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요작가 이성관의 두근두근 옛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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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요작가 이성관의 두근두근 옛이야기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12.11.05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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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롱 대롱 까치감, 미물향한 옛 조상들의 마음
▲ 이성관 작가

까 치 밥     

누가 누가 달았나/ 가을 들길에
산골 마을 환하게/ 빨강 초롱불

오가는 철새들/ 길을 잃을까
한겨울의 멧새들/ 배가 고플까

대롱대롱 가지 끝/ 비인 하늘에
어둠을 밝혀 주는/ 겨울 까치밥
              ― ‘까치밥’ 전문―

겨울이 외롭지 않는 건 시골길 오가는 산길이나 들길에 까치감이 열려있기 때문이 아닐까. 지금이야 농·어촌의 일손 부족으로 아예 내버려진 감들이 많아 새들에게 제법 풍성한 겨울양식을 제공하고 있지만 예전, 감나무가 지금보다 훨씬 더 귀한 대접을 받던 시절. 온 식구가 장대며 망태기를 동원하여 감을 딸 때, 어른들의 말씀 따라 새들의 겨울 양식을 위하여 감나무 가지마다 너댓개씩 남겨둔 감들로 하여, 한겨울의 날씨마저도 따듯하게만 느껴졌던 건 나만의 상상일까.
늦가을에서 겨울에 이르는 길.

우리는 우리 산하 어디를 가든지 비어가는 계절을 환히 밝히며 들길이나 산길 또는 마을 골목길. 감나무 가지마다 대롱대롱 열려있는 까치감 들은 스산한 날씨와 한데 어울려 떠나가는 계절의 정감을 물씬 불러일으키는 한 폭의 풍경화가 되고도 남았다.
그래서일까, 어느 외국 관광객들이 늦가을에서 겨울로 이어지는 남녘 시골 들길이며 산길을, 발갛게 밝혀주는 까치밥의 정경을 바라보며,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렇다. 까치밥을 보고 있노라면 어릴 적 고향친구라도 만난 것처럼 마음이 넉넉해지며, 겨울의 차가운 날씨마저도 저 까치밥으로 하여 가슴이 한결 훈훈해지는 느낌을 저절로 받게 된다.
어찌 가슴뿐이랴. 나뭇잎마저 모두 떨어진 앙상한 나뭇가지. 그래서 자칫 황량할 수도 있는 늦가을에서 겨울로 이어지는 정경情景이, 저 주황빛 까치밥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포근하고 정겨운 모습에 자신도 몰래 가슴이 풍성해지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생각하면 우리 조상들의 자연사랑 생명존중 정신은 어디 까치밥 뿐이랴. 농부들은 콩을 심을 때도 싹이야 한 개면 그만이기에 새와 벌레들을 위하여 반드시 서너 개씩을 심는다고 한다.
여기에 가을 추수를 할 때도 떨어진 이삭은 온통 줍지 않고 일부는 여유롭게 남겨두는가 하면, ‘고수레’라 하여 들이나 산에서 음식을 들 때, 명절이나 제사 등 잔치가 있을 때에도 지붕이며 장독대, 담장 위나 대문 밖 등에 나물이며 고기반찬 음식을 골고루 차려두는 풍속은 지금도 깊은 시골에 가면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아름다운 풍습이다. 이 또한 넓은 의미로 까치밥이라 일러도 좋을 듯 하며, 이는 물론 모두가 함께 더불어 사는 공존, 공생의 자연사랑 정신이 아니겠는가.

까치밥(까치감)은 다 아는 바와 같이 우리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미풍양속으로 한겨울의 까치를 비롯한 날짐승들이 한겨울에 배가 고플까봐 감따기를 할 때 가지마다 조금씩 남겨두고 수확하는 감을 까치밥이라 부르고 있다.
어디 까치뿐이겠는가.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는 바람에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쏟아내릴 듯 단물이 배일대로 배인 단맛을 다른 새들이 어찌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까치를 비롯하여 직박구리 어치 곤줄박이며 촉새 등 모든 날짐승들의 겨우살이를 위한 배려로 알고 있지만 왜 굳이 까치밥이라고 이르게 되었을까.

