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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시인의 고향, 옛 기억속에서 되살리다김제희 신안군의회 전 의장 고 최하림 시인을 추모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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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3.13  17: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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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최하림 시인 김제희 신안군의회 전 의장

만물에 근원이 존재하 듯 사람에게는 누구나 고향이 있기 마련이다. 태어나서 자라고 성장하여 어른이 되고 부모님을 찾아 뵙고 살피며 나이 들어서는 결국 흙에 묻히고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하는 값지고 귀한 땅, 고향에는 추억이 있고 그리움이 있고 옛 벗이 있어 늘 친근하고 어머님의 품처럼 따뜻하여 온기가 느껴지는가 보다.

하지만 더러는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으니 고향 때문에 울고 고향 때문에 슬퍼하며 젊은 날의 초상을 애써 지우려는 사람들도 있다. 누구는 고향 때문에 웃고, 행복하고 또 어떤 이는 고향 때문에 서러워 외면하며 살고 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인생길이 아니겠는가?

내 나이 올해로 83세, 백수를 바라보며 어느덧 70년의 세월이 한 순간에 지나갔음을 실감한다. 하지만 유수와 같은 세월속에서도 유년시절의 기억들이 오히려 또렷하게 남아 있는 것은 못 살고 가난했던 시절, 너무나도 슬프고 아픈 기억들이 많아서일까?

오랜 옛적, 내게도 친구가 한 명 있었다. 호리호리한 체구에 새하얀 피부와 마디 마디가 굵고 쭉쭉 뻗은 손, 그리고 커다란 귀를 가졌던 아이, 어렸을 적 한 동네에서 뛰놀며 자란 죽마고우로 모질게도 가난하여 오두막집에서 살았으며 가정환경이 불우하여 제대로 수학(修學)을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자고 일어나면 들로 나가야 했고 날이 어두워지면 한끼 식사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몰라 걱정했던 시절, 그런 그가 고향을 떠나 약관의 나이에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고 문단에 등단한 이후 많은 작품을 통해 한국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기고 떠났으니 아! 몹쓸 인사여! 슬픔이여! 그리움이여!
※ 1964년 25살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살아 생전 그리워 하면서도 고향에 대한 서글픔과 원망이 얼마나 컸으면 고향을 등지며 찾지 않았을까? 그의 마음에 얼마나 많은 상처와 아픔을 가져다 주었으면 그리운 친구 마저도 잊고 살았을까? 늘그막에 나이 들어 생각해보니 한없는 연민이 느껴진다.

여우는 죽을 때 구릉을 향해 머리를 두고 초심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사람도  나이가 들수록 고향을 그리워하며 옛 벗들을 못 잊어 한다. 나도 옛 친구들이 그립고 보고 싶어 지는 걸 보면 어쩔 수 없이 늙어가고 있음을 부인 할 수가 없다.

외롭고 쓸쓸한 날, 항상 수심에 잠겨 글쓰기를 좋아했던 고향의 오래된 옛 친구, 결국 외로움과 삶의 고단함을 글로써 승화시켜 극복하지 않았나 싶다. 좀 더 살았으면 하는 허무맹랑한 생각을 하면서도 이제는 영원한 안식처에서 편안히 영면하기를 기원해 본다.

그리고 좀 때 늦은 감이 있지만 뜻 있는 지인들이 한 자리에 모여 그를 추모하며 시인이 살다간 고향 언덕에 조촐한 비석이라도 하나 세워둘까 한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의 삶과 문학을 이해하고 그가 남기고 간 작품을 통하여 그가 추구하고 전하고자 했던 문학의 정신이 훼손되지 않고 올바로 계승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시인과 관련된 몇가지 에피소드와 작품속에 나타난 옛 추억들을 되살려 기억나는대로 몇 자 적어 볼려고 한다.

○ 시인의 고향

최하림 시인과 관련된 많은 서적에는 시인의 출생지가 전남 목포로 표기되어 있다. 하지만 시인의 고향은 신안군 팔금면 원산리가 맞다. 나는 최하림 시인의 친구이며 어릴 적 같은 동네에서 자랐고 같은 학교를 다니며 동문수학한 장본인이다. 나는 현재까지 고향을 지키며 원산리에 살고 있다.
그의 어릴적 이름은 최호남이며 아버지는 키가 작달막하신 분으로 일찍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제법 큰 키로 곱상하게 생긴 분이었다.

