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스러운 과거에서 미래를 일군 故 김홍일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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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스러운 과거에서 미래를 일군 故 김홍일 의원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19.05.01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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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을 하루 앞둔 날, 김홍일 전 국회의원의 부음을 접했다. 고인에 대한 여러 감정이 교차하면서 함께했던 10여 년의 정치역정이 파노라마처럼 떠올랐다.
고인에 대한, 혹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아들들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이 지역사회에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고인에 대한 이야기 중 하나는 ‘몸도 성치 않으면서 왜 정치를 하려 하느냐’였다. 시민들에게는 정치에 대한 과욕처럼 비추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건강 악화는 가혹한 고문으로 인한 것이었다. 고 김홍일의원은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등 군부독재의 조작사건으로 가혹한 고문을 당했고, 그 후유증으로 평생을 고생해야 했다. 이후 파킨슨병으로 10여년을 와병상태로 있었고 차츰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갔다. 그리고 접한 그의 부음은 안타까움과 충격이었다.

한때 그는 김대중 대통령의 아들, 힘 있는 국회의원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신군부의 탄압과 고문을 이겨낸 민주투사였고, 전교조 합법화 등 복지와 인권에 남다른 신념을 가졌던 정 많은 정치인이기도 했다. 5.18묘역 안장식에 참석하기 위해 가는 길에 본 애도 현수막 하나가 깊은 인상을 주었다. “김대중 대통령 민주화의 동지, 김홍일의원의 영면을 빕니다”라는 문구였다. 그렇다. 그는 민주화의 동지였다.

고인은 민주화운동 보상금으로 유영장학회를 설립했다. 당시 그와 뜻을 함께 하려는 지역사회의 손길 7억여 원이 모였다. 유영장학회는 인권과 복지를 위해 고생한 인사의 자녀들, 그리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미래에 대한 희망을 키우는 지역 인재들에게 지금까지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고통스러운 과거를 발판으로 지역의 청소년들에게 새로운 미래를 열어주려 했던 그의 마음 앞에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고인과의 인연은 지난 199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인은 당시 민주당 목포 원외위원장이었고, 필자는 전교조 해직교사 신분으로 전교조에서 상근을 해오고 있었다. 그때 전교조는 합법화 투쟁이 주요한 과제였고, 고진형 전남지부장을 전남도교육위원회에 진출시키려고 했다. 전교조의 정치적 지평을 확대하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노력하던 중 고인을 처음 만났다.

이런 인연이 이어지면서 고진형 지부장은 전남교육위원으로 진출하여 이후 교육위원회 의장을 역임하기도 했고, 필자는 1995년 목포시의원이 되면서 지방자치에 첫 발을 내딛었다. 1996년 고인은 목포에서 국회의원이 되었고, 1997에는 김대중 대통령 당선과 함께 목포발전의 일대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후 전교조는 합법화되었다.

김대중 대통령의 당선은 그동안 소외되고 침체되었던 목포와 서남권 발전에 절대절명의 계기가 되었다. 김홍일의원의 헌신적인 노력과 목포사랑이 더해지면서 새로운 전환점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김홍일의원을 돕기 위해 여러 사람이 모여 정책자문단을 구성했다. 고인이 되신 전태홍 전 목포시장님을 비롯해, 최태옥 목포시의료원장, 고석규 전 목포대총장, 고진형 전 전남교육위원회 의장, 김형모 전 목포대 교수, 김형근 해양대 교수, 정기영 대불대 교수 등이 함께했다.

김홍일 의원이 의정활동을 펼치며 이루었던 당시의 성과들은 목포발전의 일대 전환점이었음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 어떤 정치인보다도 헌신적인 노력과 성과를 이루어 냈다.

호남선 복선화와 KTX 개통, 서해안 고속도로 개통, 무안국제공항 착공, 목포 신외항 착공 등 하늘 길, 바다 길, 육지 길을 열었으며 목포 백년로 등 4통 8달 도로를 개설했다. 그리고 탐진댐을 막아 목포시민의 오랜 숙원인 상수도 수량과 수질문제를 해결했으며, 시민문화체육센터, 자연사박물관 등 획기적으로 문화시설이 확충되었다. 목포 미항 가꾸기 사업 기반이 조성되고 제일여고 이전 등 교육시설도 개선되었다. 또한 IMF 때 부도난 한라중공업이 삼호중공업으로 조기 회생하고 어려움을 겪게 된 대불산단 협력업체 지원에도 모든 노력을 다했기 때문에 피해가 최소화됐다. 그리고 대중국 사업에도 최선을 다해 당시 목포 역사상 가장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도청이 이전이 확정 발표 되던날의 감동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잔혹한 고문과 고통. 그는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기에 고통스러운 과거를 겪었지만 미래에 대한 과감한 투자를 할 수 있었다. 오늘 그를 위대한 정치인으로 기억하면서 새로운 목포의 희망을 그려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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