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하 김형만의 한국유학 이야기-2] 한민족의 뿌리는 원시 몽고족...문화의 명맥 은(殷)의 무신(巫神)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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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하 김형만의 한국유학 이야기-2] 한민족의 뿌리는 원시 몽고족...문화의 명맥 은(殷)의 무신(巫神) 종교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21.03.04 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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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하의 한문학 이야기-2] 한민족의 원류와 우리 민족의 성격
​​​​​​​은족이 낳은 대성인 순과 공자가 진단하고 처방한 ‘중용문화(中庸文化)’
우리 민족의 단점을 장점으로 전환시켜 다시 세계 속에 우뚝 서게 할 수 있다
중원에서 누렸던 은족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도록
민족적 사명감을 갖고 우리의 역사 문화를 추동해 나가야 할 것

한민족의 원류와 우리 민족의 성격

[목포시민신문] 이 땅에서 우리의 역사를 이루어온 한민족의 원류와 우리 민족의 성격은 어떠한가 하는 물음은 당연하면서도 그 답은 간단하지가 않은 것 같다.

오늘날의 한국인은 시베리아·만주·투르케스탄 등지에 분포되어있는 사람들과 같이 대체로 북몽고인종 혹은 넓은 의미의 퉁구스족에 속하고 있다. 체질면에서 북몽고인종, 언어면에서 알타이어족에 속한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건국신화와 난생설화 및 여러 풍속 들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한민족의 주류는 북방계임을 나타내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한인(韓人)들이 언제부터 한국사의 주인공으로 되는가를 살펴보면, 한국사의 고고학적 편년에는 구석기시대·신석기시대·농경문화와 청동기시대·철기시대가 있으며 그 시대마다 그 문화의 담당자가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각 시대의 문화 담당자들은 구석기문화인·신석기문화인, 즉 즐문토기인·무문토기인으로 나눌 수 있다.

용산문화와 통하는 농경문화를 가졌던 무문토기인들이 체질상으로는 북몽고인종, 언어학상으로는 알타이어족에 속할 것이며, 이들에 의해서 남겨진 허다한 북방계적인 요소, 예를 들면 천손족사상(天孫族思想), 태양숭배사상 및 난생설화, 무격신앙(巫覡信仰)과 거기에 따른 제의(祭儀)와 습속(習俗)을 발견할 수가 있다.

중국의 선진문헌(先秦文獻)에는 동이(東夷)라는 명칭이 많이 나타나는데 바로 동이족이 이 무문토기인들일 것이다. 당시의 동이족은 오늘날 양자강 북쪽의 회하(淮河)연안 지방에까지 퍼져 있었다. 즉 지금의 중국 강소성·안휘성의 일부와 산동성과 하북성 일대를 거쳐, 발해만을 끼고 요하와 만주지역에 살았던 이민족의 총칭을 동이족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 동이족은 중국 서북지역으로부터 한 갈래는 만주 동남부와 한반도로, 다른 한 갈래는 하북·산동반도 방면으로 이동하였고, 산동방면의 동이족은 중국의 한족과 끊임없는 투쟁을 벌이며 황하 유역을 거슬러 서쪽, 중원으로 나아가 하왕조(夏王朝)를 무너뜨리고 은왕조(殷王朝)를 세워 중국 대륙을 약 600여년 동안 지배하였던 것이다.

이들은 주왕조(周王朝)에 의해 멸망한 이후에도 회하유역까지 퍼져 큰 연합세력을 이루어, 그 연합세력의 맹주인 서언왕은 주나라와 싸워 크게 승리하였고 주나라의 목왕으로부터는 서언왕에 대하여 땅을 떼어준다든지 조공을 바치는 현상까지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다가 주나라가 춘추전국시대를 거쳐 진시황에 의해 중국이 통일되자 동이족은 진()의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일·동화 정책으로 정복·흡수되거나 동쪽으로 만주와 한반도로 이동하게 되었던 것이다. 후일 위만이 중국에서 왔다는 것도 결국은 그곳에 남아 있던 동이족이 이동하였다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회하·산동반도·요동·한반도 등에 같은 동이족이 있어서 같은 문화권을 형성하였으리라는 것은 산동반도에 지석묘와 단군신화를 회화화(繪畵化)한 벽화가 있다는 사실에 의해서도 입증된다고 할 것이다. 중국 다른 곳에서 보이지 않는 지석묘가 그곳에 보인다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될 것이다.

