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목포의 5월 민주항쟁 다시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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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목포의 5월 민주항쟁 다시 쓴다
  • 류용철
  • 승인 2017.05.23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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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시민군 도착한 21일 목포역 광장에 1만명 운집
▲ 목포역 5·18 기념탑

[목포시민신문=유용철기자]1980년 광주 민주항쟁이 37주년을 맞았다. 80년 5월 광주시민들이 전두환 군부독재의 군화발과 총칼에 죽어가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목포시민들은 일제히 일떠섰다. 목포의 5월은 어떻게 시작됐을까? 당시 집회에 참여한 인사들의 증언과 박병인의 ‘1980년 목포지역의 청년운동’논문과 김수현의 ‘목포대 학생운동의 형성’논문을 기반으로 37년 전 그날 목포 5월을 다시 조명해 본다.

<편집자 주>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세상을 떠나자 목포 민주화 세력은 김대중에 대한 기대가 크게 놀아졌다. 이들은 김대중계에서 준비하고 있던 민주헌정연구회와 연계를 갖고 민주현정동지회로 이름을 바꿔 조직을 결성했다. 이런 와중에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의 첫 쿠테타인 12.12가 일어난다.

1980년 봄 각 대학가에서는 총학생회가 부활하고 학내 유신잔재의 청산문제가 거론되었다. 4~5월에는 병영집체교육반대 집회가 주를 이루었고 5월 14, 15, 16일에는 목포대와 목포전대의 학생들 중심으로 “비상계엄 해제하라”, “정치일정 공개하라”고 요구하였다.

목포의 5월 항쟁은 광주의 5 18민중항쟁의 연장선상에서 전개되었다.

1980년 5월 17일 자정을 기해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는 전국에 계엄확대를 선포하였다. 그리고 5월 18일 저녁부터 광주로부터 계엄군의 만행을 전해 듣는다. 광주에 친지가 있는 사람들은 광주로 가서 상황을 접했으며 이러한 목격은 목포 시민들 사이에서 전파되었다.

한편 비상계엄 확대와 함께 안철은 학생들의 권유로 해남으로 피신하였고, 이후 21일 목포로 돌아왔다. 한국 엠네스티(국제사면위원회) 목포지부 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신안 비금도에서 배를 타고 나오던 직장인 박광웅은 선상에서 비상계엄 확대 소식을 접하게 된다.

1979년 10월 11일 목포 죽동교회에서 창립대회를 갖은 엠네스티 목포지부의 결성은 1970년대 후반 목포의 중요한 민주화운동의 전화점을 시사한다. 박정희가 김잭에 의해 피살된기 불과 2주전에 결성되었다. 이에 참석한 인물들은 명재용, 박광웅, 최형주, 김대유, 김상옥, 이수명, 안철 등 7명이다. 이들은 80년 목포 5월을 주도하게된다.

5월 19일 박광웅은 명재용과 광주로 올라가서 홍남순 변호사를 만나는데 이 때 홍남순 변호사는 사태를 예의주시하자고 하였다고 한다. 박광웅은 10시경 금남로로 가서 계엄군을 보았으며 시민들과의 충돌을 목격한다. 계엄군의 잔악함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다시 21일 광주상황이 궁금하여 다시 광주로 올라왔다가 광주에서 외지로 나오는 마지막 차를 타고 목포로 내려왔다고 한다.

안철이 21일 오후 1시경 목포로 돌아와서 유기준 목사 등을 만났는데 그곳에는 강신석 목사, 정권모 목사, 김현식 목사 등이 있었다. 이때 강신석 목사는 “광주에서 사람이 죽어 가는데 목포사람들은 뭐하고 있느냐?"하고 안철을 힐책했다. 그때 광주에서 계엄군에 의해 최초 발포가 이루지고 총기를 구하러 시외로 나온 광주의 시민군이 목포에 도착하였다. 시민군의 도착과 함께 광주의 상황이 목포에 전해졌고 시민군을 따라 목포시민들은 목포역으로 모이게 되었다. 이에 목포는 치안부재 상태에 빠지게 되었고, 1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운집하였다. 저녁이 되자 목포의 주요 행정기관은 시위대에 의해 장악되었고, 경찰은 시위대의 기세에 눌려 자진해산하였다.

학생들도 다수 참여하게 되는데 연동교회를 중심으로 야학활동을 하던 학생들과 기청학생들도 자연스럽게 목포역 광장에 모이게 되었다. 이때 기독교청년회 학생들은 양지문(한양대 제적생) 등을 중심으로 희의를 갖고 항쟁을 주도하기로 결의했다. 그와 함께 시민들의 시위를 주도하기 위해 목포청년학생투쟁위원회(이하 청학투)를 만들기로 하고 위원장에 양지문을 선출한다. 당시 양지문의 증언 자료에 따르면 청학투가 만들어 질 때까지 청년층은 안철 등 재야인사들과 연락이 되지 않았다.