이는 아마 까치를 길조의 대표적인 새로 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아왔던 새이기에 뭇 새들을 대표하여 까치밥이라고 명명(命名)하지 않았을까.

그런가 하면 민속적으로는 칠월 칠석 견우와 직녀가 만날 수 있도록 사랑의 오작교(烏鵲橋)를 놓아주었다는 설화 하며, ‘은혜 갚은 까치’ 등의 전설 등으로도 사람들의 호감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까치. 
그런데 안타깝게도 언젠가부터 까치들에게 곱지않은 시선이 쏠리고 있다.  예로부터 길조로만 알고 사람들의 사랑을 잔뜩 받아온 까치들이 이천 년대 가까이서부터 수확기에 접어든 과일농사를 해치고, 전봇대 등에도 집을 지어 정전사고를 일으킨다며, 지금까지의 길조(益鳥) 아닌 해조(害鳥)로 인식이 바뀌어져 과수농가 등으로부터 까치퇴치 운동까지 벌이고 있는 수난을 당하고 있다.

알고보니 이유가 있단다. 그것은 바로 우리 인간이 저지른 자연파괴에서 오는 현상으로, 문명의 발달로 사람들의 생활이 급속도로 산업화 되면서, 4대강은 물론이요, 농로까지도 온통 아스팔트로 도벽이 되고, 과도한 농약 살포로 새들의 먹이사슬인 벌레가 없어지는 바람에 자신들의 생명유지를 위한 어쩔 수 없는 호구지책 때문이란다.

생각하면 어찌 벌레들뿐이겠는가. 이제는 깊은 시골에서까지도 그 흔한 개구리 소리마저 차츰 잦아들어가고 있으며, 양봉업자들이 꿀벌의 개체수가 날로 줄어들어 앞으로 살아갈 걱정이 말이 아니란다. 아, 개구리가 없어지면, 꿀벌들이 지상에서 사라진다면 우리 인간들의 삶은 과연 어떻게 될까.   생각할수록 금방 큰일이라도 일어날 것 같은,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끼칠듯한 끔찍스러운 모습들이 모습이 떠오르지 않는가.

남이나 이웃에 대한 배려 없이. 아니, 미물이야 한겨울을 어떻게 지내건, 나 배부르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봄이 채 오기도 전, 동면에서 채 깨어나지도 않은 개구리를 돌멩이를 들춰가며, 어디 어디에 좋다고 하니까 마구 잡아간다거나, 늦가을 다람쥐며 오소리, 고라니며 토끼 노루 사슴들의 먹이가 될 도토리며 상수리 등을 마구 주워가는 무절제한 행위들은 우리 인간들뿐이 아니라 먹이사슬을 위한 자연 모두의 건강한 삶을 위해서라도 뼈아프게 반성해 봐야 하지 않을까.

이제 임진년 이 해도 십일월에 접어들어 얼마 지나지 않으면, 어느덧 연말 분위기로 저마다 반성과 아쉬움에 더하여 때로는 숙연한 감정과 함께 새해에 대한 소망에 가슴이 일렁일 터. 우리 모두 미물까지도 배려하는, 아름다운 나눔의 문화, 공생의 정신이 둔화되는 일이 없기를 바라며, 어두워 오는 겨울의 들녘을 환히 밝히는 초롱이 되어, 오가는 철새들의 등대가 되어 주는가 하면, 자선의 천사가 되어 날짐승들의 허기를 달래주기 위하여 비와 눈 찬바람을 맞아가면서도 노을빛 환한 미소로 미물들을 기다리고 있는 저 황홀하도록 아름답고 넉넉한  골목길 산길이며 들녘 가득히 대롱대롱 열려있는 까치감처럼….

가을 가는 들길에 까치감이 열렸다/ 높이높이 열렸다/ 온 마을이 환하게
포르르 멧새가 와서 한겨울을 나겠다
겨울 오는 산길에 초롱불을 밝혔다/ 대롱대롱 걸렸다/ 산골마을 환하게
훠월훨 오가는 철새 등댓불이 되겠다.
                                                 ― ‘까치감’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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