雲霧山水로 이어지는 雲林山房 4代畵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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雲霧山水로 이어지는 雲林山房 4代畵脈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13.01.22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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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분명(分明), 금의환향(錦衣還鄕)은 아니었다.

똥개가 발에 채여 깨갱거리듯 그 사건 이후 서울이 싫어지기 시작했다.

살기도 팍팍하였지만 생존에 허덕이는 인간들의 각박한 인심도 그랬고 큰돈은 아니었지만
움직일 때마다 내야하는 교통비도 버거웠다. 갑자기 고향 생각이 났다.

먹 거리도 싸고 풍부한 고향으로 돌아가 백부님의 가르침을 더 받고 아버지께서 남기신 그림책도 더 꼼꼼히 살펴보고 싶었다.

“이 철없는 놈아”를 시작으로 몇 마디 더 하시고 “고생 많이 했지야”라는 위로의 말씀으로 그동안의 일들은 깡그리 사면이 되었다. 혼날 각오를 단단히 하고 백부님을 뵈었는데 때마침 방문한 손님 덕분에 더 이상의 호된 문책은 없었으니 그나마도 천만 다행이었다.

“이 놈이 홍대 나와서 국전에 입선까지 한 허림(許林)이 아들이여” 하고 ‘홍대’와 ‘국전’에 악센트를 붙여 인사 시킨 분은 당시 목포덕인학원의 이복주 이사장님이셨는데 돌아가신 아버지와 절친한 사이였다며 양손을 잡아 흔들며 진정으로 반가워 하셨다.

평소에 그림을 좋아하셨고 관심이 많으셨던 이사장님께서는 그림에 자질(資質)이 있는 학생들을 육성 하기 위해 당신 학교에 동양화반을 신설(新設)해놓고 마땅한 선생을 물색하고 있었던 터에 내가 나타났으니 그 기쁨이 배가(倍加)된 것이었다. 사실 그때만 하더라도 전라남도를 기준으로 미술대학(동양화전공)을 나온 사람은 손가락으로 셀 정도로 귀한 시절이었다.

내가 서울학교에서 사표를 내게 된 자초지종을 들으시더니 조목조목 한 결 같이 내 입맛에 맞는 조건들을 제시하셨다. 교내에 임전(林田)전용의 화실을 제공하고, 야간반 학생들만 가르치고, 주당 수업은 과장급 시간을 적용한다는 아주 파격적인 대우를 약속해 주셨다.

“울고 싶자 때리더라"고 이사장님은 자기가 원하는 스타일의 선생을 구해서 좋았고, 나는 막연 하기만했던 삶의 터전을 다시 얻어서 좋았고, 백부님은 조카살림에 신경 쓸 필요가 없어서 좋았다.
그야말로 일석삼조(一石三鳥)가 된 것이다.

고진감래라고 했든가! 이날을 맞이하기 위한 몸부림이 그렇게도 거칠고 험난하였던가.
아내에게 목포에서 있었던 일들을 얘기하자 눈물부터 흘렸다. 그것은 그동안의 고통을 송두리째 털어버리는 기쁨의 눈물이었을 것이다.

상경하자마자 집을 내놨다. 45만 원에 산 것이 60만 원 정도 되었으니,3년 가까이 살면서 손해는 없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집사람과 아옹다옹하면서 동고동락 하였던 정든 집이었는데,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큰 미련 없이 정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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