雲霧山水로 이어지는 雲林山房 4代畵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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雲霧山水로 이어지는 雲林山房 4代畵脈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13.01.15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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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자력(自力)으로 입선(入選)한 국전(國展)

타향에 살아봐야 고향을 아는가! 목포에 내려온 우리 부부는 고향의 포근한 정취에 젖어 미래로 다가올 희망찬 설계에 한껏 부풀어 있었다. 걸어서 출퇴근할 수 있는 학교 가까운 곳에 전세를 들었다. 넓고 편한 작업실이 학교에 있었기 때문에 아주 특별한 날을 제외하고는 아침 일찍 화실로 출근하여 야간반 수업이 시작하는 해질 무렵까지 그림을 그렸다.

화실은 15평 크기의 독실(獨室)로서 열 명 정도의 수강생들이 사용할 수 있는 테이블과 의자가 있었고, 학생은 물론 선생님들도 큰 부담 없이, 시시때때로 방문하여 공부할 수 있도록 개방시켜 놓았다.
그리고 나 역시 이렇듯 안정된 환경과 편안한 생활 때문이었는지 나날이 달라지는 운무산수에 스스로 도취되어 세월 가는 줄을 몰랐다.

벌서 고인이 되셨지만 후학들을 위한 이복주 이사장님의 배려에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립니다.

본시 그림이란 잘되면 신이 나서 그리고 안 되면 신경질이 나서 더 그리는데 이러기를 계속하는 동안 이제는 국전작품을 백부님의 가필(加筆) 없이 자력(自力)으로 완성 시킬 수 있는 단계까지 솟아올랐다.

1970년 제19회 1971년 제20회 국전에 거듭 입선을 하면서 화가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고 1972년 제20회 국전 입선을 기념하는 첫 개인전을 시내 민물다방에서 열었다.

붓을 잡은 후 처음 갖는 전시회라 동호인들의 따뜻한 마음들이 십시일반(十匙一飯)되어 작품이 전부 매진되는 쾌거를 이루었다. 속된말로 털 나고 처음 만져본 큰돈이었다. 그 돈으로 목포입구에 있는 양을산(陽乙山) 모퉁이에 200평 정도의 넓은 땅을 마련하고 아담한 화실까지 지었다.
더하여 1974년에는 목포 교육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일신의 영달을 누렸으니 한마디로 일취월장(日就月將)한 것이었다.

이 얼마나 가슴 뿌듯하고 즐거운 일이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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