본래는 원산리 알대미(아랫 동네) 초가에서 살다가 나중에 사장뜸(마을 어귀쪽) 오두막집으로 이사갔으며 후에 목포 뒷개(현 서부초교 부근)로 이사해서 내가 목포고등학교를 다닐적에 몇 번 찾아가서 놀았던 것을 기억한다.

※ 아버지 : 최성봉, 동네 방앗간을 운영했다. ※ 어머니 : 김호단, 도초에서 시집오셨다.
※ 최호남(崔虎男) 2남 1녀중 장남, 호랑이 같은 사내아이, ※ 제(弟) : 길자, 길덕

   
▲ 왼쪽부터 김종갑, 최영수, 강세일, 주영균, 박익원, 김제희, 강봉룡, 박상철, 김충겸

○ 안좌중학교 세 친구

팔금도 원산 부락에서 친구 셋이 원둑길을 타고 나루를 건너 안좌중학교를 다녔다. 봄처녀를 부르며 호남이가 지휘하고 내게는 글을 쓰라고 해서 한 때 누가 더 작문 실력이 나은지 실랑이를 벌이며 뽐냈던 기억이 생생하다.
한번은 호남이가 참고서를 사기위해 치문이를 데리고 목포까지 가서 하룻밤을 자고 왔다고 한다. 부잣집 막내보다 없는 집 장손이 더 귀한 대접을 받았던 시절, 가난했어도 배울려는 욕심들은 특심했다.

원산에서 읍동 학교까지 20리 길, 걸어도 걸어도 멀기만 했던 원둑길, 들었다 썼다를 반복하며 끊임없이 흐르는 바닷물을 보며 걷다 지치면 누워서 뒹굴고 배가 고프면 갯벌에 들어가 먹을 것을 찾으며 소금밭에서 장난도 많이 쳤다. 지금도 옛 길을 걸으면 글쓰기를 좋아해서 늘 무엇인가를 긁적긁적하며 종이에 베끼고 다녔던 친구 생각이 난다.
※ 세 친구 : 김제희, 정치문, 최호남(하림)
 
○ 아픔과 상처를 짊어지고 고향을 떠나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자 혼자된 어머니는 가족을 데리고 알대미(아랫 동네) 본가에서 사장뜸(동네 어귀) 오두막집으로 이사를 하게 된다. 못 먹고 헐 벗으며 가난에 쪼들렸던 시절, 왜 그렇게 배는 고프고 낮은 길었던지? 어머니가 들어오셔야 밥을 먹을 수 있는데..., 삼켜서 넘길 수 있는 것은 모두가 귀한 식량이 되었다.

노환(치매)을 앓고 계신 시어머니를 모시고 외롭고 쓸쓸하게 살림을 이어가던 어머니는 6.25전쟁이 터진 후 더 이상의 생활고를 견디지 못해 결국 목포로 이사를 결심하게 된다. 이 때문에 훗날 시인은 고향을 쉬 오지 못하며 바다를 배경으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글로써 표현하지 않았나? 싶다. 초기의 작품들이 다소 어둡고 서글프며 고독한 허무가 느껴지는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 초등학교 5학년 무렵 아버지(33세)가 돌아가셨다. ※ 할머니 치매가 매우 심하셨다.
※ 어느 날 목포 뒷개(현 서부초교 부근)로 이사해서 고등학교 다닐적에 몇 번 놀러 갔던 기억이 난다.

○ 사춘기, 연애편지를 대필하다.

시인이 중학교에 다닐 무렵, 고향 교회에는 같은 또래의 예쁘장한 소녀가 한 명 있었다. 한 번은 목포에서 학교를 다니는 형이 몰래 찾아와서 조용히 연애편지를 부탁하게 된다. 호남이가 글 재주가 좋다는 것은 친구들 사이에선 다 아는 사실이었다. 평소에 호감을 갖고 있는 애에게 고백을 한다는 것이 어디 말같이 쉬운 일이던가? 아마 고민 끝에 찾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가 없듯이 그냥 해줬을 리 만무하다. 본래 거래에는 아픔이 좀 따르는 법, 비록 불발 되더라도 약속은 지켜져야 하는 것이다.
※ 시인의 6촌 형(최수용)에 의하면 이런 일이 빈번했다고 한다.

