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민주화운동 30주년 목포 민주화운동을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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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민주화운동 30주년 목포 민주화운동을 돌아본다
  • 류용철
  • 승인 2017.06.13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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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5월 민주 활동가 수배와 구속 … 지역 민주운동 침체
▲ 민주화 운동 제막식.

[목포시민신문=유용철기자]<글 게재 순서>
①80년 5월 이후 민주화 운동 침체와 재생산, 민예운동 태동
②갯돌의 창립 과정과 청년운동
③목포사회운동청년연합 결성
④87년 6월 민주항쟁 이전의 민주화 활동
⑤87년 6월 민주항쟁 활동
⑥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의 활동
⑦목포사회운동청년연합 조직활동
⑧90년 새로운 청년단체의 결성
⑨청년단체의 통합과 시민사회운동

6월 민주항쟁 30년이 됐다. 박종철군 고문 치사 사건과 최루탄에 사망한 이한열 열사로 촉발된 6월 민주항쟁은 전국적으로 들불처럼 번져갔다.

목포도 예외는 아니었다.

1980년 5월 민주항쟁을 이끈 목포에도 6월 민주항쟁은 대학생과 시민, 고등학생이 하나되어 전두환 군부독재에 맞서 싸웠다.

목포의 6월 민주항쟁을 통해 목포 민주화운동사를 새롭게 조명한다.

본보는 1980년 5월 37주년을 맞아 제518호에 목포 오월 항쟁을 기록했다. 이어 본보는 ‘6월 민주화 운동 30주년 목포 민주화운동사’란 주제로 1980년 5월 이후 목포 민주화 운동을 기록해 본다. 본보는 김수현씨의 ‘목포대 학생운도의 형성’과 박병인씨의 ‘1980년대 목포지역의 청년운동’ 논문을 바탕으로 새롭게 기록했다. 이번 호에는 첫 번째 순서로 ‘80년 5월 이후 민주화 운동 침체와 재생산, 민예운동 태동’이 게재된다.
<편집자 주>

80년대 초기 문화운동과 청년운동 - 민주화 운동의 재생산과 민예

10·26과 12·12쿠테타를 지나 80년 5월 민중항쟁은 전체 운동세력에세 좌절과 패배의 경험 뿐만 아니라 새롭게 진열을 정비하고 향후 변혁의 전망의 제시를 요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학생운동 세력에서는 이러한 변혁의 전망을 제시하는 이념들의 논쟁이 격화 되었는데 81년부터 무학논쟁을 비롯해 85년의 MC-MT 논쟁까지 운동권에서의 자기 생존을 위해 투쟁하던 시기가 있었다.

1980년 5월 이후 목포지역에서의 민주화운동은 매우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주요 활동 역량을 지닌 이들과 지도부의 대량 구속 상태는 비단 목포뿐이 아닌 광주 전남지역의 전 지역엣 공통적으로 나타난 현상이었다. 광주의 피해는 그 만큼 엄청난 것이었다. 5월 항쟁이후 그 피해를 직접적으로 격지 않았던 서울 등 타 지역에서도 운동의 역량의 복구는 시급한 일이었다. 특히 학생층을 중심으로 지하써클화 해갔으며 이러한 써클들 속에서 소수의 핵심인물들이 새로운 운동가를 재생산하고자 노력했다. 소위 민주화 운동에 종사하면서 독재 권력에 항거하던 이들을 운동권이라고 구분하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다.

또 이 시기는 지하의 운동권 내부에서도 이론의 정립과 투쟁의 연속성을 위해 첨예 한 사상 투쟁이 벌어지던 시기이기도 하다.

목포 지역에서도 여러 운동가들이 역량을 다시 복구하고 대중에게 다가 가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목포대에서는 80년 광주·목포 민주화 항쟁을 거치면서 RUSA(Reading Understanding Speaking Association)가 강제로 해체 되었다. 목포대 학생운동의 시초라 할 수 있는 RUSA는 지역 연동교회와 중앙교회에 2개의 소모임과 타 모임을 하나의 모임으로 통합해 80년 3월 만든 ‘공개써클’이었다.

RUSA는 당시 학생들의 사회전반에 대한 변화욕구 충족과 소모임 형태의 학습팀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창립했다.

RUSA의 해체 이후 6 ~ 7 개의 지하 써클들이 활동하면서 새롭게 양성하려했다.

