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단상-양승희] 똑박똑박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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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양승희] 똑박똑박 책읽기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21.03.24 2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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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시민신문] 코로나 19가 지속될수록 집 밖으로 나갈 일이 적어졌다. 당연히 말하는 경우도 줄었다. 그런데 갑자기 상대방에게 말하는데 말끝이 생각나지 않아서 곤욕스러웠다. 그래서인지 듣는 사람은 횡설수설하는 것으로 보는 것 같았다. 불안했다. 그래서 눈으로 보던 책을 소리 내어 읽기로 했다.

어린이 만화 그리스 로마를 읽기 시작했다. 외래어나 이름들을 또박또박 읽었다. 재미있기도 하지만 생각보다 글이 잘 읽혀졌다. 이러다 보니 말하기에 대한 불안감이 없어졌다. 오히려 천천히 소리 내어 읽다 보니 좋은 문장들이 보였다. 바다에 대한 상상력이 잘 써져 있어서 수첩에 올렸다.

포세이돈은 흰말이 끄는 황금 마차를 타고 하루 종일 바다 위를 달렸지. 찰싹찰싹 청동으로 된 말발굽이 물 위로 쭈르르 미끄러지면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에 황금 갈기가 휘날렸어.

책을 읽으면서 학생들이 쓴 글도 찾아 소리내어 읽었다. 다음의 글이 재미있어서 여기에 올린다.

내 동생은 나의 돈줄이다. 그 돈은 책상 마을 서랍골의 가로 한 뼘 반, 세로 세 뼘, 높이 한 뼘의 밭에서 나온다. 내 동생은 이 밭에 100원 짜리, 500원짜리, 씨를 뿌린다. 그 씨는 어느덧 자라나 발갛게 맛이 들어간다. 그럴수록 동생의 손은 바빠지고 누가 서리해 갈까 봐 경계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어느덧 파랗게 포기가 여물면, 또 다시 그곳에는 100원 짜리, 500원 짜리 씨앗이 뿌려진다. 이러기를 수 차례, 배추가 많이 저장되어 있겠다 싶으면 나는 동생에게 접근한다.

아이들이 배추 많이 길렀네?”

뜯어가려고? 배추가 땅에서 그냥 나오냐? 씨를 뿌려야지. 언니 니가 언제 씨 뿌렸어!”

어렸을 적엔 강제로 빼앗아 가기도 했는데 피천득 작가의 <은전 한 잎>을 읽고부터는 생각이 달라졌다. 강제로 빼앗아 가는 것은 동생의 소망을 빼앗는 것이라 여겨져서이다.

동생의 배추가 나오게 되는 때는 두 가지의 경우이다. 하나는 내가 동생 대신 설거지를 해주는 때이다. 그럴 때마다 동생은 옆에서 재밌냐하며 거드름을 피운다. 다른 경우는 동생의 손에 들려 압해도를 빠져 나올 때이다.

그것들은 서점을 경영하는 할아버지의 손으로도 가고, 옷 가게 언니의 손으로도 간다. 목포길을 잘 모르는 동생의 가이드를 자청하면 동생의 기분에 따라 그것들은 내 티 바뀌기도 하고 책으로 바뀌기도 한다. 기분이 최고인 날은 순대로 외식까지 가능하다. 이러니 동생은 내 돈줄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 동생이 요즘은 변해서 그것으로 장사를 한다. 요전 날에 아빠가 자동차 보험료를 내기 위해 7만 원을 빌렸다. 반환 날짜를 정해줬는데 갚지 않자,

아빠, 기간 안 지키시는데 연체료 물려요.”

아빠는 이런 동생의 모습이 기특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는지 더 두고 보신다며 모른 체한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그걸 모우느라 딸이 얼마나 고생했어요? 얼른 갚으라며 아빠를 채근한다. 그러면 아빠는 한 술 더 뜬다.

나 돈 없다. 우리 집을 담보로 하든지 아빠를 팔든지 해라.”

좋아요. 이제부터 아빠는 내것이에요. 그러니 내 맘대로 할 거예요. 지금부터 엄마는 아빠를 부를 때 수정이 아빠라고 해요. 동생은 평소에 사람들이 아빠 앞에 큰딸인 내 이름을 넣는 게 부러웠는지 7만 원으로 아빠 칭호를 바꾼다.

아무튼 우리 가족은 동생의 소같은 부지런으로 결실한 배추 몇 포기로 달콤한 행복을 산다. 동생은 이런 행복을 사려고 오늘도 배추씨를 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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