목포에서 같이 고등학교를 다닐 적에 호남이도 동네 부잣집 딸을 좋아했었다. 목여고를 다니며 대성동 목욕탕 부근에서 하숙(자취?)을 했었는데 어느 날은 나를 대동하고 찾아가서 대문을 두드리며 열심히 구애를 시작했다.
○○야! ○○야!
가는 정이 있으면 오는 정도 있어야 하는 법, 밤을 지새워 사나이의 심정을 고백했건만 단 한 줄의 답장도 없으니...,
그 사랑이 어디까지 이어졌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고향 동네가 조용했던 걸로 봐서는 오래가지는 못 한 것 같다.

○ 목포 오거리에서 인문학의 꽃을 피우다.

당시 오거리 일대에는 다방들이 밀집돼 있었다. 그 다방들을 근거지로 몰려다니니던 그는 김현과 김지하를 만났다. 그들은 처음 만나 니체의 ‘신(神)’에 대해 열띤 논쟁을 펼쳤다. 당대를 호령했던 시인과 평론가의 탄생이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60년대 초반 어느 한 때, 한국문학의 중심은 목포 오거리였다. 그곳에서 문학과 미술을 꿈꾸는 수많은 청년들이 고뇌와 열정을 모아 밤낮으로 술판을 벌였다. 안주는 인문학이었다. 수없이 지새운 토론의 밤은 마침내 한국 문학판을 바꿔놓았다. ※ 신안소식 2018 겨울 Vol. 71 19p 참조
※ 오거리 묵다방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 신춘문예 당선, 그리고 다양한 문학활동을 하다

꾸준히 창작활동을 하던 중 196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회색수기’로 입선하게 되고 4년 뒤 시인의 나이 25세(1964년) 때 ‘빈약(貧弱)한 올페의 회상(回想)’ 이란 특유의 독특한 감성으로 역시 시 부문에 당선되었다.
이후 출판사와 잡지사, 신문(언론)사를 거치며 편집국장, 논설위원을 지내고 다양한 문학활동으로 다수의 시집을 발간한데 이어 명망있고 저명한 문학상을 여러차례 수상했으며 대학에서는 창작 강의를 하는 등 한국 문학계에 커다란 공을 세우며 지난 2010년 4월 22일 향년 71세로 작고하였다.

   
▲ 고 최하림 생가 터.

최하림 시인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다.

도시의 아이들

아버지는 새벽마다 쇠스랑을 메고 들길로 나가, 메상골 열두 마지기 밭에 콩과 참깨를 심고 잡풀을 뜯고 똥거름을 주셨다. 어스름이 달리는 저녁녘이면 집으로 돌아와 풍년초를 태우고 코를 드르렁 드르렁 골며 깊이 잠으로 들어가셨다.(중간 생략) ※ 출처 : 굴참나무숲에서 아이들이 온다(문학과 지성사) 67p
※ 매상골 : 매산골 또는 진가랫재라고도 부른다. 팔금면 채일봉 아래 고향 외밭골 부근에 있는 산자락 들이다. 여기에 시인의 밭이 있었다.
※ 풍년초 : 당초, 1988년에 자취를 감춘 아주 오래된 담배(궐련)의 하나로 봉초의 옛이름 중 하나다.

○ 아침 유대

숲속에서 아이들이 온다/ 아이들은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포르릉포르릉/ 날며 이른 아침 들판으로/ 햇빛을 몰고 온다/ (중간생략)
아이들이 떼지어 온다/ 푸른 숲으로부터 온다/ 사립문 새로 속살이 희게 드러난/ 길이 열리고 어머니가 가리마 탄/ 머리를 들고 온다/ (중간생략)
미소 속으로 아버지가 쇠스랑을 메고/ 온다 이슬 젖은 잠방이 바람으로 온다/ (오오 고통스런 세상으로 오시는 아버지!)/ 노동으로 빛난 얼굴을 하고 아버지는/ 사립으로 온다 우리 가족은 모두/ 아침의 유대 속에서 아침의 빛을 뿌리며/ (중간생략) ※ 굴참나무숲에서 아이들이 온다(문학과 지성사) 90p
※ 시인의 아버지 모습은 늘 쇠스랑을 메고 일하시는 분으로 묘사되어 있다. 아마도 어렸을 적 평범한 고향의 아버지 모습이 아니었을까?
※ 시인의 작품에는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글들이 많이 보인다. 외모도 어머니를 많이 닮았었다.

