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기고 (김지민 목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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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기고 (김지민 목포대 교수)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17.07.11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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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 근대건축의 가치 공감

한반도 서남쪽 끝에 자리한 목포는 1897년 10월 1일에 개항을 계기로 발전된 근대도시    다. 개항 전 목포에는 전라 우수영 소속의 木浦鎭이 있었으나 이는 일반인과 거리가 먼 군영시설이었다. 즉 개항 전 목포는 務安縣 소속으로 해안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작은 어촌이었다.

개항이후 목포는 하루가 다르게 인구가 늘었다. 그리고 한국인과 일본인이 철저히 이    분화 된 공간구조 속에서 생활 했다. 거주 지역도 달랐고 각자 사는 살림집도 우리는     한옥이고 그들은 다다미방이 있는 일식집에서 살았다. 학교도 한국인 학교와 일본인 학    교로 이분화 됐다. 심지어 종교시설인 사찰과 교회도 각자 세웠다. 이렇듯 서로 다른 사고와 공간속에서도 목포는 점차 근대도시로 성장하여 1935년에는 인구 6만의 전국 6대 도시로 성장했다. 작은 어촌에서 일약 대도시가 된 것이다.

도로망 등 도시의 구조가 갖추어진 새로 난 길가에는 어김없이 전에 보지 못한 건물들    이 들어섰고 각양각색의 간판이 걸렸다. 방울모양의 5개 등이 달린 멋진 가로등이 저녁    에도 거리를 밝게 비췄다. 즉 모던건축과 함께 모던도시가 탄생한 것이다.

목포의 근대건축 등장은 다음과 같이 크게 3가지 경로를 통해 자리했다. 첫째는 1900    년대 초 미국 남장로교 소속 선교사들이 선교의 목적으로 목포를 찾으면서 교회와 학    교, 살림집 등을 지으면서 근대건축이 유입됐다. 둘째는 일본이 이 땅을 식민지화하는 과정에서 지배목적과 관리를 위해 지은 공공성 건물과 그들의 거주 및 생활시설이다. 셋째는 인구증가와 도시화가 가져다 준 근린 상업시설의 등장이다. 현 행복동, 대의동일대의 폭 6~8m의 도로 변에 주로 2층 상가가 집중적으로 들어섰다. 1층은 식당, 술집, 생필품 가게 등이 자리 했고 2층은 주거시설로 사용했다. 대지가 넓은 곳은 후면에 작은 마당이 있고 그곳에 별도의 살림집을 짓기도 했다.

목포는 개항도시답게 보존 및 활용가치가 높은 근대건축물이 많이 있다. 살림집으로    부터 공공청사, 교육, 종교, 상업, 부둣가 창고까지 등 다양한 건축물이 존재한다. 특히    유달산 특유의 응회암을 사용한 석조건축은 전국 어느 도시에서도 볼 수 없다. 문화재로 지정 된 건축물도 목포 구 일본영사관(사적),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도 유형문화재) 등 10곳이 있다. 한편 가치는 있으나 세상의 관심 밖에 있는 건물도 너무나 많이 있다. 그들은 세월이 흐를수록 점차 사라지거나 변형이 되고 있다. 특히 상가와 주거 건물이 더욱 심하다. 

이제 제도권 안에서 적극적으로 보존 및 활용 대책을 세워야 한다. 그 주체는 건축주, 시민, 전문가, 관이다. 서로가 소통하여 도시 발전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특히 목포의 근대건축은 목포 원 도심에 집중적으로 산재해 있어 원 도심 활성화의 촉매 역할이 될 수 있다. 점 단위의 공간을 면으로 구성하여 신도시 못지않게 사람이 몰리는 거리로 만들어야 한다. 지난 100여 년 간 목포 역사의 산 증인으로 자리를 지켰던 근대건축물이 그간 너무 낮게 평가됐다. 이제 그 가치를 높이고 서로가 공감해야 한다. 목포는 그동안 활용하지 않은 풍부한 근대문화유산이 있다. 이제 역사와 문화가 도시의 경쟁력이다.

<약력>
대통령 소속 국가건축정책위원회 위원, 대한건축하고히 지회연합회 회장 역임, 현 문화재청 문화재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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