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소(便所)에 갔다 온 사이에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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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소(便所)에 갔다 온 사이에 (19)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13.02.28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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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이 국전(國展)에 응모 할 때는 사전에 스승님의 엄격한 심사를 통과하여야 한다. 그것은 최하 입선을 기준하여 특별한 연줄이 있으면 특선까지도 바라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그림만 출품을 허락하였기 때문이다.

제21회 심사위원에 남농 수제자(南農 首弟子)가 두 명씩이나 포함되어 있는 절호의 찬스(?)에서 이러한 과정을 거쳐 출품한 내 그림이 낙선되었다.

백부님께서 일일이 부탁하며 신신 당부까지 하였는데 그때는 “걱정 마십시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는 그들이 그렇게도 간곡한 스승님의 부탁을 왜 뿌리치고 말았을까?  나중에 알게 된 각자의 변(辯)은, 같은 시간에 한결 같이 배탈이 나서 변소에 왔다 갔다 하는 사이에 심사가 끝나버렸다는 아주 차원 높은 해명이었지만, 정말 그랬다면 그 사람들이 챙겨야 할 몫은 어디서 건졌을까?

입상자가 발표되자 나는 말할 것도 없고, 백부님은 양손에 턱을 괴고 화실천정을 바라보시면서 눈시울까지 붉히셨는데, 분명-그 표정에는 작년 이맘 때 자기가 내린 결정을 후회 하는 듯한 모습 같았다.

“나쁜 놈들!” “내가 지 놈들을 어떻게 키웠는데!”- 제21회 국전(國展)도 그렇게 끝이 났다.

순간 그들이 다음에 또 심사를 하게 된다면 반드시 환자용 변기라도 딸려 보내야겠다는 기발한 생각이 뇌리를 스쳐 갔지만, 그러나 그렇게 치사한 수고가 필요 없게 되어버렸다. 왜냐하면 임전(林田)의 국전(國展)도 제21회로 마감해 버리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그때 만약 내가 특선을 하였다면 자만(自滿)에 들떠 분명 오늘의 운무산수(雲霧山水)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비 국전(非國展)을 한 후로는 그림 그리는 시간을 평소의 배(倍)로 늘렸다.

그것은 당시의 추세가 비 국전(非國展)작가들은 알게 모르게 천대와 괄시를 받았던 시절이라 흙속의 진주라고 그들 중에서도 “저 사람은 국전(國展)작가 뺨치는 실력이여”라는 인정을 받으려면 그 만큼의 노력과 인내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하루 이틀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세월로 채워지는 것이어서 오랫동안 고심을 해야 이룰 수 있는 끝없는 고난의 투쟁이었다.

“이 세상에 믿을 놈 하나도 없다아” 백부님 화실을 나오면서 별이 총총한 밤하늘에 목청이 터지라고 큰소리 한번 질러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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