○ 집으로 가는 길

많은 길을 걸어 고향집 마루에 오른다
귀에 익은 어머님 말씀은 들리지 않고
공기는 썰렁하고 뒤꼍에서는 치운 바람이 돈다
나는 마루에 벌렁 드러눕는다 이내 그런
내가 눈물겨워진다 종내는 이렇게 홀로
누울 수밖에 없다는 말 때문이
아니라 마룻바닥에 감도는 처연한 고요
때문이다 마침내 나는 고요에 이르렀구나
한 달도 나무들도 오늘 내 고요를
결코 풀어주지는 못하리라 ※ 출처 : 떠난자를 위하여 외 / 최하림
※ 고향에 들러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모습이 보인다.

○ 음악실에서

걸어갈거나, 오늘도 나는 걸어갈거나
음산한 바람은 버릇같이 나를 달래고
어는 한곳에서도 지워지지 않는,
기러기 떼처럼 하늘을 흔들며 가고
온종일 지저귀다가 보는 저녁 햇빛을 받은
떨어진 잎새의 흔적들
참 저녁 햇빛은 우리 것이다 저녁 햇빛은 우리 것이다
이렇게 피곤할 때면 나는 어머니 곁으로 가 누우리 어머니 곁에 누우면 물소리 흐르는 나무들이며 이파리들이며 그리도 조용한 삼라만상이 내 생전 처음 내곁에 와서 소곤거리고,
※ 힘들 때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썼던 글이다.

○ 마른 가지를 흔들며
가뭄이 타는 대지를 걸어 당신께서는
신작로 끝의 앙상한 나뭇가지를 흔드시고
앙상한 가지들은 일제히 마른 소리를 냈습니다.
당신께서는 앞개의 수답(水畓)에서 잃으신
수확을 그렇게 정성으로 보충하셨습니다.
겨울이 소리 없이 뒤를 따라왔습니다

이삼월의 기근이 골목을 누비고
오막살이를 심하게 흔들 때에도
흰 무명으로 누추함을 감싸시고
당신께서는 언제나 그늘이 길게 뻗친
저녁의 네거리와 그 언저리에서 떠나셨습니다
아아 그때의 어귀에서 흔들리던 일정
오랜 해수처럼 가래를 끌록이면서
바닷가에서는 이윽고 소복소복 눈이 내리고
눈먼 소년이 더듬거리며 눈을 밟고 갔습니다
어머니여 이제는 나도 눈먼 소년과 같이
어둠을 밟고 갑니다 휘어진 도시의 거리에서

그들이 넘어지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들이 패배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들이 우는 소리를 필경은 들을 것이고
그리고 도시의 앙상한 가로수를 흔들고
가로수들이 마르게 마르게 소리하는 것을 들을 것입니다.
※ 앞개의 수답(水畓) : 물대기가 좋은 논, 마을 어귀 앞 부근에 시인의 논이 있었다. 도내기(동네어귀) 샘 앞쪽이다.
※ 오막살이 : 알대미(아랫 동네) 초가에서 살다가 사장뜸(마을 어귀 쪽) 오두막집으로 이사했다.

