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맺힌 여인의 절규 신앙심으로 세상과 연을 맺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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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맺힌 여인의 절규 신앙심으로 세상과 연을 맺다
  • 류용철
  • 승인 2016.10.25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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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으로 길을 열었던 여인 정난주

‘한양 할머니’ 칭송받은 여성 유배인의 恨

능지처첨 당한 황사영 부인 제주도로 관비로 유배

두 살배기 아들 안은 유배길 아들의 삶 지킨 모정

 

“한양 할머니가 죽었다”

제주도 사람들이 모두가 그녀의 죽음을 슬퍼했다. 기록에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는 곡소리가 사방에 끊이지가 않았다고 전한다.

관비(官碑)로 유배와 36년 동안 제주도에서 산 유배인 할머니의 죽음에 제주도 사람들은 왜 그렇게도 슬퍼했을까?

그녀가 순교한지 180년이 지난 지금도 제주도 사람들은 그녀의 신앙심과 인품을 기르기 위해 다양한 선양사업을 하고 있다. 성당을 짓고 마리아 상을 세우고, 그녀의 이름을 따 명명한 정난조 올레 길까지 만들었다.

신유사옥(辛酉邪獄)에 연류돼 능지처참형으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간 황사영의 부인 정난조(1773~1838)다.

1801년 11월(음) 그녀는 제주도 유배길에 오른다. 서울에서 이곳까지 천리길이다. 겨울 칼바람에 피부가 갈라지는 아픔에 눈길을 100일이 넘도록 걸어야 했다. 해남군 송지면 땅 끝까지 도달했을 때는 몸에 성한 곳이 없었다. 이곳에서 제주도까지 배를 타고 가야했다.

역적의 부인이라는 낙인을 이마에 달고 가슴에는 두 살배기 역적의 핏덩이를 안고 걸어가는 여인의 모습이란 이루 말할수 없었을 것이다. 한 순간이라도 죽음을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역적의 부인이라는 낙인은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잠자리도 제대로 얻어 잘 수 없었다. 두 살배기 아들에게 젖을 물려야 하지만 겨울 바람을 막을 곳이란 어디에도 없었다. 그녀에게 두 살배기 아들을 지켜야하는 모정(母情)은 갈가리 짓기는 육신의 아픔보다 더했을 것이다.

정난주는 1773년 정약현과 이씨 사이에서 태어나 명연(命連)이란 아명을 받았다. 정약현은 정약종, 약전, 약용 형제의 사촌형제었다. 당대 최고 실학자인 정양전가(家)의 사촌 조카이다. 그녀는 정약전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정약현의 부인이 이벽의 누이였고 사위들도 천주교 신자였음을 볼때 그녀 또한 자연스럽게 전주교를 일찍 접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녀는 20대중반에 황사영을 만난다. 황사영은 정약종에게 교리를 배운 뒤 1790년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황사영은 1790년(정조 14) 사마시에 입격(入格)하여 진사가 되었다.

그녀와 황사영 두 사람은 정약종 약전 형제에게 학문을 배우면서 자연스럽게 가까웠을 것이다. 정난주는 황사영과 결혼함으로써 황사영을 위하여는 실로 금상첨화 격의 빛나는 장래를 약속하는 동기가 되었다. 정난주는 자라면서 성품이 온순하고 영특하였기 때문에 황사영과 혼인하여 1800년 아들 경한을 출산하였다.

 

신유사옥와 유배의 길

 

황상영은 1801년 신유사옥이 일어나자 충북 제천으로 피신하여 이른바 황사영 백서를 썼고, 그 백서가 북경의 주교에게 발송되기 직전인 같은 해 9월(음) 발각되어 대역죄인으로 체포되었다. 황상영이 11월 능지처참으로 순교하자, 가산은 몰수당하고 시어머니는 거제도로 자신은 제주도에 유배를 가게 되었다. 신유박해로 친정과 시댁이 풍비박산되고 일가친척 대부분이 순교함에 따라 세상에 의지할 곳이 없어지게 됐다.