이들 학생들은 당시 목포출신으로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양지문, 김영원(서울대 제적생), 서지금(서강대), 박태율(서강대 제적생) 등은 연동교회에 설치된 야학 노동자들이었다. 이들은 목포대학교 학생들을 모아 사회과학을 지도하고 이들이 목포대 내에 RUSA(Reading Understanding Speaking Association) 등 7~8개 정도의 소규모의 학생 써클이 만들어지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또, 각 교회의 청년들은 성서연구를 구실로 진보신학을 공부한 이들이 민주화운동의 대열에 참여했다.

21일 광주에서 시위대가 버스로 도착하고, 가두방송을 하면서 광주의 상황을 알리기 사작했다. ‘계엄영르 해제하라. 살인마 전두환은 물러가. 김대중을 석방하라’고 외치면서 목포시민들의 궐기를 호소하였다. 이날 오후부터 목포역 광장에는 시민들과 학생들이 쏟아져 나왔고, 연동교회에서 야학을 하던 학생들, 기독교청년회 학생들도 대부분 목포역 광장에 나와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었다.

21일~22일의 상황을 지켜보던 안철 등 목포 민주화의 지도부도 양지문 등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도 무질서한 시위를 자제하고 시민들과 학생들을 조직화하기 위해 22일 오전 9시 중앙교회에서 명재용, 박광웅, 유기문, 정권호, 이복일 등을 만나 사태수습방안을 논의하고 이후 목포대학장, 목포시장, 목포경찰서장 등을 만나 ‘목포민주시민투쟁위원회’의 조직을 구상한다.

이후 관측의 상황을 예의 주신하면서 안철의 집에 약 15명의 재야인사들이 다시 모여 ‘수습대책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한다. 하지만 이후 이 자리에 참석한 양지문, 한봉철(신학대학 재학), 김준모(서울대 재학) 등이 명칭에 대해 반발하고 자리를 박차버린다.

이후 수습대책위원회(이하 수습위)는 시위를 주도하면서 시민들의 협조를 유도한다. 하지만 수습위는 초반에는 완벽하게 시위대를 통제하지 못하였다.

22일 오후 청학투는 무기를 회수하기 시작하였고, 군부대에 반납이 이루어졌다. 저녁에 명칭에 대래 재논의가 있었는데 이 과정을 거치며 ‘목포민주시민투쟁위원회’(이하 시민투)로 이름을 바꾸기로 하였다.

23일부터 시민투는 집회와 시위를 더욱 조직적으로 진행하였다. 오전에는 목포시민 궐기대회를 목포역에서 열고, ‘우리 겨레와 세계 자유민에게 보내는 목포시민 결의문’을 채택하여 성명서 발표를 하였다.

집회이후에는 가두행진이 전개되었다. 오후 3시를 즈음해서 시민투의 세부 조직이 짜여 지는데 위원장 안철, 위원회 인사들로 엠네스티 재야인사들이 각자 임무를 맡았고, 집행부 쪽은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임명되었다. 이후 안철을 중심으로 한 집회와 시위가 이루어졌고 매일 수만의 목포시민들의 참여를 이끌어 냈다.

25일에는 목포역 광장에서 기독교연합 구국기도회가 열렸으며 이루 광주에서 계엄군의 도청 진공작전이 벌어질 때는 횃불 행진을 실시하였다.

27일 광주에서의 계엄군의 도청 진압 소식이 목포에서도 전해지게 되었고 시민투에서도 항쟁의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었다. 마지막 궐기대회를 갖고 해산하기로 한 것이다. 27일 궐기대회이후 안철 등 시위를 주도하던 위원회 인사들은 타 지역으로 피신하였다. 지도부의 피신과 함께 시민투도 자진해산했다.

시민항쟁이후 안철은 대구, 부산 등으로 피신 생활을 하다 한 달 뒤 목포에서 자수한다. 자수 한 안철은 보안대에서 갖은 고문과 협박에 조사를 받았으며 김대중과의 관계를 추궁 당하였다. 이후 1심 징역 8년, 2심 징역 5년을 선고 받고 광주 교도소에 격리 수용되었으며 면회도 금지되었다. 이에 단식으로 항의하려 하다가 보안사로 끌려가 40여명에게 집단 구타를 당한다. 이후 대전으로 이감되어 수형생활을 하다 81년 12월 특사로 석방되었다.

박광웅은 27일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약 2개월간의 목포에서의 도피생활을 거친 후 서울로 피신하나 체포되어 광주 상무대에서 조사 후 군법회의에서 2년의 형을 언도 받는다. 그도 81년 형집행정지로 풀려난다. 명재용, 강수복, 김상옥, 한봉철, 최문, 박상규, 황인갑 등 시민투, 학생집행부에 참여한 이들 모두 내란중요임무 종사, 내란부화 수행, 계엄법 위반 등으로 형을 언도 받았다. 학생 중에서는 김재홍, 이감규 등은 강제 징집 당한다.

22일부터 27일까지의 항쟁으로 시민투 및 청학투의 조직을 이끌던 대부분의 인사들은 내란죄에 적용되어 수감되거나 군대로 징집되었다. 그 결과 목포지역의 민주화에 대한 역량을 가진 인사들은 남김없이 사라졌고 목포에서 민주화를 말하기란 목숨을 담보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유용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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