80년대 초기 그 활동에서 뚜렷한 결과물은 보이지 않지만 이후 81년 이후 80년 5월 항쟁 과정 중 구속 수감되었던 지도층 인사들이 형집행 정지 등으로 출감하면서 목포 지역에서 운동의 새로운 흐름이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그 주류적인 활동이 목포지역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것이 문화운동이었다. 80년 5월의 패배 속에서 목포지역의 민족, 민중 운동의 흐름은 변화의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었다.

항쟁이후 주도층의 대량 구속 상태는 주도 및 지도층의 공백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변화의 과정 중에 문화 운동이 두드러진 활동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민주화 운동에 대한 강력한 탄압으로 모든 ‘이념 써클’과 제 단체들은 비합법 지하조직화 했으며 대중과의 연결고리를 찾지 못하는 고립된 운동이 산발적으로 이루어지던 시기에 문화 운동으로의 운동방향의 전환은 목포 지역의 큰 특징으로도 볼 수 있는 활동이었다.

특히 목포 지역에서의 민주화 운동은 문화 운동의 발전과도 맥이 같이 할 정도인데 문화운동은 극히 ‘민예’에서 그 시작을 찾을 수 있다.

81년 4월에 만들어진 YMCA극희 ‘민예’는 특히 청년층이 주도하여 결성했다.

처음 주축을 이룬 세대는 70년대 중반 이후 다니면서 대학 연극반 연구회(탈춤반)를 활동하던 이들이다.

이들이 80년 5월의 항쟁을 계기로 문화로서 항거하자는 여론이 일어나면서 목포대와 목포 전문 대학교의 출신 청년들을 기반으로 해 대학 탈패그룹과 함께 활동을 벌이게 된다. 사회 예술 단체와 대학교의 동아리가 함께 활동하면서 사회인의 신분, 학생의 신분으로 당면 역사의 요구에 발 빠르게 대응할 수 있었다.

또한 80년 5월의 패배의 아픔이 채 1년도 되지 않은 이 시기는 정치, 사회 운동이 침묵을 강요당하던 시기였으므로 문화운동의 필요성이 더욱 강하게 제기됐다. 하지만 진보적 문예 활동을 뒷받침 해줄 토양이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았고, 보수적이고 폐쇄적이기까지 했던 기성 연극계의 극단에서는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기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그러한 점은 타 지역도 마찬가지였다. 가장 활발했던 광주의 경우도 극회 ‘광대’ 해체 이후 암중모색의 길을 걸었고, 이러한 점은 서울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이러한 시기에 인적 물적 토대의 빈약함에도 불구하고 문화운동의 서막을 연 것에서 목포지역의 운동에의 열망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선도적인 대중 정치투쟁이나 풍자적 인 정치비판보다 민예 초기의 모습은 민족문화를 계승 발전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외래문화의 무분별한 유입에의 항거이기도 했다. 문화운동의 지향점이 자유주의적인 측면이 강했으므로 조직적이고 목적의식적인 활동에는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민예는 1회 창단 기념작인 마당극 <나락 놀이>를 제작한다.

<나락 놀이>는 전라도 마당극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으로 암태도 소작 쟁의를 극화 한 것이었다.

마당극과 마당 굿의 형식을 취한 <나락 놀이>는 지주와 소작농의 관계를 벗어나 일제와 맞서 싸운 항일 의지를 보여 민족적 모순을 드러내는데 까지 이르는데 성공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나락 놀이>는 목포지역의 문화 운동의 효시로 불리 운다.

이에 참여한 인물들이 전남대 탈패 신명 출신인 윤만식, 김빌립, 전용호, 김상전,김영정, 목포대 탈패 출신인 김영인, 윤보혁, 강대화, 정현배, 김정희, 심연희, 김상배 목포전문대 출신 윤건 등으로 목포전문대학의 윤석두 교수가 이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이미 그 이 전부터 광주의 신명, 전대 탈패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윤만식, 김빌립 등은 광주에서 목포에 내려올 일이 있으면 윤석두 교수부터 찾았었다.

<나락 놀이> 공연 이후 민예는 목포지역의 문화운도의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80년 5월의 패배이후 극심하게 행해지던 탄압 속에서 민주화 운동의 끈을 이어갈 수 있는 징검 다리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목포 지역의 유일한 대중운동단체로서 시민들과 함께하며 소통하고자 했다. 뿐만 아니라 목포 지역에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활동을 시작한 청년단체의 시작이라 할 수 도 있다.

하지만 민예는 <나락 놀이>에 뒤이어 나온 <의병굿>. <어부 놀이> 이후 별 다른 활동을 하지 못하며 1982년 들어서는 쇠퇴기를 맞이한다.
<정리=유용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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