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죽동 우체사 거리 85세 고권명 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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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죽동 우체사 거리 85세 고권명 옹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19.06.12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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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과 귀에 담고 몸에 담아 추억 책장을 넘긴다


통신사 근무 인연 옛 말방 우체사 자리 분할 받아 거주
죽동육거리 73년째 거주 목원동 원도심 흥망성쇠 목격
자전거 패달 밟으며 건강 유지 옛 친구만나 담소 나눠
고권명 선생 부부(오른쪽이 고권명 선생)
고권명 선생 부부(오른쪽이 고권명 선생)

 

 

[목포시민신문=김경완시민기자]「어떤 낯선 ‘공간’이라도 오랫동안 점유한다면, 그 공간은 ‘장소’가 된다. ‘공간’은 낯설고 익숙하지 않지만, 그곳에 한 사람의 경험과 기억이 고스란히 녹아든다면 이젠 익숙한 ‘장소’가 된다.」 <이푸 투안>

목포의 원도심이란 뜻으로 새로 만들어진 목원동. 그 중에서도 죽동은 대나무가 많은 언덕이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차 없는 거리의 그 많던 사람들이 사라지고 이제는 빈 점포가 여러 곳 눈에 띌 정도로 쇠락하고 있다. 3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목포극장 하면 가장 번화한 곳이 아니던가. 그곳에서 ‘죽동 육거리’는 불과 50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다.

죽동 육거리에서 무안우체사가 있던 노라노 미술관으로 올라가는 좁은 길에는 게스트하우스가 3곳이 운영 중이다. 그 만큼 많은 방문객들이 이곳을 찾는다는 뜻이리라. 들어가면 다시 돌아 나올 수밖에 없는 막힌 골목 안에 이렇게 넓은 길이 있다는 것이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럴 이유가 있었다. 이 동네의 터줏대감, 고권명(85)은 ‘무안우체사가 있었기 때문에 폭 6미터의 도로가 있었다’고 소개해 주었다.

“여기 관사가 세 채 있었는데, 전화과장 관사, 저축과장 관사, 저 너머가 전신과장 관사였어. 여기가 이조(李朝) 말엽에 우정사였어. 우체국이라고 봐야지. 사무실이었어. 여기에서 유달산우체국 자리로 당시 우체국이 간 거지. 나 막 이사 왔을 때는 집이 한 채도 없었어. 가정집이 없었다니까. 잔디밭 같이 생겼었어. 말방이여. 말을 키웠다는 거야. 그래서 말방이라고…. 마루방이라고도 하고…. 봉화불을 마인계 잔등에서 피면, 양을촌이 지금도 있어. 거기서 받았어. 여기서 봉화불을 피웠다고 그래…. 여가 좀 높아요. 저기 비녀산 다 보이제….”(고권명 인터뷰)

고권명은 1935년 용해동(당시에는 무안군 이로면 용당리)에서 태어났다. 해방이 되던 1945년 12살의 나이에 죽동으로 이사 왔다. 아버지가 일제강점기 우체국에 근무하다가 해방 직후 전신전화과장 보직을 받아 관사가 있는 현재 거주지로 이사 온 것이었다. 그리고 체신부의 불하로 관사를 구입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무려 한 장소에서 73년간 살고 있으니 죽동의 산역사인 셈이다.

실제 이곳은 조선시대 말 통신용 말을 키우고 관리하던 ‘말방’자리다. 당시에
는 역참을 통해 말을 이용해 정보와 문서를 주고받았기에 너른 공간에 말의 먹이까지 확보된 공간이 필요했다. 그곳이 자연스럽게 우체사로 발전했고, 전보와 통신으로 확대된 셈이다.

최성환 목포대 교수의 『목원동 이야기』에 의하면 “조선인들이 목포에 세운 최초의 우체국은 1897년 12월 25일 ‘무안우체사’라는 이름으로 이곳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개항 이후 목포우편국으로 통합되기 전까지 전보 업무를 할 수 있는 곳은 이곳이 유일해 개항장에 살던 일본인들도 이곳까지 와야만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지금은 전화를 넘어, 핸드폰과 SNS로 서로 소통하는 시대, 그 시작이 이곳 죽동 마방골에서 시작됐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고권명은 산정초등학교와 공업학교 건축과를 졸업했다. 1950년대 중반에는 유행처럼 고향을 떠나 서울경험을 하고 싶었다. 대학도 다니고, 사진기술을 배운 것은 평생의 좋은 취미가 되었다.

