雲霧山水로 이어지는 雲林山房 4代畵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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雲霧山水로 이어지는 雲林山房 4代畵脈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12.12.17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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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목구멍이 포도청(捕盜廳)이라고

 
세탁소를 들어먹고 때마침 정유회사에 다니고 있는 처남의 권유로 석유장사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사업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고객들이 원하는 장소까지 석유를 배달해야 하는 단점(短點)이 있어 생각보다 고달프고 힘든 사업(?)이었다. 한말(20리터)이라는 것이 군대 스피아 깡에 가득 채운 것으로, 주로 자전거로 운반을 하였는데, 간혹 내가 없을 때는 집사람이 그 무거운 것을 이손 저손으로 번갈아 쉬면서 배달하였기 때문에, 결국은 집사람 못할 일까지 시킨 것이었다. 내가 일하는 꼴이 보기도 싫었겠지만 한편으로는 안쓰러워서 그렇게 용을 쓴 것이었다.

요즘은 지구온난화 운운하며 난리법석을 떠는데 당시의 겨울은 혹한으로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것은 기본이었으며 한 번 눈이 쌓여 얼어버리면 봄의 문턱에 되서야 해빙(解氷)이 될 정도로 그 추위가 아주 매서웠다.
하여 - 나 같이 가난한 서민들에게는 달갑지 않은 계절이었다.

눈이 내려 빙판이 되어버리면 석유통을 손으로 들고 다녀야 하는 예기치 않은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데, 운 좋게 비탈진 고갯길을 한발 두발 잘 올라가면 천만 다행이지만 자칫 삐끗하여 넘어지게 되면 거의 원점(原點)으로 미끄러져 도로아미타불이 되는 것이다.
누구든지 극한 상황에 부딪혀서 열을 받게 되면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것인가! 나 역시 이런 일을 당하는 순간은 그림이고 나발이고 다 집어치우고 이렇게 살 바에는 차라리 죽어버리자는 충동까지 일게 되는데, 한 겨울에 이런 경우를 서너 번 치르고 나면, 그야말로 구차한 인생살이의 삶 자체를 내동댕이치고 싶은 것이 그때의 심정이었다.
그러나 그런 날 밤에도 붓을 들고 화선지 앞에 앉으면 그날의 고통은 서서히 사라지고 새로운 희망과 의욕이 되살아나는 것은 아마 그림 그리는 것이 내 분신(分身)인듯 나하고 궁합(宮合)이 잘 맞아떨어지는 천직(天職)이었기 때문이리라.

“전생(前生)에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렇게 혹독한 시련을 주십니까?” 하느님을 향해 삿대질을 하며 울부짖었다. 그것은 무허가라는 벌칙으로 3일 동안 유치장 신세를 지면서 유치장에서 질러본 독백이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결국 포도청을 방문한 후, 1년 남짓한 석유사업도 문을 닫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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