곧 문헌에 나타나고 있는 광범위한 동이족(東夷族)이 고고학에서 말하는 무문토기인일 것이며, 이들은 문헌에 한·예맥족(·濊貊族)으로도 나타나게 된다. 이들이 몇 차례의 민족이동을 하면서 우수한 금속문화를 이룩하여 역사시대로 진입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 중 처음에 농경기술을 가지고 들어온 환웅족(桓雄族)이 곰을 숭상하던 즐문토기인들과 접촉하면서 단군신화를 남기며 단군조선을 건설하였을 것이다. 그 뒤에 몇 차례의 민족이동에 의하여 소위 기자조선과 위만조선 등의 상고의 국가를 건설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한민족을 동이계(東夷系)의 은족(殷族)과 관련해서 그 원류와 민족의 성격을 김충열 교수의 설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한민족의 원류는 원시 몽고계와 은족계의 복합이며, 은족의 원류는 몽고족이었다. 여기서 은족이라 함은 사마천의 사기·은본기에 나오는 씨족으로, 기원전 18세기에서 12세기까지 약 600여 년 동안 중국 대륙을 지배했던 은왕조(殷王朝)의 주인을 말한다.

은왕조가 망하면서 기자(箕子)가 동래했다는 설을 조선의 유자(儒者)들은 굳게 믿어왔고, 또 이를 자랑스럽게 여겨왔다. 중국의 역사·문화·철학 속에서 볼 때 고대 하(() 문화의 정수를 집약해서 주나라에 넘겨주고 주나라가 그것을 토대로 중국 문화의 중후한 기반을 닦을 수 있게 한 대철인이 기자요, 그가 동래하여 한민족의 풍교(風敎)를 수범(垂範)했기 때문이다. 지금 중국 사람들이 쓰고 있는 문자도 그 연원이 갑골문자에서 발전되어 나온 것임을 볼 때 비록 중국 땅에서 은족은 망했으나 그들이 만든 문화는 면면히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또한 하나라의 윤리 문화를 정초했던 순()임금이 동이인이요, 주나라가 은의 효() 사상과 종교 제사 문화를 인습하여 심성을 뿌리로 한 도덕 문화를 발전시켰고, 이를 다시 집대성하여 유교 문화를 개창한 공자(孔子) 역시 은()의 후예이고 보면 우리는 중국 문화를 남의 나라 것으로 이질시하기 보다는 그 속에서 나의 동질성을 찾아 우리 민족 문화의 범위를 넓혀야 할 것이다. 협애한 민족관과 패쇄적인 문화관을 지양하고 우리 민족의 뿌리를 더 먼 데까지 소급해 찾고 우리 문화의 정화를 더 넓고 높은 데까지 올라가 찾아야 할 것이다.

현재 우리의 민족관과 문화관은 너무나 편협하고 패쇄적이다. 사실 은왕조가 주에게 망한 원인도 그들의 지고유일(至高唯一)의 조상신 숭배사상과 천명사상(天命思想)이 결합된, 선민의식(選民意識)에 따른 민족적 편협성과 종교적 배타성 때문이었으므로, 우리는 이 교훈을 되새기지 않으면 안 된다. 역사상 우리는 심지어 같은 민족이면서 이질시하고 같은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문화를 이단시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왔다.

우리는 민족 구성에서는 단일 민족이지만 문화 구성에서는 복합적이라고 본다. 즉 지금의 만주 일대를 포함하여 한반도에 이입된 사람들은 일시에 모여든 것이 아니라 오랜 옛날 원시 몽고 종족 때부터 은이 망한 시기, 심지어 중원이 전란에 휩싸였던 전국 말기, 진나라 때 등등 큰 변화가 있을 때마다 계속해서 이입해 왔던 것이다.

그러므로 원시 몽고족 문화 수준을 가지고 들어온 부족은 비교적 원시 미신 종교 형태의 토속 신앙을 가졌을 것이고, 은나라 유민으로 동래한 부족은 비교적 발전된 원시 유교 형태의 윤리 문화를 가졌을 것이며, 진의 유민들은 그 당시 문화 수준을 가지고 한반도에 들어왔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꼭 무속(巫俗) 신앙만을 우리의 고유문화로 보기도 어려운 것이다.

우리 한민족의 뿌리는 원시 몽고족이고, 그 문화의 명맥은 은()의 무신(巫神) 종교이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의 성격은 은족의 그것과 흡사하다. 은족의 장점이 우리 민족의 장점이며, 은족의 단점이 바로 우리 민족의 단점이다. 한마디로 집약하면 비현실적·비중용적이라는 것이다. 한민족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서는 협애한 민족주의나 배타적인 종교로는 어렵다. 그것은 오히려 민족의 병폐를 조장시킬 우려가 있다. 은족이 낳은 대성인 순과 공자가 진단하고 처방한 중용문화(中庸文化)’(배타성을 띤 신유학이 아닌 원시유교) 만이 우리 민족의 단점을 장점으로 전환시켜 다시 세계 속에 우뚝 서게 할 수 있다고 본다. 중원에서 누렸던 은족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도록 민족적 사명감을 갖고 우리의 역사 문화를 추동해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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