雲霧山水로 이어지는 雲林山房 4代畵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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雲霧山水로 이어지는 雲林山房 4代畵脈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12.10.08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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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연민(憐憫)으로 이어진 필맥(筆脈)
 

운림산방의 화맥을 4代째 잇고 있는 나는 1941년 11월 목포(木浦)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돌잔치 한 달을 앞둔 1942년 10월 천재화가로 평가받던 아버지(林人, 許林)가 26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셨다.

그때는 전쟁 직후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 춘궁기라는 보릿고개까지 넘어야 하는 각박한 시절이여서 세끼 끼니만 해결할 수 있으면 중산층으로 분류될 정도로 아주 궁핍한 시대였다.

편모(偏母)밑에서 정상적인 교육과 성장이 어렵다고 판단하신 할머니의 간청으로 1948년 이른 봄,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되면서 남농(南農) 백부(伯父)님의 슬하로 들어갔다.

화실은 항상 방문객들로 붐볐고 그 좁은 틈새에서 서너 명의 제자들이 쪼그리고 앉아 늘 같은 모습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과는 전혀 아랑곳없이 사촌들의 궂은일과 잔심부름 사이를 오가면서 숨 가쁜 유년기(幼年期)를 보냈다.

당시를 연상하면 알 듯 모를 듯 스쳐 지냈던 그때부터가 나도 모르게 그림을 그리게 된 내재적(內在的)인 동기이며 시작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아주 먼 훗날에 내려진 결론 이였지만 결코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허전하고 우울했던 중학교 시절에는 말없는 아이로 통했고 장소나 상대에 관계없이 항상 혼자라는 느낌으로 지냈다.

목포상업고등학교에 입학해서는 음악부에 들어가 트럼펫을 불었다. 럭비공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춘기의 예민한 시기에 무엇엔가 심취하여 몰입해야하는 상황에서, 트럼펫이라는 매체를 통해 순간순간 울컥울컥 솟아오르는 내면의 감정들을 자연스럽게 불어버릴 수 있었으니 그나마도 다행스러운 선택을 한 것 이였다.

내가 ‘삼천포로 빠지지 않고’ 오늘에 이른 것도 음악이라는 튼튼한 가교(架橋)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대강 이 대목에 이르면 내 시작은 미술이 아니라 음악이었다는 정답이 나오는데 잠깐이었지만 나도 한때는 <하리 제임스>나 <루이 암스트롱>같은 세계적인 트럼펫 연주자가 되고 싶은 찬란한 꿈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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