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망증과 치매 사이에서 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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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망증과 치매 사이에서 논다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18.09.12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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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희 칼럼니스트

10대에는 40세까지만 살다가 죽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유행처럼 번지던 전혜린과 시몬느 베이유의 영향이 컸다. 그들의 짧은 삶이 부러웠다. 그들의 축적된 삶과 글을 읽으면서 나도 열정적으로 살다가 이 땅에서 사라지고 싶었다. 아마도 소녀 시절의 치기어린 결정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때는 내 깐에 심각했다.

길에서 엇갈린 70이 넘은 공자를 찾던 제자에게 ‘상갓집 개처럼 앉아 있는 분인가요?’라고 말한 사람이 있었다. ‘상갓집 개’는 먹여주고 돌봐 주는 주인이 초상이 나서 챙겨주지 못한 개이다. 그러니 아무리 훌륭한 삶을 살았어도 ‘상갓집 개’가 된다는 게 싫었다.

그런데, 아이러니칼하게도 40대에 대장암 수술을 했다. 우연히 친구 따라 가게 된 가정학과 병원에서 의사선생님의 진료를 받았다. 선생님은 종합병원에 가야 할 것 같다면서 아예 종합병원에 예약을 해주셨다. 그러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병원에 가지 않았다. 며칠 후였다. 의사선생님이 전화를 하셨다. 병원에 들렀냐고. 선생님은 나의 무심함을 나무라지 않고 다시 예약을 해주셨다.
처음으로 대면한 의사선생님의 배려 덕분에 대장암을 진단받을 수 있었다. 서울에 있는 유명병원에 근무하는 제자에게 어떡하면 좋으냐고 물었다. 초기 단계이니 복잡한 서울까지 올라올 필요가 없다고 했다. 이 지역 종합병원도 훌륭하다며. 그런데 목포에서 수술했다. 가족은 허술한 병원을 보면서 초기단계로서니 명색이 암 수술인데 하며 걱정했다. 그러나 집도 하시는 의사선생님의 경험을 믿고 대장과 작은창자 40cm를 잘라냈다. 그리고 여름날 에어콘도 없는 병실에서 뜰을 내려다보며 비로소 실소를 했다.

그런데 60세가 넘은 지금, 치매 때문에 걱정한다.

최근에 알게 된 배우나 가수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수도 없이 들었던 음악 제목도 생각나지 않는다. 감명 깊게 읽은 책 제목이 도저히 생각나지 않아 추천할 수도 없다. 오랫동안 함께한 친구를 만났는데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 쉬운 단어도 생각나지 않아 상대방을 답답하게 만드는 일이 부지기수다. 어느 날 늦은 저녁에 차를 모는데 갑자기 늘 다니는 길이 낯설었다. 그래서 길 옆에 차를 세운 적이 있다.

인터넷에서 초기 치매를 앓고 있는 노인을 본 적이 있다. 폐지 줍는 70대 노인인데, 집으로 가는 길을 잃고 힘없이 땅 바닥에 앉아 있었다. 그의 곁에는 폐지 담은 리어카가 덩그러니 놓여 있고.

환자는 아무것도 몰라 괜찮을지 모른다. 그러나 치매가 오래갈수록 가족은 황폐해진다. 그래서 두렵다. 인터넷에서 건망증과 치매의 차이를 찾아봤다.

「건망증은 사건의 세세한 부분을 잊을 수 있지만 힌트를 주면 기억해낸다. 더욱이 본인이 기억력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치매의 초기는 기억장애이다. 사건 자체를 잊는다. 힌트를 주어도 기억하지 못한다. 본인의 기억력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모르거나 인정하지 않는다.」

하루는 지인들이 있는 자리에서 치매 이야기를 꺼냈다. 그랬더니 한 지인이 아버지의 치매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지인의 아버지는 70대이신데 알콜성 치매다. 신기하게도 술을 마시면 정신이 잠깐 돌아올 때가 있다고 한다. 아버지는 대부분의 가족을 못 알아본다. 그런데 가장 예뻐했던 지인만 알아본다. 그 때문에 아버지를 모시는 남동생은 섭섭해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어쩌다 찾아오는 딸은 아는데, 날마다 함께 사는 아들은 못 알아보니 섭섭할 법도 있을 터. 지금 지인의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엄마, 엄마”하며 졸졸 따라다니신다. 치매가 있는 사람은 기억력이 최근 것부터 사라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인의 어머니는 아버지를 집에서 모신다. 대단하신 어머니이시다. 두 분 사이의 에피소드도 들려주었다. 젊은 시절에 아버지는 늘 어머니에게 “당신만 아니면 봉순이랑 잘 살고 있을 텐데.”라는 말씀을 하셨단다. 자식들은 웃는데 어머니는 힝!하고 고개 돌리곤 하셨단다. 그 어머니께서 요즈음 아버지가 봉순이 타령을 하지 않아서 좋다 하신단다. 웃자고 들려 준 이야기인데 이렇게 아름다운 치매도 있네 싶었다.

이 글을 쓰는 나, 건망증은 있을지 모르나 치매는 아님. 그래서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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