○ 설야(雪夜)

하늬바람 불고 눈보라 치는 밤 그이는
하마 취비강을 건너갔을까 보내는 이들이
밤을 설치며 그리는 그 얼굴 그 눈동자가
가슴에 불 붙어 타오르는데
그이는 수많은 노두(爐頭)를 건너서
바람과 눈보라를 헤치고
무사히 자유에 발 디뎠을까
슬퍼라 어둔 지방의 인내를 버리고
사나이들은 사랑을 찾아 고단한 육신으로 산과 내를 건너가는데
밤 물길을 끌고 지친 화적패처럼 건너가는데
음산한 지방을 물들이면서 말을 버리고
내리는 눈 눈 눈
눈이여 오만 가지 죄의 모습과 인욕을 씻고
가는 이의 사랑을 따라나서는 길을 마련하라
구석구석이 거짓으로 가득한 밤
우리들은 거짓에서 배어 나오는 암흑을 보며
암흙속에서 승냥이처럼 울부짖는다
울부짖음이 암흑 속으로 사라져
암흑이 되어 돌아온다 암흑이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를 눈보라 속으로 몰아간다
※ 취비=>췌비(추엽) : 암태 추포도에 있는 동네 이름
※ 노두 : 암태 도창리 수곡 염전에서 추포도로 이어지는 노둣길을 말한다. 총 1km로 지금은 포장이 되어 있지만 예전에는 물이 쓸때만 건널 수 있었던 험난 한 바닷길이다.

196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 貧弱한 올페의 回想 

최하림[崔夏林, 1939.3.7 ~ 2010,4.22]
   나무들이 日前의 폭풍처럼 흔들리고 있다
   먼 들을 횡단하여 나의 精神은 不在의 손을 버리고
  쌓여진 날이 비애처럼 젖어드는 쓰디쓴 理解의 속
  계단의 광선이 거울을 통과하며 시간을 부르며
  바다의 脚線 아래로 빠져나가는
  오늘도 외로운 發端인 우리

  아아 무슨 根據로 물결을 출렁이며 아주 끝나거나 싸늘한
  바다로 나아가고자 했을까 나아가고자 했을까
  機械가 의식의 잠속을 우는 허다한 허다한 港口여
  수없이 작별하고 수없이 만나는 선박(船舶)들이여

  이 雲霧 속, 찢겨진 屍身들이 걸린 침묵 아래서 나뭇잎처럼
  토해 놓은 우리들은 오랜 붕괴의 부두를 내려가고
  저 시간들, 배신들, 나무와 같이 심은 별
  우리들의 소유인 이와 같은 것들이 肉體의 격렬한 通路를 지나서
  不明의 아래아래로 퍼져버리고
 
  나의 가을을 잠재우라 흔적의 湖水여
  지금은 물속의 시간, 가라앉은 고향의
  말라들어가는 응시에서 핀
  보라빛 꽃을 본다

  나무가 장난처럼 커 오르고
  푸르디푸른 벽에 감금한 꽃잎은 져 내려
  분홍빛 몸을 감싸고
  직모물의 무늬같이 不動으로 흐르는
 기나긴 鐵柱를 빠져나와 모두 떠오른다

  旅人宿에서처럼 낯설게 임종한, 그 다음에 물이 흐르는 肉體여
  아득히 다가와 주고 받으며 멀어져가는 비극의 저녁은
  서산에 희고 긴 비단을 입고 오고 있다
  아주 장대하고 단순한 바다 위에서
  아아 유리디체여!
  (유리디체여 달빛이 흐르는 철판 위
  人間의 땀이 어룽져 있는 건물 밖에는
  달이 떠 있고 달빛이 기어들어와
  파도소리를 내는 철판 위
  빛낡은 감탄사를 손에 들고 어두운
  얼굴의 목이 달을 보면서 서 있다)
 
  푸르디푸른 絃을 律法의 칼날 위에 세우라
  소리들이 떨어지면서 매혹하는 음절로 칠지라도
  너는 멀리 故鄕을 떠나서 긴 팔굽만을 슬퍼하라

  들어가라 들어가라 계량하지 못하는 조직 속
  밑푸른 심연 끝에 사건이 매달리고
  붉은 황혼이 다가오면 우리들의 結句도 내려지리라
  아무런 이유도 놓여 있지 않은 空虛 속으로
  어느 날 아이들이 쌓아올린 언어
  휘엉휘엉한 철교에서는 달빛이 상처를 만들며 쏟아지고
  때없이 달빛이 걸린 거기
  나는 내 正體의 知慧를 흔든다.
  들어가라 들어가라 下體를 나부끼며
  아이들이 무심히 선 바닷속으로
 
