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곱만큼이라도 주고가시지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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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곱만큼이라도 주고가시지 (20)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13.03.05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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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것을 보고 그대로 그리는 것을 임화(臨畵)라고 한다.
때문에 그림으로서의 진정한 값어치가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스승의 그림을 스승보다 훨씬 더 잘 그렸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스승의 그림을 모방한 것이지 자기가 창작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항간에 남농 풍(南農風),청전 풍(靑田風)하는 풍(風)은 그림만 보아도 누가 그렸다는 것을 한눈에 식별할 수 있을 정도로 작가특유의 고유한 영역을 가지고 있다는 것인데, 이것은 그들이 화계(畵界)에 입문(入門)하여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과 비교할 정도로 어려운 과정을 성취하여 자기만의 바람<스타일>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내가 목포에 내려온 후부터는 줄곧 남농 풍(南農風)의 그림을 그렸다.
원숭이 그림 그린다고 꾸중까지 들으면서도 그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능력의 한계 때문이었을까! 죽기 아니면 살기로 연구해서 이제는 됐구나 하고보면 부분적인 변화만 있었을 뿐 전체적인 분위기는 남농(南農) 스타일 그대로였으니, 진짜-아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사실 화가의 생명은 개성(個性)인데 국전을 세 번씩이나 입선한 놈이 아직까지 뚜렷한 변화 없이 스승의 그림만 모방하고 있었으니 그 속은 얼마나 타고 멍들었겠는가.

“저놈은 화가 집안에서 태어나 정규 대학까지 나왔으니 뭔가 보여줄 것이여”라는 기대(期待)와, “느그 아버지는 천재(天才)였어“라는 비교(比較), 그리고 “대학 나오면 뭣 하냐 재주가 없는디”라는 무시(無視) 이렇게 다양한 시선들이 내 주위에 항상 잠재해 있는 것 같아서 맘 편할 날이 거의 없었다.

붓을 잡은 후 처음으로 내 직업에 회의(懷疑)를 느꼈다.
지난 세월의 쓰라린 고통과 기나긴 시련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닦아온 길이였는데 지금에 와서 그 모든 것을 포기해야겠다는 참담한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내 재주와 능력의 한계가 여기까지 밖에 안 된다는 판단을 했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런 시기를 권태기라 하였는가.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자 그 원망이 요절(夭折)하신 아버지에게로 돌아갔다.

그렇게 일찍 가실 바엔 당신 재주 눈곱만큼이라도 주고 가시지 왜 홀로 남은 자식에게 이토록 큰 고통과 시련을 주십니까? 하고 무덤을 치며 울부짖었다.
그런데 귀신도 자기 자식은 알아봤는지 그 이후부터 아주 서서히 오기 시작한 변화가 바로 오늘에 이르는 운무산수(雲霧山水)의 모태(母胎)였다.

-옛날 귀신들은 최소한 자기 자식 정도는 알아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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