雲霧山水로 이어지는 雲林山房 4代畵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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雲霧山水로 이어지는 雲林山房 4代畵脈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13.01.30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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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전경력(國展經歷)이 우리들의 명함(名銜)이었다.
 

해마다 국전(國展) 때만 찾아오는 철새형 제자들이 한 두 명이 있었다. 어느 날 아침 백부님께서 보냈다고 충남 공주에서 온 친구가 소고기 몇 근을 떠가지고 우리 집을 찾아왔다. “선생님이 구도(構圖)를 잡아오라고 했습니다."하면서 내미는 화선지에 대충 초(礎)(밑그림)를 잡아 보냈는데 오후가 되자 구도(構圖)가 통과됐다며 살을 붙여달라고 다시 찾아왔다. 최하 6개월에서 1년 가까이 공을 들여야 하는 출품작을 달랑 화선지 몇 장 들고 와서 불과 삼일 만에 완성 하여 돌아갔다. 그런데 그 친구는 입선하고 나는 낙선하였다.

그 시절의 국전(國展)도, 지금같이 입상자의 수가 제한되어 있어서 공주 친구처럼 로비를 통하여 입상을 하게 되면 그런 족속들의 숫자만큼 그 피해가 다른 사람에게 돌아가게 되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아전인수(我田引水)라고 자신의 이익과 영화를 위해서는 무슨 짓을 해도 된다는 당시의 사회풍조가 신성한 미술계에까지 범람하여 이러한 비리와 야합(野合)(?)할 수 없는 화가들은 아예 일찌감치 국전(國展)을 포기하고 홀로서기를 해야 하는 판국이 되어버린 것이다.

원래 예능이란 그것을 가늠하는 척도가 영어나 수학같이 정해진 답이 있는 것이 아니어서 보는 사람의 느낌이나 관점에 따라 조금씩 달라질 수도 있는 것이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비슷한 점수면 먼저 주변 사람부터 헤아리는 것은 당연한 순리겠지만 이러한 순리가 갈수록 왜곡되고 퇴색하는 과정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발로된 것이다. 때문에 일부 과격한 낙선자들은 국전심사에 불복하면서 그 억울함을 행동으로 항의하듯 덕수궁 담벼락에 자신들의 그림들을 붙여놓고 낙선작품 전시회를 가졌는데 이것이 단군 이래 유일한 ‘거리 국전’의 시발이 된 것이다. 이는 당시 사태의 심각함을 반영해주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것이지만 내가 이 일을 끄집어내는 것은 나 역시 이 시기를 기점으로 국전과 결별하는 중대한 사태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거리국전’의 대다수는 낙선될 그림이었다.
다만 그중에는 입선이 가능한 작품과 특별한 연줄이 있으면 특선도 할 수 있는 아까운 그림들이 한두 점 포함되기는 하였지만 대부분의 그림들이 큰 충격을 줄 수 있는 쇼킹한 작품들이 아니어서 두 해정도 계속되다 종래(從來)는 싱겁게 막을 내리고 말았다.

그러나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은 심사위원들의 능력과 자질에도 그 요인이 있겠지만 심사권자 대부분이 자기 몫(?)챙기기에 급급하다보니 다른 작품에 신경 쓸 겨를이 없고 확인된 바는 없지만 개(犬개)중에는 이미 입선한 작품까지 끌어내렸다는 소문까지 파다하게 나돌았으니 그 파장이 오래 갈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경력(國展)이 즉 작가의 명함이요 부(富)의 척도(尺度)로 변질되어 너 나 없이 더 화려한 명함을 가지기위한 아귀다툼을 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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