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출신 최초 일본 여자축구팀 이효경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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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출신 최초 일본 여자축구팀 이효경 선수
  • 이효빈
  • 승인 2017.11.22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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끈기와 의지 투지로 쌓은 실력, 오뚜기 선수 일본을 뛰다!
 

[목포시민신문=이효빈기자]‘인생은 롤러코스터’라 했던가. 만20세의 어린나이에 세 번의 큰 부상에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재기에 성공, 체육인들의 꿈의 마크인 태극마크를 달며 목포 출신의 여자축구선수로 타국(일본)에서 엄청난 활약을 펼치고 있는 선수가 있다. 일본 호쿠리쿠 대학교 여자축구팀 소속이자 내년에 일본 프로팀 계약 체결을 앞두고 있는 목포부설초등학교 전교어린이 회장 출신인 ‘이효경(일본 호쿠리쿠대 21세)’ 선수가 화제의 주인공이다. 효경선수를 만나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첫 대표팀 주장

이효경선수의 첫 축구는 목포부설초등학교 3학년에 재학하고 있을 무렵이다. 하교 후 남자친구들이랑 운동장에서 축구를 자주 했단다. 학원시간은 점점 다가왔지만 축구가 너무 재밌어 학원 시간을 종종 놓쳤고, 부모님은 골머리를 앓았다. 그렇게 행복한 축구놀이에 푹 빠져 하루 하루를 보냈고, 시간은 흘러 6학년이 되었다. 점심시간 남자친구들과의 축구놀이를 눈여겨본 체육선생님이 학교 축구팀 스카웃 제의로  목포시장기대회에 나가게 되었다.

대회역사상 최초의 여자선수임에 모든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학생들을 데리고 대회에 출전해 대회를 지켜 본 광주 광산중, 광양 광영중 감독들은 목포부설초에 효경 선수의 중학교 입학에 따른 스카웃 제의를 했다.

학교와 부모님은 비상이 걸렸다. 축구는 그저 취미로만 하는 줄 알았는데 축구 감독들의 눈에 들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니 놀라움 속에 걱정이 커져갔다. 당시 효경이는 공부도 남다르게 잘해 목포부설초 전교어린이회장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교장선생님과 담임선생님, 부모님의 고민이 깊어질 수 밖에.  이들은 함께 모여 효경이의 진로를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리고 최종 결정은 축구였다. 효경이는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부모님 품을 떠나 광양에서 축구화 끈을 질끈 동여매는 진짜 선수생활을 시작했다. 고민 끝에 시작된 축구선수 생활은 승승장구였다. 축구를 시작한 후 9개월 만에 청소년 국가대표로 태극마크를 달았다. 그리고 u-13 청소년 대표팀의 주장이 되었다,

△첫 시련

“돈은 돈대로 들어 부모님께 너무 죄송했고, 빨리 복귀해야 된다는 생각 뿐이였죠”

만15세 여자축구선수들의 리그전인 여왕기 첫 시즌, 첫 경기 상대의 태클로 인해 페널티킥을 얻어내고 왼쪽 무릎 십자인대를 다쳤다. 고통 속에 마친 경기는 승리였다. 효경이의 뼈아픈 페널티킥으로 팀은 승리했다.

하지만 효경이는 그때부터 기약 없는 재활에 들어갔다. 5개월의 시간이 소요됐다. 첫 재활당시 선수생활에 대한 초조함과 기대하고 있는 부모님에 대한 미안함으로 하루 하루를 힘들게 견뎌냈다. 비온 뒤 하늘이 맑은 것처럼 힘들었던 첫 재활생활이 끝난 후 곧바로 16세 대표팀에 소집됐다. 그 뒤로 꾸준히 주장완장을 차며 U-16세 아시안컵을 나가게 됐다.

△첫 아시안컵, 두 번째 부상

때는 바야흐로 2013년, 효경이는 U-16세 난징 아시안컵대회에 주장이자 수비의 핵심으로 대표팀을 이끌고 중국 난징에 발을 내딛었다.

우즈베키스탄과의 첫 경기에서 상대선수의 태클로 필드 위에 쓰러졌다. 쓰러진 찰나, 머릿속엔 주장으로서 팀에 대해 미안한 생각 뿐이였다. 대표팀은 우승이 목표였지만 주축인 주장이 아웃됨으로 인해 예선 탈락됐다. 설상가상 약하게 다친 줄 알았던 부상 또한 심각했다. MRI를 찍어보니 처음 다쳤던 왼쪽 무릎 십자인대를 더 심하게 다쳤고, 더불어 연골판까지 찢어졌다. 총체적 난관이었다. 두 번의 수술이 이루어졌다. 