  막막한 江岸을 흘러와 死兒의 場所 몇 겹의 죽음
  장마철마다 떠내려온, 노래를 잃어버린 신들의 항구를 지나서.
  유리를 통과한 투명한 漂流物 앞에서 交尾期의 魚類들이 듣는 파도소리
  익사한 아이들의 꿈
  기계가 창으로 모든 노래를 유괴해간 지금은 무엇이 남아 눈을 뜰까
  ……下體를 나부끼며 海岸의 아이들이 무심히 선 바다 속에서.
※ 올페 : 프랑스어 (오르페우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음유시인, 리라(하프)의 명수
※ 유리디체 : (에우리디케) 오르페우스의 아내
※ 기계문명에 의해 좌절되어버린 유년의 꿈(현대인의 희망)을 오르페우스의 신화를 통해 그리고 있다. 육체의 속박에서 벗어나 영혼의 불사와 영원의 행복을 얻는다는 교리이다.


최하림 시인의 프로필과 작품세계

 

본명 최호남(崔虎男), 필명 최하림(崔夏林)
(1939년 3월 7일 ~ 2010년 4월 22일) 
출생지 : 전라남도 신안군 팔금면 원산리


○ 저서(작품)
우리들을 위하여, 작은 마을에서, 겨울 깊은 물소리, 속이 보이는 심연으로, 굴참나무숲에서 아이들이 온다, 풍경 뒤의 풍경, 때로는 네가 보이지 않는다, 최하림 시전집 
○ 대표관직(경력)
한국일보 기자, 열음사 주간,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교수, 전남일보 논설위원 
○ 생애 및 활동사항
1939년 3월 7일 전라남도 신안군 안좌면(현 팔금면) 원산리에서 출생하였다. 1954년 목포고등학교에 입학하였고, 1958년 목포문화협회 업무를 담당하였다. 196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회색수기(灰色手記)」가 입선되었고 김현과 처음으로 만났다. 동국대학교 국문과를 중퇴하였다. 1962년 동인지 『산문시대』를 발간하였고 196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빈약(貧弱)한 올페의 회상(回想)」이 당선되었다. ※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1965년 시사영어사 편집부, 삼성출판사에 근무하였다. 1969년 『한국일보』 주간국 기자로 근무하고 1970년 월간 『세대』 편집부에 근무하였다. 1972년 『현대문학』에 시론 「60년대 시인의식」을 발표하고 원광대학교 국문과 2년을 중퇴하였다. 1973년 미술평론 「유종열의 한국 미술관」을 발표하고 1974년 미술산문집 『한국인의 멋』(지식산업사)를 발간하였다. 1976년 첫 시집 『우리들을 위하여』를 창작과비평사에서 발간하였다.

1981년 김수영 평전 『자유인의 초상』(문학세계사), 13인 시집 『우리들의 그리움은』(창작과비평사)을 발간하였다. 1982년 제2시집 『작은 마을에서』(문학과지성사), 1984년 시론집 『시와 부정의 정신』(문학과지성사)을 발간하고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서 시 창작 강의를 시작하였다. 1985년 판화 시선집 『겨울꽃』(열음사), 1986년 제3시집 『겨울 깊은 물소리』(열음사)를 발간하였다. 1988년 『전남일보』 편집국장을 역임하면서 광주에서 생활하기 시작하였다. 자선시집 『침묵의 빛』(문학사상사)과 산문집 『붓꽃으로 그린 시』(문학사상사)를 발간하였다.
1990년 시선집 『사랑의 변주곡』(문학세계사)을 발간하였고, 1991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두 달 만에 퇴원하였다. 제4시집 『속이 보이는 심연으로』(문학과지성사)를 발간하고 이 시집으로 제10회 조연현문학상을 수상하였다. 1992년 산문집 『우리가 죽고 죽은 다음 누가 우리를 위로해 줄 것인가』(문학과지성사)를 발간하였고, 『전남일보』 논설위원을 지냈다. 1998년 제5시집 『굴참나무 숲에서 아이들이 온다』(문학과지성사)를 발간하고 이 시집으로 제11회 이산문학상을 수상하였다. 1999년 산문집 『시인을 찾아서: 최하림의 문학 산책』(프레스 21)을 발간하였고, 2000년 제5회 현대불교문학상을 수상하였다.
2001년 제6시집 『풍경 뒤의 풍경』(문학과지성사), 개정판 『김수영 평전』을 발간하였다. 2002년 산문집 『멀리 보이는 마을』(작가), 2005년 제7시집 『때로는 네가 보이지 않는다』(랜덤하우스)를 발간하였고, 제2회 올해의 예술상 문학 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하였다. 2006년 시선집 『햇볕 사이로 한 의자가』(생각의나무), 2010년 산문집 『러시아 예술 기행』(랜덤하우스), 『최하림 시전집』(문학과지성사)을 발간하였다. 2010년 4월 22일 작고하였다.

