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승리! 청산리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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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승리! 청산리대첩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12.10.23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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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보훈지청 복지팀장 박래선
▲목포보훈지청 복지팀장 박래선

농부들의 땀방울이 결실을 맺는 수확의 계절이지만 올해는 태풍 때문에 그리 밝지만은 않아 마음이 무겁기만 하다. 빼앗긴 들에서 맞이하는 가을은 수확을 해도 풍요롭지 않은, 무겁고 차가운 겨울이었을 것이다. 92년 전 가을, 세계사에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혹독하고 무자비한 일본제국주의의 침략 아래에서 우리 민족은 계절과 상관없이 시련과 추위 가득한 겨울을 보내야 했다. 그 겨울을 뚫고 한줄기 햇살처럼 들려온 대한민국의 승리 소식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청산리대첩이다. 

청산리대첩(靑山里大捷)은 김좌진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군, 홍범도가 지휘하는 대한독립군 등 주축으로 활약한 독립군이 청산리 백운평(白雲坪)·천수평(泉水坪)·완루구(完樓溝) 등지의 10여 차례에 일본 제국과 전투를 벌인 총칭이다.

1920년 10월 일본군 동지대(東支隊) 부대는 화룡현(和龍縣) 삼도구(三道溝)에 있는 북로군정서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용정(龍井)·대굴구(大屈溝)·국자가(局子街)·두도구(頭道溝) 지역으로 진군해왔다. 독립군은 처음에는 화력과 병력의 열세를 고려하여 피전책(避戰策)을 택했다. 그러나 일본군이 토벌과정에서 한국인 촌락을 불사르고 동포들을 학살하는 것을 보고 일본군과 대항해 싸우기로 결정하고 청산리 골짜기에서 매복하고 일본군을 기다린다.

1920년 10월 21일 오전 9시에 독립군의 기습공격이 시작되고 독립군의 정확한 위치도 파악하지 못한 일본군은 전위부대 200명이 전멸당하는 등 1,200~1,300명의 전사자만 더 내고 숙영지로 패주한다. 

청산리대첩의 승리는 독립군 병사들의 영웅적 분전, 지형을 적절히 이용한 지휘관들의 우수한 유격작전, 간도지역 조선인들의 헌신적인 지지와 성원이 함께 어우러져 이룩된 한민족의 승리, 대한민국의 승리였다.
 

한민족의 혼을 끊으려 극악한 억압과 폭거를 휘둘렀던 일본제국주의 시대를 뚫고 우리는 지금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 왔다. 이 모든 발전이 가능했던 이유는 우리가 어려운 상황을 현명하고 지혜롭게 이겨내고 청산리대첩의 승리를 이끌어낸 독립유공자들의 후손이었기 때문이다.

청산리대첩을 맞아 사랑하는 우리 아들, 딸들에게 그 지혜를, 나라사랑의 마음을, 한민족의 혼을 심어 주었을 때, 우리 민족의 내일은 시련과 추위의 역사가 아닌 행복과 번영의 역사가 펼쳐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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