다시 끝없는 재활이 시작됐다. 처음 다쳤을 당시 재활이 너무 짧았다 생각해 9개월을 재활에 매진했다. 한번만 더 다치면 이젠 끝이다라는 생각에 남들보다 더 열심히 재활했다. 재활센터에 다닐 때에는 제일 먼저 도착해서 제일 늦게 나왔다. 마지막 복귀하기 직전에는 새벽(5:50~ 7:00)에 볼을 차고. 오전과 오후는 재활센터에서 야간에는 개인운동을 하다가 서울 보인고 체육선생님과 매일 운동했다. 보인고 선생님은 재활운동하면서 친해진 선생님이었다.


 재활 시절에 제일 힘들었던 건 인간관계에 대한 고찰이였다. 다치기 전, 최고일 때 옆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정작 힘들고 외로울 때는 많이 없었다. 많은 생각과 깊은 자기성찰을 하며 인간관계에 대해서 남들보다 더 일찍 성숙해졌다.

끝까지 곁을 지키며 항상 격려하고 응원해준 가족들이 없었다면 포기했을 지도 모른다. 매일이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그렇게 하루는 기뻐하고, 하루는 우울해 하고, 하루는 힘들어하며 열 여섯 살의 처절한 선수 인생을 살아냈다.

△u-20에 뽑히다, 세 번째 십자인대 부상 

꾸준히 운동과 재활을 병행하며 지내던 어느 날, 17살이던 효경이는 3살 위인 u-20대표팀 최종소집에 뽑혔다.  또래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다치기 전에 활약했던 가능성을 보고 뽑힌 것이다. 비록 최종엔트리에는 떨어졌지만 넘치는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 꾸준한 몸 관리와 함께 하루하루 열심히 운동했다. 너무 이른 가능성을 봤을까? 휴식도 훈련의 일환이건만 효경이는 쉬지 않고 운동했고 결국 과부하에 걸렸다. 다시 다친 것이다. 이번엔 오른쪽 무릎 십자인대 부상이었다. 고려대 여자 축구부와 연습게임을 하던 도중 이었다. 8개월 시즌 아웃. 효경이는 당시 “축구를 더 이상 못 하겠다”며 포기하고 싶었단다. 그만큼 실망감이 컸다.

그때 어머니가 청소년시절 탁구선수였던 본인의 경험을 들려주고 포기하지 말자고, 마지막으로 한번 해보자고 아버지와 같이 설득해 힘을 얻고 재활에 매진했다. 당시 전남축구협회장님도 도움을 많이 줬다. 다친 뒤 바로 찾아와 넌 축구할 때가 제일 빛난다고. 포기하지 말고 힘내라고. 

△일본 대학팀 최초 진출, 목표는 유럽무대

 

아픈 부상의 기억을 떨쳐내고 다시 복귀에 성공해 대학과 실업팀의 기로에서 고민할 때 즈음 효경 선수의 예전 활약상을 기억에 남겨두었던 한 에이전트가 연락이 왔다. 일본 대학팀으로의 진출과 그에 따른 학비와 기숙사비등은 전액 지원이라는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했다.

안정적인 국내를 택할 것인가,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도전을 할 것인가의 고민은 용감한 도전으로 이어졌다. 이에 효경선수는 국내에서 일본 대학팀으로 진출한 최초의 선수가 됐다. 현재는 일본 이시카야현 호쿠리쿠대학교 여자축구팀에서 중앙수비와 중앙미드필더를 맡아 활약하고 있는 중이다.

지난 11월에는 u-20 카푸아뉴기니 월드컵에 국가대표로 선발출전, 브라운관에 시청자들의 눈도장을 찍기도 했다.

최근에는 일본축구를 더 알기위해 일본 어린이들을 가르칠 수 있는 일본축구지도자 C급 자격증도 획득했다.  

‘비온 뒤에 땅이 굳는다’는 말처럼 그 나이에 겪기 힘든 풍파를 잘 견뎌내 비상(飛上)하고 있는 ‘이효경’선수.

이미 대한민국과 목포를 빛내고 있지만, 최종 목표는 일본 리그가 아닌 유럽리그에 진출해 선한영향력을 흘려보내는 것이란다. 세상에 수없이 넘어져도 좌절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 결국 미국의 대통령이 된 링컨 대통령은 효경 선수의 유일한 롤모델이다.


“남자는 십자인대를 한 번만 다쳐도 군대 면제에요. 저는 세 번이나 십자를 다쳤고 재활에 성공했죠. 하하하”

세 번의 큰 부상에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회복에 성공한 효경 선수의 별명은 ‘오뚜기’이다.

다섯 자매 중 둘째인 효경선수를 보고 자란 넷째 동생 이효주(충남 인터넷고2)양과 막내 이하선(광양 중앙초5)양도 목포에서 나고 자라 여자축구에 매진하고 있는 꿈나무들이라고 한다.

한국 여자축구의 미래를 짊어지고 있는 효경선수와 이(李 )자매들, 이들의 더 큰 도약과 날갯짓을 응원한다.
일본/이효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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