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용철작가와 함께 떠나는 목포 백년의 골목길 투어-② 목포 해안로 루트를 따라서-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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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철작가와 함께 떠나는 목포 백년의 골목길 투어-② 목포 해안로 루트를 따라서-3
  • 류용철
  • 승인 2018.01.30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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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 시원 목포진(鎭) 찾아 떠난 600년 목포 숨결
1920년대 목포시 전경.

[목포시민신문=유용철기자]두 번째 연재로 목포의 심장을 걷는 ‘목포 해안로’루트를 구상해 본다.

△오거리(吾居里)에서 시작해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첫 해운사 건문 △옛)조선은행(현 목포문화원 건물) △옛)화신백화점 △갑자옥 모자점 △목포 백반의 거리 △목포 민주화 산실 고 안철 장로 약국 △옛 수문통 거리 △민어의 거리 △옛 힛빠리 골목(항동시장) △고 김대중 전 대통령 유년시절 집터 △만호진 △여객선터미널 △금화동 유곽 △ 서산동 조금새끼 골목 △할매집 △보리마당까지 오르는 길이다.

이번 ‘목포 해안로’ 골목길 연재는 두 번째로 △옛 힛빠리 골목(항동시장) △고 김대중 전 대통령 유년시절 집터 △만호진 △여객선터미널까지 걷게 된다.

<편집자주>

힛빠리 골목이 항도시장으로 바뀌다

민어의 거리로 명명한 이곳을 지난 ‘수강로’를 따라 걷다보면 해항도시장이 나온다. 항도시장은 예전에 ‘힛빠리 골목’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일제강점기 목포에는 ‘히빠리마치’라는 하급 유곽이 존재했다. 일본인들이 다니던 유곽은 사쿠라마치라 하여 현재 목포수협 건너편인 금화동에 존재했다. 조선 사람들은 옛 하급 유곽이 있던 현재의 항동시장 일대에 있었다. 목포사람들은 지금도 히빠리마치, 힛빠리 골목이라 이곳을 부른다. 힛빠리(引つ張り)라는 말은 일본어로 ‘잡아당긴다.’는 말로, 호객행위를 뜻한다. 해방 이후 사꾸라마치의 여성들도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1970년대까지 ‘힛빠리 골목’은 좌우 200m정도로 길게 성매매 업소들이 늘어섰다.

목포사람들은 이곳을 또 ‘휘파리 골목’이라 부르기도 했다. 윤락가 여성들이 휘파람을 자주 불었던 것에 기인했다는 설이 있다. 지금은 민중약국과 만호쌀가게에서 해운 모텔 인근까지 길게 이어진 이 골목은 1970년 초 성매매 업소가 삼학도로 집단 이주하면서 사라졌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 유년기 집터

항도시장 상가 거리를 걷다보면 목포진으로 오르는 골목길이 나타난다. 가파른 골목길엔 계단이 설치되어있다. 골목길 가운데와 양옆에는 지지대가 설치돼 있어 고령화의 그늘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이곳에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유년시절을 보냈던 집터이며 모친이 운영했던 여관터가 나온다. 이 곳에서 김 전 대통령은 고향인 신안군 하의도를 떠나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시절 등 유년기를 보냈다.

또 김 전 대통령의 모친이 여관을 운영하며 김 전 대통령의 뒷바라지를 했던 곳이다. 이곳에서 소년 김대중은 유달산 노적봉과 오거리를 지난 조선인들만 다니던 북교초등학교까지 통학했다. 유달산자락 대성동에 위치한 목포상업고등학교까지 다녔다. 일제강점기 목포상업고등학교는 현 대성동 인근에 있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자신의 회고록에 “어머니의 결정이 없었다면 나는 시골에서 군의원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고 말했다. 모친이 하의도에서 나와 목포로 생활공간을 이전한 것은 소년 김대중에게 인생의 최대 전환점이었다 점을 시사하고 있다.

현재 목포시는 이곳에 공원을 조성할 계획이다. 목포시는 이곳에 김 전 대통령 모습을 담은 흉상이나 벽화 설치, 인동초 거리 조성 등 김 전 대통령 기념·상징물을 시설하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

목포진, 목포 탯자리 600년을 말한다
 

 


이곳에서 고개를 돌려 올려다보면 목포의 시원(始原)인 목포진(木浦鎭)이 있다. 목포시가 복원사업을 추진하여 2014년 목포진이 옛 모습을 되찾았다. 1895년 대한제국이 군사조직 개편과 함께 폐진시킬때까지 500여년 동안 목포를 지켰다. 1897년 목포항 개항과 함께 일본인 거리가 조성되면서 차츰 진(鎭)터와 성곽터가 사라졌다. 일제강점기 민족의 전통성이 말살되면서 그 흔적이 사라지고 1945년 해방과 한국전쟁과 함께 인구가 급증하면서 사람들이 무분별하게 이곳에 집을 짓고 살면서 흔적조차 사라졌다. 목포시가 목포진 자리에 일부 객사와 전망대등을 복원하여 목포진 공원을 조성하여 개장했다.

목포진은 1432년(세종 14년) 축조하기 시작해 1501년(연산군 7년)에 성곽이 마무리 됐다.

조선시대 수군(水軍) 직제에서 통제사, 수영 다음인 만호 규모의 군사 주둔지였다. 만호는
진(鎭)과 보(保)로 조선시대 군영으로 규모에 따라 첨사, 만호, 별장이 지휘 통솔하였던 곳이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정유재란 때인 1597년(선조 30) 9월 16일 명량에서 일본 수군 300여척을 대파, 대승을 거둔 후 목포진이 지키고 있는 고하도에 진을 설치하여 107일간 머문다. 이 충무공은 이 기간 동안 병선을 새로 건조하고 수군병력을 증강하는 등 진열을 정비한 후 패전으로 후퇴하는 일본수군을 궤멸하기 위해 완도 고금도로 이동했다. 현재 고하도에는 이충무공 고하도유허기사지비(1722년 건립)와 모충각이 있으며 매년 4월 28일 충무공 탄신일을 기해 탄신제를 거행하고 있다. 충무공의 충절과 지략은 유달산 노적봉 전설로 남아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 촬영한 사진에서는 당시의 성벽 등이 선명하게 남아있었으나 현재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유달산과 삼학도와 목포시가지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일본식 절 약사사 일본 제국주의 흔적 남아

목포진을 내려오면 일제강점기 일본식 절이 있다. 약사사(藥師寺)는 1927년 4월 21일 신축된 사찰이다. 일제강점기 당시는 ‘임제종 동북사파 목포포교소’로 건립됐다. 현재 조계종 계열로 운영되고 있는 이 사찰은 명칭도 일본인들이 사용했던 ‘약사사’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경내에는 1935년 건립된 불상과 1930년에 건립된 물을 담는 석조가 있다. 사찰 경네에 있는 대웅전과 칠성각은 일본식 사찰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사찰로서 입지 환경이 매우 열악한 곳에 자리한 특이한 사찰이다. 약사사 본당은 지형은 최대로 살려 건립한 모임지붕의 일본식 목조 건축으로 일부 창호와 지붕 재로만이 교체되었을 뿐 비교적 건립당시의 모습을 잘 갖추고 있다.
유용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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