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회 시작문학상 수상 목포대학교 국문학과 김선태 교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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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회 시작문학상 수상 목포대학교 국문학과 김선태 교수(시인)
  • 최지우
  • 승인 2017.12.20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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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쓴다는 것은 자기 속에 있는 맺힘을 푸는 행위 한풀이다”

때론, 알갱이를 빼앗긴 빈 들판 한편에서 묵묵히 홀로 시간을 이겨내고 있는 고목나무의 처연한 위엄으로 세상을 관조하고 싶었다. 가끔은, 허한 마음 감싸줄 그 무엇을 위해 무심한 막걸리 한통의 쏴~한 온기로 하룻밤 위안을 삼았다. 

숨결 숨 결 되살아나는  떨쳐낼 수 없는 기억의 편린들…집착이라 해도 좋았다, 무모한 아집이라 해도 좋았다. 그렇게 자신을 지탱하던 이루지 못한 사랑의 아픔을 삭이고 덜어내는 자신만의 숭고한 의식처럼 다녀간 한사람을 추억했다. 남들은 그런 그를 시인이라 불렀다.

그렇게 애끓는 절규로 한 자 한자 엮은 시인의 마음은 한 권의 시집이 되었고, 그 시집은 오롯이 자신만을 위한 자신만의 이야기로 뜨겁고도 아픈 자신의 사랑을 고백한 성스러운 고백서 이기도 하다.

중학교 1학년 까까머리 사춘기 소년에게 운명처럼 찾아온 詩의 세계, 60이 가까운 현재까지 한 눈 한번 팔지 않고 시를 써온 시인에게 영광스러운 경사도 생겼다.

지난 8월 발매한 ‘한 사람이 다녀갔다’를 비롯한 그간의 문학적 업적을 인정받아  ㈜천년의 시작(문예지 시작)에서 제정한 제9회 시작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것이다. 목포문단에서는 오랜만의 일이고, 목포에서 활동하는 시인들 중 중앙문단의 문학상을 받는 경우가 드물어 매우 의미 있는 일로 꼽히고 있다.

김선태 교수는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3편의 시가 실려 있을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는 시인이다. 중 3교과서(미래엔교과서) ‘산벚꽃’, 고등학교 1학년 국어교과서(천재교육 교과서) ‘말들의 후광’, 고등학교 문학교과서(비상)에 ‘갈대의 시’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를 쓰기 위해 살아간다는 목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김선태 교수, 깡 하나로 견고하게 쌓아온 그만의 詩 성(城)에 조심스럽게 입성했다.

“상과 인연이 많은 사람이 아니다. 그동안 서울 문단에 서운한 점도 있었고, 시골촌놈이라는 자괴 섞인 자학도 있었다. 원래 상이라는 것이 서울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이번에 상을 받게 되어서 기쁘다.” 무심한 듯 새어나온 시인의 진심어린 감정이었다. 

김선태 시인의 시 쓰기는 강진군 칠량중학교 1학년 때부터 시작됐다. 방학 중 고전문학 숙제로 독후감쓰기를 내 줬는데 집에 책이 없었다. 형님 책꽃이에 꽂혀 있던 두 권의 책, 새농민과, 김영랑 시집이 유일했다. 그렇게 김영랑시집은 그의 일생을 바꿔 놓았다.

“생전 처음 시집을 접했었다. 특히 같은 강진 출신이라는 점에서 큰 충격을 받았다. 강진 이런 촌에서도 시인이 나올 수 있구나 하는 충격이었다. 시를 읽다 차츰 자신이 생겼다. 그래서 노트에 100여 편의 시를 써서 숙제를 냈다” 고 했다. 방학이 끝나고 선생님이 진짜로 네가 썼냐고 몇 번을 물어 볼 정도로 그때부터 김선태 교수의 글쓰기는 탁월했다. 수업시간마다 다른 반 아이들에게 그가 쓴 시를 읽어주었고, 김 교수는 그때부터 시인으로 불렸다.

그때 자신을 시인의 인생으로 이끌어준 선생님이 최병두 시인이다. 이후 최병두 시인은 김 교수가 시인으로 살아가는데 조력자로 많은 도움을 줬다고 한다.

또 한 가지 김 교수의 조숙한 짝사랑 또한 지금의 시인을 있게 한 원동력이었다.

“나는 지금 생각해보면 시를 참 빨리 쓴 편이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40년 동안 한사람을 짝사랑 했었다. 그렇게 이루지 못한 사랑의 상실감이나 허무가 시를 쓰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시를 포함한 모든 문학은 힐링이다 자기 상처를 치유 하는 것이다. 내가 시를 쓰도록 만든 원천은 바로 사랑이었다.”고 고백했다.