 

정난주는 두 살배기 아들을 대리고 1801년 11월(음) 유배길에 오른다. 남편인 황사영이 능지처참형을 받고 죽었다. 그리고 시어머니 또한 거제도로 관비가 돼 유배돼다. 자신도 관비로 제주도로 유배를 가게됐다.

남편 황사영을 신문하기 하기 완도 신지도와 강진에 유배됐던 정약전과 정약용 사촌오빠를 만났다. 남편의 사건으로 자신에게 천주교를 알려주었던 정약전은 신지도보다 뭍에서 떨어진 신안 흑산도로 유배지가 결정됐다.

이제 자신에게 남아 있는 것은 황사영 남편이 남기고 간 두 살배기 아들 한 명뿐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아들은 이 참혹한 현실에서 피해 살게 하고 싶었다. 자신이 데리고 제주도에 키운들 역적의 자식이란 낙인에 관비의 아들을 누가 어떻게 돌봐줄 수 있을까?

정난주는 아들을 안고 유배가던 중 뱃사공에게 뇌물을 주어 매수했다. 뱃사공은 나졸 두명을 술과 음식을 먹여 매수한 뒤 젖먹이 경헌을 추자도 예초(禮草)리 서남단 언덕 위에 내려놓는 데 성공했다. 아들의 신분을 알 수 있도록 명패를 옷깃에 꼼꼼히 새겨놓았다.

나졸들은 뱃길에서 아이가 죽어 수장(水葬)했노라고 보고함으로써 이 일은 무사히 마무리됐다.

추자도에 남은 경헌은 오씨 성을 가진 어부의 손에 의해 하 추자도 예초리에서 장성하게 됐다. 그 후손이 아직도 추자도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해 오는 이야기로는 경헌이 추자도에 떨구어졌을 때 그가 입고 있던 저고리 동정에서 나온 기록에 의해 그가 바로 황경헌임을 알게 됐고 오 씨의 아들로 키워졌기에 아직도 추자도에서는 오 씨와 황 씨가 결혼을 하지 않는다고 전해지고 있다.

 

 

유배 후 생활

 

제주 대정현의 관비(官婢)가 된 정난주는 대정현 토호 김석구(金錫九)의 집에 위리안치되었다, 김석구는 한때 별감으로 관속이었고, 현감과는 막역지우로 그의 자문역을 자임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여서 동헌 바로 뒤에 살았다. 이곳에서 정난주는 김석구의 아들 형제를 양자처럼 기르며 살면서 또한 풍부한 교양과 학식으로 주민들에게 글, 바느질, 예의범절을 지도하면서 꿋꿋하게 살았다. 김석구의 아들 형제가 커서 그녀를 양모, 유모처럼 대하여 모셨고 부인이 죽자 초중범절을 융숭하게 하고 후손들에게 묘소를 잘 지켜달라는 유훈을 남길 정도로 칭송을 받았다. 그래서 그녀의 묘소가 오늘날까지 잘 보존돼 남아 있다.

그녀는 신앙에 의지하여 37년 간의 긴 유배 생활을 견기다가 추가사 유배되기 2년 전인 1838년 6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어린 자식을 추자도에 내려놓고 한시도 잊지 못했지만 그녀는 오로지 신앙의 힘으로 버티며 극복해 갔던 것이다. 부인은 혈혈단신으로 제주에 관비로 유배된 제주의 거친 바람결만큼 모진 시련을 신앙과 인내의 덕으로 흔연히 이겨냈으며, 봉헌된 삶을 살았다고 전한다. 당시에는 노비가 죽으면 아무렇게나 버렸던 시절이었지만 `한양 할망`으로 존경받던 정난주였기에 동네사람들은 슬퍼하면서 양지바른 곳에 모셨던 것이다.

정난주 무덤은 1977년 순교자 묘역으로 단장되었다가 1994년 천주교 성지로 조성되었다.

 

<자료제공 = 목포문화원>

유용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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