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하 현상’과 한국 보수 언론·정치의 흉측한 이기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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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현상’과 한국 보수 언론·정치의 흉측한 이기주의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13.01.31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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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민의 문화 세태 비평-시비(是非)

▲ 최성민 전 한겨레 논설위원, 방송독립포럼 대표
<오적>의 김지하 시인의 언동이 논란을 낳고 있다. 김 시인은 혹독한 박정희 독재시절에 박정희 독재를 비판한 ‘오적’이라는 시를 써서 고문을 당하고 사형선고를 받아 고난의 옥살이를 한 것으로 세계적인 관심을 받고 한국 독재투쟁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런 그가 십수년전 갑자기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 때려치워라..’든가 하는 칼럼을 써서 새로운(?)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는 당시 ‘생명운동’을 벌이던 참이라 그의 칼럼은 한편에선 일견 일관성있는 주장으로 받아들여질 명분이 있었다. 그러나 또한 당시 극심한 군사 독재정권에 대항하여 학생과 노동자들이 민주화를 외치며 투신·분신하던 흐름에 찬물을 끼얹는 작위로 받아들여질 여지도 있었다.

특히 그의 글이 조선일보에 실렸다는 점이 범상하지 않았다. 진보적인 문화예술인들이 ‘안티 조성’ 운동에 참여하여 조선일보 기고거부 및 절독운동을 벌이던 때였다.

김지하씨가 이번에 새삼 세인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대선정국 때이다. 새누리당쪽에서 ‘국민통합’을 외치며 반독재의 상징과 같은 그를 끌어들이는 전략을 썼다. 그럴 즈음 그는 또 조선일보에 불쑥 ‘쑥부쟁이...’론의 글을 쓰면서 원로 진보성향의 학자 백낙청씨를 공격했다.

그 무렵 박근혜 ‘후보’가 멀리 원주에 있는 그의 집을 찾았다. 김씨 말에 따르면 박근혜 후보더러 지학순 주교 묘소부터 찾아보고 오라는 조건을 달았다고 한다. 박근혜 후보로서는 내일 모레 대통령이 될 지도 모르는 당사자로서 시골 구석에 있는 노 시인을 찾아가 주는 것만도 보통 일이 아닌데 산속에 들렀다 오라는 전제조건까지 이행해야 하는 것이 속으로 ‘더럽기는 하지만’ 표를 얻기 위해서는 별이라도 따다 주겠다고 할 마당임에랴...

박 후보와 만난 자리에서 김 시인은 ‘여성주도의 후천개벽론’으로 厚待했다. 이윽고 박 후보가 당선이 되고, 바로 직후 오비이락인지 탁월한 법조인이 조절한 절묘한 타이밍인지 김 시인의 과거 ‘억울한 죄명’에 대한 재심 재판이 열려 무죄가 선고되었다. 그 자리에서 김 시인은 “돈이 없어 자식 대학도 못보냈다. 먹튀하는 000에게도 27억을 주는데 나에겐 몇 푼이나 주려나?...”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런 김 시인의 행태에 대해 소설가 장정일씨는 한겨레신문에 쓴 기고문에서, 김시인이 아들 대학 못 보냈다는 말은 거짓이며, 그가 언제라도 조선일보에 글을 쓰면 그만한 돈은 벌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민족종교협의회 한양원 회장은 김지하 시인의 후천개벽론과 여성대통령론에 대해서 “국가 전체의 운수를 봐야지, 지도자 한 명에 의해 후천개벽이 온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군사정권때 자신의 주장이 잘못됐다는 고백을 한 뒤라면 모르지만, 아무런 전제 없이 상대에 대한 평가가 극에서 극으로 편의에 따라 바뀌는 것도 지식인의 모습으로 볼 수 없다.대놓고 돈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그렇게 돈을 원하면 일찍이 돈벌이를 했어야 하지 않는가?”라고 했다.

나는 김 시인이 돈 얘기를 한다고 해서 남들이 크게 탓할 일은 아니라고 본다. 그가 세속을 떠난 道人이 아닌 한 한 사람의 생활인으로서 의식주 생활비와 자식 교육비가 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세속의 때와는 조금 거리를 두어야 할 문화예술인이고 특히 시인이라는 점이 걸린다.

공자는 “詩 三百 一言以廢之 思無邪”라고 했다. <시경>에 있는 시 300편은 한 마디로 ‘마음에 邪함이 없음(순수한 마음)’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또 “興於詩 立於禮 成於樂”이라고도 했다. 순수하고 발랄한 시의 흥취로써 인생의 눈을 뜨고, 사회질서를 지키는 예로서 사회에서 자리를 잡고 세상의 조화를 이루는 음악의 즐거움으로써 인생을 이룩한다는 뜻이다. 세상이 오늘날처럼 혼탁하고 소설이나 다른 장르의 문학 또는 예술이 없던 공자 시절에 시는 그만큼 세상의 등불 역할을 했다.

김지하씨의 최근 현실적인 행적이 어쨌다고 해서, 세상이 과거로 돌아가려는 오늘날 <오적> 등 그의 불후의 시들이 ‘思無邪’의 반열을 이탈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그가 과거의 아픈 기억과 팍팍한 오늘의 개인사적 현실이 뒤엉켜 판단이 좀 흔들리는 측면이 있을지라도 그가 <오적>에 담긴 자신의 영혼이 <오적>과 함께 오늘에 지속됨을 부인하진 않을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세상의 가장 엄준한 말들을 다 동원하여 비난해야 할 대상은, 김 시인의 ‘물리적’인 흔들림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영향력을 키우고 이익을 도모하려는 보수 언론과 정치권의 술책이다. 여느때보다 강퍅한 일상을 살아가는 대중들의 가슴에 <오적>으로써 다시 ‘興於詩’의 기개를 심어줘야 할 오늘날 그들의 기억에서 ‘영웅’을 허물어뜨리는 자들이 만세를 부르고 있다.

황량한 세상, 멘토가 절실히 요청되는 이때 사악한 자들이 ‘思無邪’의 성채를 허물어뜨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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