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연재] 목포문학상 소설 본상 범현이 작 목포의 일우(一隅) -②
상태바
[소설 연재] 목포문학상 소설 본상 범현이 작 목포의 일우(一隅) -②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20.01.16 16:4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범현이
소설가 범현이.
소설가 범현이.

[목포시민신문] 골습이 심한 남농에게 죽동에서 바다까지는 녹록한 거리가 아니었다. 남농은 바다로 가는 길에 여러 번 쉬었다. 더러 그림을 그려준 이들이 남농에게 아는 체를 했다. 인사나 답례를 할 그림을 그려준 이의 불편한 몸을 걱정하기도 했다. 그들은 가난한 조선 사람들이었다. 부유한 일본인들은 남농을 몰랐다. 간혹 아는 자가 있기도 했겠지만 아는 척 하는 자는 없었다. 남농은 화려한 기모노와 요란스러운 게타 소리를 눈에 들이지 않고 귀에 담지 않았다.

배가 정박하고 있는 부두는 부산했다. 해가 바뀔수록 일본은 호남을 탈탈 털어서 쓸어가고 있었다. 배에 짐을 싣는 소란스러운 소리가 부두에서 멀리 떨어진 바닷가까지 들려왔다. 남농은 배에 짐을 싣고 있는 부두를 멀리 등지고 걸었다. 놋숟가락까지 긁어가는 일본의 발악이 목에 꽉 찼으니 그 끝이 머지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조선은 그 고비가 견디기 힘들어 보였다. 짐을 실어주고 배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인부들의 발이 허공을 딛는 것 같을 것이었다. 남농은 땀에 전 잠방이와 때에 전 수건에 검게 그을린 얼굴들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봄이 와서 바다 바람이 부드럽게 부풀었다. 시절이 고약해도 계절은 때를 잊지 않고 찾아와서 바다풀이 파랗게 살아나고 있었다. 파도를 따라서 너울거리는 것은 아마도 톳이나 미역일 것이었다. 썰물이 밀려난 자리에는 조개도 있을 터였으나 남농이 서있는 곳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남농은 파도가 핥으며 물러나는 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파도가 핥고 간 자리가 화선지 같았다. 남농은 멀미를 느꼈다. 머리를 식히자고 온 산책길이 무거워지고 있었다.

남농은 시선을 들어 수평선을 보았다. 무엇을 그릴 것인가? 어떻게 그릴 것인가? 수평선을 바라보는 눈이 부셨다. 보이지 않는 수평선 너머에서 끊임없이 밀려오는 파도가 보였다. 바다 위에서 봄볕이 들끓었다. 바다가 남농의 생각 같았다. 봄 바다는 수다스러웠다. 남농은 봄 바다에 귀를 기울였으나 파도 소리는 높낮이가 없고 단조로웠다.

머리에 수건을 두른 아낙이 남농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그때였다. 아직 푸릇푸릇하게 젊고 고운 아낙이었다. 아낙은 몇 번 산책길에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썰물이 남기고 간 것들을 줍고 있는 듯 보였다. 바구니에 담긴 해초가 보였다. 미역이었다. 꾸들꾸들한 것이 밥을 싸먹거나 국을 끓여먹으면 잃었던 입맛이 살아날 것 같았다. 하지만 산책도 겨우 하는 남농은 바다로 내려갈 수 없었다. 남농은 아낙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문득 아낙을 넣은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다.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짐을 싣고 내리는 부두가 멀고 바닷가에 홀로 있는 아낙의 구도가 너무 밋밋해서 선전에 내기에는 약할 듯싶었다.

하지만 무엇을 그려야 할지는 희미하게 떠오르는 듯했다. 다만 뚜렷하게 잡히지 않을 뿐이었다. 남농은 좀 더 아낙을 지켜보기로 했다. 지켜보면 뚜렷하게 잡히지 않는 것이 잡힐 것 같았다. 막연한 예감이었다.

아낙은 바구니가 가득 차자 남농이 서있는 길로 올라왔다. 아낙의 시선과 남농의 시선이 봄볕 속에서 부딪쳤다. 아낙의 눈은 맑고 눈동자가 검었다. 고운 얼굴이었다. 남농은 아낙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스스로에게 무안해져서 재빨리 눈길을 돌렸다. 아낙을 비켜가기 위해 불편한 걸음을 떼는 남농에게 아낙이 수건을 풀어서 미역을 싸주었다.

봄 미역이 제법 먹을 만합니다. 한 번 드셔보시지요.”

아니, 괜찮습니다.”

사람들한테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림을 그리신다고…….”

……?”

제게도 자식이 있으니 언젠가는 선생님을 찾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

<다음호 이어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