김 교수는 첫사랑은 자기스스로 성을 쌓는 환상이라 했다. 그래서 오랫동안 지속될 수가 있는 거라고.
김 선태 교수는 강진군 칠량면 가난한 동네에서 태어났다. 칠량에 중학교가 생기지 않았다면 아마 자신은 국민학교 졸업이 마지막 학력이 되었을 것이라는 농담으로 가난한 지난날을 대변했다. 

강진칠량면에서 간신히 중학교를 졸업하고 형편이 어려워 야간고등학교를 다녔다. 전남대학교의과대학교 생화학교실 급사 생활을 하며 광주 송원고등학교 야간을 다녔다. 그야말로 주경야독의 산 증인인 셈이다.

그렇게 어려운 생활이었지만 고려대학을 꼭 가고 싶었다. 특유의 깡으로 2년 동안 재수를 하며 도전했지만 들어갈 수가 없었다. 당시 야간고등학교는 직장생활을 다니는 사람들이 다녔기 때문에 제대로 수업을 하지 않았다. 미적분을 학원에서 배웠을 정도다. 김 교수는 중학교 당시 전체 2등으로 졸업을 했었고, 그때 3등까지했던 친구들은 전부 서울대학교를 들어갔다고 한다. 2년의 재수 끝에 당시 후기대학인 목포대학교에 진학했다. 은사였던 최병두 선생님의 조언도 있었다. 입학을 하자마자 5개의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했다. 하지만 5.18이 일어났고 과외 금지령이 내렸다. 어쩔 수 없이 2학기 때 자퇴를 결심한다. 하지만 김 교수의 재능을 안타까이 여긴 당시 학과장이 학비를 보조해주면서 학보사 편집국장으로 근로장학금을 받게 되었다. 학보사에 살다시피 하며 시를 많이 썼다고 한다. 그렇게 인연이 된 목포대학교는 조교와 강사 생활을 거쳐 평생 후배들을 지도하는 또 하나의 자신만의 성이 되었다.

김교수는 목포문단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그 중 목포문학관 문예대학 시 창작반은 15년째 애정으로 지도하고 있다. 수강생 대부분 나이가 50대 이상에서 80세까지다. 

“사람들은 태어나서 사는 동안에 가슴에 맺힘이 있다. 상처나 트라우마 인데 맺힌 것은 그냥 풀어지지가 않는다. 시를 쓴다는 것은 자기 속에 있는 맺힘을 푸는 행위다. 그리고 사회적인 측면에서 개인적인 것이든 공동적인 것이든 맺힌 부분에 대한 한 풀이인 것이다.”며 애정으로 지도한 제자들의 문학힐링에 대해 얘기했다.

누구에게나 내가 왜 살아야 하는가 이유가 되는 그 무엇이 있어야하고, 방법이 각자 다르지만, 그것은 자기위안, 자기발전, 자기수련이라고도 했다. 

김선태 교수의 앞으로의 계획은 거창하다.

“평생 써온 시를 계속 쓸 것이고, 원하는 사람들과,  중고등학교 학생들에게 목포문단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 하는 문학 강의를 할 것이다. 과거목포문학의 화려한 전통을 앞으로 계승해야 할 방법은 무엇이고 어떻게 나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 지역문학인의 한 사람으로 깊이 고민할 것이다” 며 “목포문학은 다른 칼라를 가져야 한다. 목포는 목포가 가지고 있는 환경을 담아야 한다. 서남해 갯벌, 해양, 연안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내야 한다”고 했다.

그중 가장 자랑하고 싶은 한 가지는 “지금껏 목포 문학사가 없었다. 1920년부터 2015년까지 처음으로 목포시사에 목포문학사를 정리했다. 목포에 속한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한 교수로서의 책무라고 생각한다. 목포 문학의 전반적인 사항이 다 들어있다.”고 했다. 

은퇴 후 김 교수는 흑산도로 귀어 할 생각이다. 좋아하는 낚시를 하며, 자산어보에 대한 시를 쓸 황홀한 계획도 있다. 그것이 이생에서 자신이 해야 할 마지막 일이란다.

고독하지만 전혀 고독하지 않고, 외롭지만 전혀 외롭지 않은 사랑하지만 전혀 사랑하지 않는 화성출
신 특별한 시인의 이생살이가 녹록치 만은 않다지만 그래도 시가 있어 행복하고 또 행복한 하루하루를 채워간다.
최지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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