雲霧山水로 이어지는 雲林山房 4代畵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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雲霧山水로 이어지는 雲林山房 4代畵脈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12.11.27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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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사는 것도 급급한데 악몽(惡夢)까지

1965년 초가을에 제대하였다. 당시는 아직도 정리되지 않은 한국전쟁의 잔재가 남아있을 정도로 경제적으로 아주 열악한 시기였다. 집집마다 7~8명이 넘는 대가족으로 입을 줄이는 것이 곧 돈을 버는 것이었고, 학벌이나 특별한 기술이 없는 사람은 월급의 개념도 없이 고작 세끼 밥 먹여주고 기술만 가르쳐 줘도 고마워서 몸 둘 바를 모르는 시대였다.
삼천리 방방곡곡에 기찻길이 널려있는 것도 아닌데 웬 식구들은 그리들 많았는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것이 인생이라 하였든가! 대학시절에 교직과(敎職科) 이수를 했어야 했는데 자격증이 있으면 선생질이나 하게 된다는 당시의 안이하고도 건방진 생각이 오늘의 후회로 이어질지는 몰랐다.
나 역시 사는 것도 급급한 판에 그림과 씨름하고 있을 한가로운 입장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괴로웠던 것은 군(軍)생활로 망쳐버린 그림 때문이었는지, 밤만 되면 그 악몽에 시달려 잠을 설치는 게 다반사였다. 제대자(除隊者) 명단에서 누락, 복무기간의 연장, 장기근무 신청, 심지어는 군기 문란 죄로 영창까지 가는 황당한 사건들이 밤마다 현실처럼 변화무쌍하게 난무했다. 대게는 격렬하게 반항하다 신나게 얻어터지면서 벌떡 일어나고 “웬 소리를 그렇게 지르냐?"며 흔들어 깨워서 일어나고,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이렇게 고통스런 잠자리가 거의 십여 년 동안 계속 되었으니, 그때의 상심이 얼마나 컸다는 것을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백부님 슬하(膝下)에 들어가 대학을 졸업하고 군복무까지 마쳤으니 이제는 자립해야하는 수순(手順)이다. 다행히 1966년 신학기에 동대문 축구장과 붙어있는 한양중공업고등학교에 교사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수묵산수를 하는 사람이 교편을 잡는다는 것은 그저 살아가는 방법을 찾은 것이지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길로 들어선 것은 아니었다.
 
그때의 일과는 새벽 여섯시에 서둘러 나서서 야간고등학교까지 마치고나면 밤 열한시가 되어야 귀가하였는데, 이렇게 주 6일을 버티고 나면 주말에는 녹초가 되어버린다. 방학이라는 것이 있었지만 그 기간은 그림에 어떤 영향과 변화를 줄 수 있는 넉넉한 시간이 아니기 때문에, 그림은 열중쉬어 상태로 거의 진전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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