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신서의 교육이야기]전남지역에서의 근대교육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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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신서의 교육이야기]전남지역에서의 근대교육의 시작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20.04.22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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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신 서 (목포사회혁신 네트워크 상임대표)

[목포시민신문] 우리나라에서 교육은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완성시킨 원동력이었다.
일제강점기, 남북 전쟁, 산업화의 어려운 시대를 거친 민중들에게 교육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희망의 투자였다. 전남의 학교는 학생과 부모에게 꿈을 실현하는 배움터이자 농어촌에서는 지역공동체의 구심점이었고 문화와 역사의 장이 되어왔다.
근대교육의 태동, 일제 강점기, 폭발하는 민중의 교육열과 그 속에서의 전남의 학생들, 미 군정기의 전남교육, 60-70년대의 양적팽창기, 산업화 과정에서의 농어촌 학교의 위기, 광주와 전남의 분리 이후의 전남교육 등 전남교육의 태동과 발전과정에 대해 1차 정리하고 두 번째로 전남교육의 현주소와 전남지역의 대학에 대한 실태까지를 이야기 하고자 한다.

근대교육의 태동

우리나라의 근대교육은 1895년 2월 2일 고종이 교육에 의한 입국 의지를 표명한  교육특별조서에서 비롯되었다. 이 조서에 의하면, 교육은 국가보존의 근본이며, 신교육은 과학적 지식과 신학문의 실용을 추구하였으며, 교육의 3대강령으로서 지육·덕육·체육을 제시하였다. 교육입국의 정신에 기반 하여 학교를 많이 설립하고 인재를 길러내는 것이 곧 국가중흥과 국가보전에 직결되는 사실임을 밝히고 있다. 이후 교육을 통한 국가중흥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1895년 4월에 교사양성을 목적으로 한 「한성사범학교관제」를 공포하였으며, 그 외에도 「외국어학교관제」, 「소학교령」 등 학교법제와 법칙을 제정하였다.
전남지역 최초의 근대학교는 1895년 5월 소학교령에 의거하여 1896년에 설립된 광주공립심상소학교였다. 이듬해 무안과 나주에 공립심상소학교가 각각 개교된 것을 필두로 전남의 여러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소학교는 수업연한 3년의 국민교육의 기초교육기관임을 표방하고 덕성의 함양과 인도주의의 실천을 교육목표로 삼았다. 이를 위해 수신, 독서, 작문, 습자, 산술, 체조 등 6개 교과목을 편성하여 학생을 교육하였다. 체조대신에 여학생의 경우 재봉을 추가할 수 있었다.
한편, 전남지역 사립학교는 대체로 1900년 이후에 문을 열었고 1910년까지 총 89개의 학교가 설립되었다. 1901년 담양은 학교설립을 위해 군수 주도하에 유림들이 운영비를 분담하여 전남에서 가장 먼저 사립근대학교를 설립하였다. 1897년에 개항된 목포에서는 일신학교, 영진학교 등이 1901년에 설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진도, 무안(지도), 영광, 여수(거문도) 등 목포 인근지역과 해안가를 중심으로 사립학교가 설립되었다. 진도는 여러 지역에서 유배된 지식인과 지역민들이 함께 광신학교를 설립하였고 1885년 영국에게 불법점령을 당했던 해상 전략적 요충지로서 외국문물을 일찍 접할 수 있었던 여수거문도의 낙영학교는 여수지역의 첫 근대교육기관이 되었다.

일제 강점기, 폭발하는 민중의 교육열

1905년 을사조약에 따라 외교권이 박탈당하자 조약의 무효를 요구하는 유생들의 상소투쟁과 조국수호를 위해 나선 지사들의 죽음과 저항이 이어졌다. 뜻있는 지식인들은 신교육을 통해 독립과 근대화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여 학교설립을 주도하였다. 이에 따라 교육구국운동의 일환으로 전국 각지에서 근대 학교의 설립이 민간주도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1908년에 들어서자 일제는 본격적으로 지역사회 공동체가 중심이 되어 설립한 사립학교들을 통제하기 시작하자 학교들은 문을 닫거나 서당, 강습소 형태로 그 명맥을 유지하였다.
이 시기 전남은 서당의 수가 전국 평균보다 많았고 지역공동체에 기반을 둔 자율적인 교육이 활발히 이루어졌으며, 이러한 추세는 공립보통학교들이 확대되는 시기까지 지속되었다. 이후 1면 1학교 원칙이 제시되어 1939년까지 사립 14개를 포함하여 300개가 넘는 공립보통학교가 전남지역에 설립되어 교육이 이루어졌다. 학교설립과 운영에 필요한 현금을 많이 확보한 지역에 우선적으로 학교설립을 허가했기 때문에 해당지역의 주민들은 현금을 분담하거나 학교 부지, 건물 등 기부가 이어졌다. 그도 저도 없는 지역민은 곡식을 내놓거나 학교건축공사에 노동력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폭발하는 민중들의 교육열을 일제는 감당할 수 없어 학교를 새로 짓기보다는 학급당 학생 수를 늘리는 방향으로 정책이 이루어졌다. 학생 수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여학생의 경우 광주, 목포, 여수 등 도시권을 중심으로 취학이 증가하였으나 전라남도 전체적으로는 3분의 1에 미치지 못하였다. 중등학교의 경우, 1919년까지 전남과 제주의 간이농업학교와 광주의 숭일학교, 수피아여학교, 목포의 영흥학교와 정명여학교, 순천의 매산학교와 매산여학교 등 기독교 계열의 사립학교들이 설립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교는 학력을 인정받지 못하는 각종학교에 해당하였고 학생 수도 적었다.
이후 민중들의 교육열에 의해 설립된 사립학교들이 일제가 직접 통제하는 공립학교로 바뀌면서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광주농업학교, 전남도립사범학교, 여수수산학교, 제주농업학교, 목포상업학교 등 관립학교들이 설립되었다. 그리고 영산포 공립실과여학교 같은 실업여학교도 설립되었으며, 3·1 운동 이후에는 항일 학생운동과 민족교육운동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그 당시 도시에 있는 중등학교에 자식을 유학 보낸다는 것은 부유한 계층의 연소득 3분의 1에 해당하는 돈을 투자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경제적 이유 때문에 1940년대 초반까지 전남 중학생수는 1,600여명에 불과하였다.
<이후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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