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김암기 화백 아내 서순덕 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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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김암기 화백 아내 서순덕 여사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19.07.17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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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못지않게 명성 있는 교육계의 큰 어른
구 목포사범학교 본관. 현재 목포대도서문화연구원이 사용하고 있다.

김암기미술관 개관
[목포시민신문=김경완 전문시민기자]지난 7월 3일 김암기미술관이 유달산 기슭에 야심차게 개관했다. 고 김암기 화백의 아내 서순덕(86세) 여사가 남편의 뜻에 따라 미술품 227점, 유품 165점을 목포시에 기증하면서 시작된 일이다. 개관식은 많은 내외빈의 참석으로 성황리에 진행됐다. 거기에는 서순덕 여사의 목포사범학교 7회 졸업 동기인 남동순(86세) 여사도 서울에서 내려와 참석했다.
다음날 두 사람은 모교인 목포대학교 용해캠퍼스를 찾았다. 본관 석조건물 현관에 선 순간, 순식간에 66년 전의 과거로 돌아갔다.
“그땐 참 철없이 놀았는데... 여전히 소녀 같은 마음인데 이렇게 나이를 먹고 할머니가 됐으니...”(남동순)라며 두 여인은 10대 후반 학창시절을 그리워했다.

서순덕 여사

서순덕은 1934년 신안 자은도 유천리에서 태어났다. 유천은 서씨 집성촌으로 농토가 넓고 부유한 동네였다. 아버지 서길포도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데다 개화된 생각을 가지고 있어 딸들도 교육시키는 열정을 보였다. 그 덕에 서순덕은 일찍 목포에 나와 목포사범병설중학교(당시 경동에 소재함. 나중에 사범학교로 통합됨)를 졸업하고 1950년 목포사범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해방 직후 초등학생이 급증한 반면, 일본인 교사들이 차지하던 교원 수 만큼 교원이 부족하여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가 지역별로 사범학교를 설립했다. 1938년 광주사범학교가 설립되고 목포사범학교와 순천사범학교는 1946년 설립되어 초등교원 양성기관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강일국, 『목포시사』 2권)

목포사범학교 졸업
교사가 된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선망의 대상이었다. 당연히 목포사범학교는 인재들이 모이는 곳이었고 그만큼 경쟁력도 높았다. 3년 과정의 목포사범학교 정원이 1947년 당시 300명이었으니 각 학년당 100여명의 학생들이 있었던 셈이다. 실제 1953년 서순덕의 졸업사진을 보면 모두 105명의 학생이 확인되는데, 남학생이 89명인데 반해 여학생은 16명에 불과했다. 숫자가 적었기 때문에 여학생들은 서로 더 각별하게 지낼 수 있었다.

“개구쟁이처럼 뛰어다니며 놀러 다니고 그랬어. 그 비녀산에 돌아다니면서 놀고.. 경동에 살면서 사범학교까지 걸어 다녔어요. 목상(목포상업학교)생들이 우리를 못 따라다녔어요. 여학생들이 억셌어요. 놀기도 잘하고, 가고 오는 길에 젠사이 집 하고 빵집, 떡집 아조 안들어 다닌데가 없이 돌아다녔어... 떡 먹기, 젠사이 먹기, 빵 먹기 시합도 하고...허허.”(서순덕)

“사범학교 학생들이 1년에 한 번씩 목포극장에서 발표회 하고 재미있게 지냈어요.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목포시내에서 다른 팀들과 경연을 했는데, 우리 강수월래가 1등을 했어요. 그래서 송아지를 탔어요. 그 사진이 지금도 있어요.”(서순덕)

졸업사진에서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다. 배경이 되는 화강석의 웅장한 사범학교 본관 건물의 중앙 캐노피가 보이는데, 오른편이 벽으로 막힌 장면이다. 현재의 사진<사진3>과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아마, 사회가 혼란스럽고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탓에 왼편 교사만 먼저 짓고 운영하다가 1953년 3월 이후 오른쪽 교사를 지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현재 도서문화연구원으로 사용하고 있는 이 건물은 등록문화재 제239호로 지정되었다. 자료에는 1954년에 건립된 것으로 나오는데 오른쪽 날개까지 추가로 건축한 연도를 표시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사진에서와 같이 왼쪽 교사는 1950년에도 이미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암기 화백과 결혼
서순덕은 졸업 직후 무안면성초등학교(현 무안초)에서 첫 교사생활을 시작했다. 그런데 2년 후인 23세에 결혼하면서 학교를 그만뒀다. 남편 김암기와의 인연은 오래됐다. 김화백이 사범학교 1년 선배인데다, 서순덕이 유달초등학교로 교생실습을 나갔을 때 그곳 교사를 지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까지는 특별한 인연이 없었고, 나중에 양쪽 집안 두 어른의 주선으로 결혼하게 됐다. 

결혼 후 안좌도에서 시부모님을 봉양하던 서순덕은 시골생활에 적응하기 힘들어 2년 후 다시 교사발령을 요청했다. 하지만 내심 기대하던 육지가 아닌 안좌초등학교로 발령 났다. 이때 인연으로 안좌초는 물론 낙도인 반월도에서도 근무하게 된다. 1968년 반월분교 졸업사진을 보면 분교장 김암기, 교사 서순덕의 모습이 함께 보인다.

“반월은 오지 마을입디다. 거기서 참 열심히 했어요. 마을 분들이 정말로 가난했거든요. 아무것도 뭣이 없을 때 해초 뜯어갖고 학교 운영하도록 미역 몇 뭇 보내주고... 캐나다 유니세프 지원으로 밀가루, 깡냉이가루 또 보릿쌀 갖다가 급식을 다 했어요... 아이들 점심 먹이고 부락민들 나눠주고...그래도 참 보람있었지요.”(서순덕)

이미 압해동초에서 근무한 경험도 있고, 이후 사치분교 등에서 근무한 경력으로 32살에 교감이 됐다. 이후 교감으로 12년, 장학사로 8년, 다시 교장으로 12년을 근무하면서 1999년 8월 광주교대부속초등학교 교장으로 퇴직했다. 당시 장희순 교감선생의 덕으로 멋진 정년퇴직기념집이 만들어져 귀한 자료와 사진이 잘 남은 것에 대해서는 지금도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다.

서순덕 선생은 6년 전 작고한 남편을 지칭할 때 여전히 ‘김암기 화백’이라고 존경의 뜻을 담아 부르고 있었다. 이제 그의 바람은 한 가지 뿐이다. 김암기미술관이 널리 알려지고 정착되어 더 많은 이들이 고인의 작품을 감상하고 즐길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다.

목포사범학교 제7회 졸업사진 (1953.3.16)
안좌초등학교 반월분교 졸업사진 (1968.2) 김암기, 서순덕 부부교사의 모습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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