고립 공간으로 전락하였고, 다시금 침체기에 접어들어야 했다.

박정희 집권기에 이르러 주체적인 해양 개방정책이 본격 추진되었다. ‘조국 근대화’니 ‘수출 입국’이니 하는 구호를 내세워 공업화와 수출에 매진하였던 것이 그것이다.

그렇지만 중국이 막혀버린 상황에서 주요 교역 상대국을 일본과 미국으로 설정하다 보니, 대규모 공업단지와 대형 항만시설을 주로 동남해안 지역에 건설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이 ‘죽의 장막’으로 막혀있는 한 서남해지역의 미래는 막막해 보였다.

그런데 최근 전남은 세 번째 흥성의 기회를 맞고 있다. 중국과의 수교가 1992년 8월 24일에 전격 이루어지고 한중관계가 급진전되고 있다.

올해로 수교한 지 22년이 되면서 중국은 이제 세계의 공장, 세계의 소비 중심지로 부상하고 한국의 대중국 교역 규모가 1-2위를 기록하고 있다.

이에 따라 오랫동안 중국과 단절되어 국제적 고립 공간으로 전락했던 전남 다도해의 경색국면도 서서히 풀려갈 것이 기대되고 있다.

역사적으로 중국으로 이어지는 중요 통로로 기능해온 전남의 다도해가 다시 한 번 본연의 활력을 발휘할 시기가 온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이를 눈치 채는 이가 드물다. 전남 다도해가 너무나 오랫동안 외면당해왔기 때문이다. 먼저 조선이 외면했다. 일제강점기엔 다도해의 가치가 다시 작동하긴 했지만 일제에 의해 이용당함으로써 그 의미는 퇴색되었다.

해방 이후엔 중국의 공산화로 인해 전남 다도해는 동아시아의 미아로 전락했다. 이렇듯 외면받아 온 세월이 너무 장구했기에, 전남의 다도해는 오늘날 새로운 가능성의 시대가 왔음에도 아직은 이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방치된 채로 외면받고 있다.

따라서 우선 전남 다도해에 새로운 가능성의 시대가 왔음을 눈치 채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 가치를 재발견하고 활용방안을 모색하는 일은 더욱 중요하다.

<정리=이진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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