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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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힘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13.03.05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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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물 소리 황석영


‘여울물’은 강바닥이 얕거나 폭이 좁아 갑작스레 물살이 세게 흐르는 곳을 지칭하는 순우리말이다. 그 여울물의 생명력 넘치는 울림처럼, 황석영의 최근작 『여울물 소리』는 구한말 격동기를 배경으로 민초들의 삶을 당시의 민요, 판소리, 패관(稗官)소설 등을 인용해 이야기체로 엮어낸 소설이다.

이를 통해 근대화 초기 외세에 의한 강제 개항과 식민지화라는 역사적 급류의 소용돌이 앞에서, 중인의 서얼 출신으로 신분의 한계를 깨닫고 세상을 떠돌게 된 한 이야기꾼이 ‘사람이 곧 하늘’인 새로운 세상의 도래를 꿈꾸며 동학혁명에 가담하여 생을 마감하는 과정을 실감나게 담아내고 있다. 하지만 언뜻 보아서는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어 보인다.

『여울물 소리』 이전의 『객지』, 『삼포 가는 길』, 『한씨연대기』, 『장길산』 등에서도 작가 황석영의 화두는 늘 ‘소외된 민중’이었기 때문이다. 『여울물 소리』는 등단 이후 늘 그의 작품의 근저를 이뤄 왔던 부랑(浮浪)의식과도 맞닿아있다. 수직적이고 폐쇄적인 봉건사회에서 떠돌이 이야기꾼의 이야기를 통해 투영된 유목적 삶의 모습은 수평적 열린 구조로의 변혁을 이끌어내기 위한 일종의 해법으로 읽힐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소설이 그 형식에 있어 기존 작품들에 비해 보다 진일보한 형태를 선보이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다. 『여울물 소리』의 이야기는 단순히 동학 농민 운동이라는 특정 시대적 사건의 민중사적 복원에 머무르지 않는다. ‘작가의 말’에서 황석영은 다음과 같이 묻는다.

“이야기란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생겨나나, 무엇을 위해 존재하나, 어떤 것이 남고 어떤 것이 사라지나” 『오래된 정원』 이후 『손님』, 『심청』, 『바리데기』 등을 통해 그가 오랜 세월 고심해왔던 ‘이야기’에 대한 답을 얻은 것일까? 『여울물 소리』는 어떻게 하면 ‘이야기’의 형식과 내용 모두 자연스럽게 사회적 시선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작가 스스로의 지적 탐색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근대의 소설이라는 장르의 탄생이 그러했던 것처럼, 모든 이야기는 언제나 사람으로 환원된다. 우리 모두는 각자 저마다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황석영의 소설은 개인이 가진 저마다의 경험과 기억 또는 상처를 통해 우리네 역사를 기록한다. 그러나 개인이 중심에 있다고 해서 그 사회적 무게가 덜한 것은 결코 아니다.

사람에 대한 탐구는 궁극적으로 사람과 사람, 사람과 세계와의 관계를 고스란히 노정하는 총체적인 지각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또한 일반적인 사회 통념상 실재하는 객관적 사실로 받아들여지는 역사라는 장르가 역사가의 해석에 따라 달리 서술될 수 있다는 점을 상기해 볼 때, 역사 역시 사실에 바탕을 둔 이야기로 간주하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이다. 『여울물 소리』는 그렇게 ‘이신통’이라는 한 이야기꾼의 인생을 양반과 기생 첩 사이의 소생인 ‘연옥’이라는 서술자, ‘나’의 이야기를 통해 추적하며 19세기 말 사회 현실의 구조적 모순과 그 실상을 낱낱이 파헤친다.

사실 봉건적 신분질서가 와해되기 전까지 소위 소설로 대표되는 ‘이야기’는 문학의 변두리에 위치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 지식층에게는 시가(詩歌) 등이 중요한 문학 장르였다. ‘이야기’는 하층계급들이나 좋아하는 저질 오락거리로 폄하되기 일쑤였다. ‘이야기’가 문학의 중심으로 들어온 것은 소설이 근대의 복잡한 현실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가장 적절한 장르로 부각되면서부터였다. 물론 ‘이야기’를 굳이 소설처럼 글로 기록한 것으로 한정할 수는 없다.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게 되는 이야기의 종류는 실로 다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대적 가치를 다루는 소설의 등장과 함께, 비범한 인물이나 영웅을 다루던 ‘이야기’가 도시나 농촌의 평범한 사람 혹은 민중의 일상을 다루는 대중적 양식으로 거듭나게 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실제로, 개인 혹은 개인들의 가치에 중점을 두었던 소설은 작품의 인물들뿐만 아니라 독자들 역시 평범한 개인임을 인정하면서 고유의 문학 장르로서 창작되고 유통되기 시작했다.

이는 곧 현실적 개인의 가치에도 반영되었다. 요컨대, 소설이라는 장르는 개인적인 것이면서 동시에 사회적인 의미를 배태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의 ‘이야기꾼’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하는 것이 이 소설의 출발점이 되었다”라고 작가는 술회한다. 『여울물 소리』는 민중적 소통의 양식인 이야기 혹은 더 나아가 서사문학의 의미를 되짚어봄으로써 그가 오랫동안 천착해온 민중적 원류 탐색의 또 다른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임소라 한국외대 중남미연구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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