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광장-김경완 시민기자] 신미화이용원 폐업한 박행성 이발사....90년 세월 이고 앙버틴 2대 가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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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광장-김경완 시민기자] 신미화이용원 폐업한 박행성 이발사....90년 세월 이고 앙버틴 2대 가업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20.02.26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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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삼옥 부친에게 이발 기술 배워 가업 이어
부두 노동자 삶 깃든 마인계터 부침 지켜봐
이용자 감소 작년 폐업 자택으로 이용 중

[목포시민신문=김경완 시민기자]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이발소인 서울 만리동의 성우 이용원은 1927년 문을 열고 3대째 운영 중이다. 서울시는 그 가치를 인정해 2013년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했다. 아쉽게도 옛 모습을 간직하던 그곳은 지난해 리모델링을 통해 과거의 정취를 찾을 수 없게 됐다.

근대문화유산 가치 커

목포의 신미화이용원도 1930년 전후 마인계터에 오픈했다. 창과 출입문, 그리고 실내가 일부 리모델링 됐지만 여전히 과거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지도읍 선도 출신의 박삼옥(1906~1981) 옹은 섬에서 목포로 나와 일본인 밑에서 혹독한 견습 생활을 하면서 이발 기술을 배웠다. 당시 불에 달군 고대기를 사용했는데, 그 고대기에 머리를 맞아 흉터가 남을 정도였다. 박삼옥 옹은 결혼 전 지금 자리에 조일이발관을 오픈했다. 가히 목포의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될 가치가 충분히 있는 셈이다.

아버지가 일본사람 밑에서 기술을 배웠다고 그래요. 아버지가 총각 때부터 여기서 이발을 시작했지. 이발소를 할라고 이 장소를 잡았어요. 그러니까 한 90년 돼요. 일제 때 아버지가 운영 하실 때는 목 의자 3개 놓고 하셨어. 그때 당시는 (직원을) 직공이라고 그랬어. 직공도 두 세 명씩 놓고 했어. 그때는 손님들이 빡빡 했죠.”(박행성)

해방 이후 1950~60년대 마인계터는 죽동 인근은 물론 섬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었다. 목포 유지들이 다니는 칠천궁(나중엔 평화정이 됨)이란 요정도 있었고, 유달산으로 오르는 좁은 골목에는 니나노(흥겹게 상을 두드리며 부르는 노래) 술집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술집 손님들이 묵는 여인숙도 한집 건너 하나 꼴로 많았고, 늘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그렇다 보니 이발소를 찾는 손님들도 정말 많았다. 안집과 이발관 구분이 따로 없던 당시 자녀들인 5남매 모두 아버지 일을 도와야 했다. 모두 자연스럽게 이발 기술을 배우게 된 셈이다. 그 중 막내인 박행성(1945년생)이 아버지의 권유로 이발을 전업으로 삼고 이발관을 이어받았다. 그가 본격적으로 이발을 시작한 것은 제일중학교를 졸업한 이후인 196117세가 되던 때이다. 기다리는 손님이 많을 때는 끼니도 거르며 손님을 받아야 했다.

아버지는 상당히 성실하시고 온순하신데 내가 배울 때는 엄하게 갈쳐 주셨어. 기억나는 것은 여기 손님이 밀리면 옆 가게에서 막걸리 반 되를 받아와요. 그라면 따뜻하니 물에 데워 가지고 아나 이거 한 잔 해라. 그러면 안 뻐칠(피곤하다의 지역어) 것이다...’ 밥도 못 먹고 할 때니까.. 그것 먹으면 기분이 좋아가지고, 얼큰할 정도니까 일도 잘되고, 배고픔도 잊어 불고.”(박행성)

해방 이후 박삼옥 옹은 조일자가 늘 마음에 걸렸는지, 1964년 경 신미화이발관이라고 개명했다. 새로운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장소란 뜻이다. 나중에 이발관이용원으로 바꾼 것은 아들 박행성의 의지였다.

 

조일이발관이 신미화이용원으로

시간이 흘러 우리 사회에서 이발소가 점점 인기를 잃기 시작했다. 남성들도 이젠 여성들의 공간인 미용실을 찾아가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고 오히려 자연스러워 탓이다. 그래도 2대에 걸쳐 이발소를 운영하다 보니 오래된 단골들이 많아 신미화이용원은 제법 오래 버틸 수 있었다. 근처에 사는 남농 선생님도 아버지와 친구라 꼭 이곳을 이용했다. 덕분에 남농의 작품도 여러 점 소장하기도 했다.

박행성 이발사의 경력은 어느덧 60년이 됐다. 이 세월은 그의 팔을 그냥 두지 않았다. 이발사의 생명인 오른쪽 팔 인대가 끊어져 더 이상 일할 수 없는 상태가 된 것. 직업병인 셈이다. 하는 수 없이 20196월 이용원의 문을 닫았다. 이용원의 오래된 의자는 고물상으로 갔지만, 그가 사용하던 면도기와 바리깡, 기타 이발도구들은 여전히 서랍 속에 그대로 남아 있다.

78년 동안 한 장소에서 살다

한 장소에서 태어나 평생을 그곳을 떠나지 않고 살아온 사람이 현대의 복잡하고 다양한 사회에서 과연 얼마나 있을까? 박행성 이발사는 스스로 인생이 참 무난했다고 회상했다. 아주 넉넉하게 살지도 않았지만, 또 불행하지도 않았다. 군생활을 하면서 연애로 만난 아내와 단란하게 가족을 꾸려 3남매를 건강하게 키워 낸 것이 고마울 따름이다. 영화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를 찍던 1994년의 기억도 아름답고, 최근 이곳에서 찍은 뮤직비디오‘6시 내고향등의 이벤트가 있어 즐거웠다.

퇴역한 이발사는 이제 마인계터에서 옛 추억을 되새기며 이용원 공간을 손님 맞아 담소를 나누는 장소로 사용하고 있다. 가끔 인터넷을 보고 찾아온 손님들이 지금도 있다. 그들이 차 한 잔 하고 가면서 목포의 정취나 인심을 느낀다면 그것으로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따름이다.

/목포대도서문화연구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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