최하림의 습작기 시는 관념적이고 상징적인 양상을 띠지만 첫 번째 시집 『우리들을 위하여』와 두 번째 시집 『작은 마을에서』에서는 암울한 시대 상황에 대한 인식과 현실비판적인 성격을 드러내고 있다. ‘우리’라는 공동체의 삶과 유리되어 있지는 않지만, 강렬한 현실 비판이나 고발보다는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하고 반성하는 내면적인 성격이 강하다. 세 번째 시집 『겨울 깊은 물소리』 이후, 현실비판에서 한걸음 물러나서 더욱 내면화되고 자연을 소재로 하며 관조와 긍정의 세계를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최하림의 시가 달관과 해탈로 귀결되지 않는 것은 초기 시부터 일관되게 유지되는 순결한 반성의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encykorea.aks.ac.kr/

맺음말
가난했던 시절 일제 강점기, 바닷가 섬마을에 태어났던 우리들은 초등학교에 입학하며 8.15해방을 맞았다. 그리고 중학교에 다닐 무렵 또다시 6.25전쟁을 겪으며 평생 가난의 굴레를 씌우게 된다.
시인은 혹독한 가난과 싸우며 공부하고 싶어도 등록금 낼 돈이 없어 수업을 못 듣게 되자 부둣가를 해매며 문학의 꿈을 키웠다고 했다. 신문배달을 하며 고학으로 학업을 이어가던 친구는 젊은 시절 목포 오거리에서 김현, 김지하 등과 만나며 문학에 심취하게 되고 1962년 전주에서 동인지 ‘산문시대’를 발간하며 본격적으로 활동 하게 된다. 당시 ‘산문시대’ 4인방은 전국에서 알아 줄 만큼 그 유명세가 대단했다고 한다. ※ 산문시대 4인방 : 최하림, 김현, 김승옥, 김치수

196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빈약한 올페의 회상’이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 한 이후 1970년대를 대표한 시인으로 자리매김하며 70-80년대 냉혹한 현실을 때로는 직접적으로 응시하고, 때로는 한발 물러서 관조하며 완성도 있는 시 세계를 구축했다고 전해진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드러난 정치적 폭력과 인간성 상실을 죄의식으로 형상화하기도 했으며 자연의 생명력을 경탄하거나 죽음의 이미지를 탐구하기도 한 시인은 순수와 참여의 어느 한 쪽에도 치우치지 않은 채 열린 시선으로 사물과 세계를 관조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91년 제10회 조연현문학상, 1998년 제11회 이산문학상, 2000년 제5회 현대불교 문학상, 2005년 제2회 올해의 예술상 문학 부문 최우상을 수상하며 한국문학계에 커다란 업적을 남기고 지난 2010년 4월 22일 간암으로 투병하던 중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났다. 

어렵고 배고픈 시절에 태어나 평생 가난하게 살면서도 글쓰기를 고집했던 시인, 고향을 그리워 하면서도 아픔과 상처가 너무 많았기에 시를 쓰며 극복할려 했을까? 시인은 투병 중에도 마지막까지 자연을 벗 삼아 노래하며 끝내 우리곁을 떠나고 말았다.
“조금 더 살았으면....,” 하는 허황된 생각을 버리지 못하며 오래 전 옛 친구들과 뛰 놀았던 고향 언덕에 조그맣고 소박한 시비라도 세워서 그를 추모해 볼려고 한다. 부디 떠나간 세상에서는 아무런 근심 없이 평안한 마음으로 영면하기를 간절히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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