젊은 시절 사업은 쉽지 않아 실패한 후 20대 후반 고향에 내려와 무선국(현재
의 KT전화국)에 취업했다. 아버지의 대를 잇게 된 것인데, 공교롭게도 둘째 딸도 현재 KT에 근무하고 있어 3대가 근무하는 인연이 됐다. 고권명은 29살에 노총각의 딱지를 떼고 22살 함평 학다리 처녀와 중매로 결혼했다. 슬하에 자녀는 1남 4녀를 뒀다. 모두 사회에서 제 역할을 듬직하게 맡아 하는 것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럽고 행복하다.

진도 우체국장 시절. 시대상을 반영하듯 뒤에 보이는 전두환 모습이 눈길을 끈다.

30여년간 전화국에 근무하면서 신안 섬에 여러 곳의 전화국 분서를 짓던 일들이 가장 기억에 남았다. 건축을 공부한데다 손재주가 좋아 그 업무를 직접 맡아서 진행했다. 그때 많이 도와준 이가 공업학교 3년 후배인 故 오용갑(전 목포문화원장)이었다. 후임 원장을 맡은 김석철도 산정초등학교 동창으로 지금까지 자주 만나고 있다.

진도전화국장으로 3년여 근무할 때는 목포에서 쉬미항까지 배로 다녔다. 그리고 얼마 후 진도대교가 개통(1984년 10월 18일)되었는데,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참석하고 지역기관장으로 축사를 했던 기억이 새롭다고 했다.

고권명은 지금도 자전거 타기를 생활화하는데, 불과 몇 년 전까지도 목포시자전거연합에서 활동하며 실버그룹을 이끌기도 했다. 지금은 힘이 들어 어쩔 수 없이 전기의 힘을 조금 받고 있다. 그래도 패달을 돌리면서 동력을 얻기 때문에 운동도 되고 새로운 활력을 느낄 수 있어 좋다고 했다.

지역의 어른으로서 현재 진행되는 도시재생사업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 궁금했다.

“남교동 시장 있잖아. 거기서 100미터 까지는 왼쪽으로만 헐어. 정명여고 가는 쪽 오거리까지 헐어야 되는데…. 못했잖아. 그 도로가 터져야 돼. 그러면 어떤 발전이 있을랑가 몰라. 그라고 젊은 사람들이 게스트하우스도 운영하고, 거리에 화분도 놓고 뭔가 활력 있게 준비하는 것을 보면 희망이 생기기도 해. 그라고 동네에서 만인살롱 이런데서 축제도 많이 해. 그란디 잘 안되는 것 같드라고…. 나라도 뭔가 도움이 된다면 역할을 하고 싶고….”(고권명 인터뷰)

고권명은 죽동경로당에서 3년간 회장을 맡아 봉사하기도 했다. 원래 죽동 동사무소였던 곳이 경로당으로 사용되는데, 목포에서 가장 큰 동사무소였다고 한다. 마을 어른들도 동네 사람들에게 옛날이야기를 전해주거나, 목포의 과거와 개인적인 경험들을 들려주는 기회가 된다면 맡아서 해보고 싶다고 했다.

현재 목포에도 마을기업이 새롭게 만들어지고 협동조합이 추진되는데, 기본적으로 한정된 아이템의 사업만 진행되거나 지역특산품 판매 정도밖에 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는 평가가 있다. 그래서 제안을 한다면 주위에 경험과 토착지식이 많은 어르신들을 정기적으로 만나고, 친근한 관계를 형성한 후 자연스럽게 옛 경험과 전통지식과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고, 그것을 동네이야기로 출판하는 마을기업도 생겼으면 좋겠다.

어른 한분이 돌아가신다는 것은 마치 박물관 하나가 사라지는 것과 같은 손실을 본다는 아프리카의 격언도 있지 않은가.
김경완 시민기자(목포대도서문화연구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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