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하 김형만의 한국유학 이야기 ⑩] 반절과 이두
상태바
[도하 김형만의 한국유학 이야기 ⑩] 반절과 이두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21.04.29 08:2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용 문서 오독과 품사 전용 혼란 예방
우리말 음역해 쓰던 관용어 ‘이두’ 불러

이두(吏讀), 구결(口訣), 향찰(鄕札) 훈민정음 창제 이전 우리글

향찰(鄕札) 신라 한자 이용 자국어 표기하려던 집대성된 결과물

거란문(契丹文), 여진문(女眞文), 일본문(日本文) 등 이두문 모방

이두 훈민정음 창제 쇠퇴 소송문 등 관용문에 조선후까지 사용

[목포시민신문] 유학 경전 등 한문 원전을 읽다 보면 글자 아래 ’, ‘○○등 글자의 음을 표기해 놓은 곳이 있으며, 또 우리말의 어순으로 읽기 위해 글 사이에 별도로 붙여놓은 구결()도 보게 된다. 이제 이 궁금증을 풀어보자.

옛 사전에서는 어떤 한자의 음을 표기하기 위해서 그 한자와 음이 같은 다른 한자를 예로 들었다. 이 경우 보통 문장 형식이 'A독약(讀若)B'(AB와 같이 읽는다), 혹은 'A()B'(A는 음이 B)였는데, 전자를 독약법(讀若法)이라 하고, 혹은 독여(讀如), 독근(讀近), 성동(聲同) 등으로도 표기하였으며, 후자를 직음법(直音法)이라 하는데, 오음오(惡音烏), 정음정(正音征), 신음신(訊音信) 등으로 표기하였다. 이후 두 글자의 음을 합하여 그 음가를 정확하게 하는 법이 생겨 곧 상자(上字)에서는 전음(前音)을 취하고 하자(下字)에서는 후음(後音)을 취하여 둘을 맞붙여서 그 진음(眞音)을 나타내었다. 이것을 반()이라 하다가 뒤에 절()이라 고쳐 부르고, 또 합하여 반절(反切), 또는 번절(翻切)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이를테면 知妖反이라 하니 知字에서는 음을 취하고 에서는 음을 취하여 둘을 합하여 을 내며, 息焉切이라 하니 에서는 음을 취하고 에서는 ᅟᅥᆫ음을 취하여 합해서 을 내는 것과 같다.

반절은 음절을 반으로 나눠 인식하고 이를 체계적으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과학적이고 진보된 표음 방식이다. 또한, 반절에 쓰이는 반절 상·하자에는 잘 쓰이지 않는 글자를 피했기 때문에, 반절 상·하자의 음들을 알고 있으면 원래 알고자 하는 어려운 한자의 음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이런 면에서 반절은 이전에 쓰이던 독약법(讀若法), 직음법(直音法) 등의 방법과 비교해서 훨씬 더 진화한 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반절로 표기할 때 쓰이는 상·하자가 너무 많다는 점, 글자를 그대로 읽지 않고 일부분만 따온 다음 조합해서 읽어야 한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니고 있었으며, 또한 쉬운 글자의 음을 표기할 때 오히려 더 복잡한 글자들의 합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우리나라에서 반절의 수용이나 연구가 어느 시기까지 올라갈 수 있으며, 어느 정도였던가는 확실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이에 대한 최초의 언급은 동국정운 서문에서라 한다.

반절은 훈민정음을 지칭하는 이름으로 쓰인 일이 있었다. 조선 중종 때 최세진이 지은 훈몽자회의 범례 가운데에 언문 자모는 소위 반절이라 하는 것으로(諺文字母俗所謂反切)”라는 말이 보이며, 오주연문장전산고에도 반절이라 한 예를 볼 수 있다. 이는 훈민정음이 초··종 삼성(三聲)을 합하여 한 글자를 이루게 되었던 사실과 결부되어 붙여진 이름일 듯하며, 좀 내려와서는 초성·중성을 합쳐 만든 작자표(作字表)를 흔히 반절표反切表라 불렀던 것이다.

일찍부터 한문(漢文)의 수용은 민족 문화사 및 학술사에 지대한 영향을 가져왔음은 물론이며, 한자의 한국적 수용에 있어서 특기할 만한 사실은 한국어의 체계와 한문법(漢文法)의 체계가 서로 달라서 언문일치(言文一致)를 기하기 어렵고, 그대로는 적절하고 정확한 기록 목적을 달성할 수 없으므로 한자의 음과 새김을 빌어 우리말을 표기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곧 이두(吏讀), 구결(口訣), 향찰(鄕札)이다. 이는 훈민정음 창제 이전의 우리글이라 하겠다.

고 남전(南田) 원중식 서예가 작 회고통금(會古通今).
사물의 회합(會合)과 변통을(變通)을 뜻하는 말로, 옛것과 지금의 것을 융회관통 融會貫通한다는 의미.
대한민국 미술대전 서예 심사위원, 경동대학교 석좌교수 역임.

이두는 넓은 의미로는 한자차용표기법(漢字借用表記法) 전체를 가리키며 좁은 의미로는 한자를 한국어의 문장구성법에 따라 고치고 이에 토를 붙인 것에 한정하는 것이 보통이다. 처음 고유명사에 이용되던 이 표기법은 뒤에 확대되어서 이두와 구결이 성립하였고, 그것이 설총에 의하여 정리되기에 이르렀다. 이후 한국어 문장 전체를 표기하게 되는 향찰에 와서 그 표기의 난숙기를 이룬다. 향찰은 차자표기법 가운데 가장 발달한 표기법이다. 관명과 같은 고유명사나 단편적인 단어의 표기에서 발생하기 시작하여 이두구결향찰의 순서로 발달 된 것으로 추정된다. 문자를 가지지 못한 신라는 한자의 음()과 훈()을 차용하여 말을 기록하였다. 좁은 의미의 이두(吏讀)나 구결은 한문을 주로 하는 글에서 토로 쓰던 부분에 한정되어 사용하여 생략해도 한문이 그대로 남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향찰은 문장 전부를 향찰로 표기했기 때문에 향찰을 없애면 문장 전체가 없어진다. 이두문은 한문의 어순과 국어의 어순이 섞이어 쓰이는 것이 주종을 이루지만, 향찰은 완전한 국어의 어순으로 배열하였고, 인용구나 특별한 표현적 효과를 위한 경우를 제하고는 한문의 어순은 쓰이지 않는다. , 이두문은 투식(套式)이 많고 한문식 표현에 의지하는 바가 커서 조사나 어미가 소홀하게 표기되는 수가 많으나, 향찰은 조사나 어미의 표기가 정밀하여 자연스러운 국어문장을 표기하고 있다.

향찰(鄕札)은 신라 시대에 한자를 이용하여 자국어를 표기하려던 노력이 집대성된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하나의 표기 체제로서 한자의 음과 훈을 빌려와 국문 문장의 전체를 적는 표음식 차자의 방법으로 특히 향가(鄕歌)에 많이 표기되었다.

이두는 이토(吏吐), 이투(吏套)라고도 하며 넓은 뜻으로는 향찰과 구결을 포함하여 그 당시 우리말을 표기하던 모든 방법을 이두라고 지칭한다. 좁은 뜻으로는 한자의 음()과 훈()을 빌려서 한문을 국어 나열식으로 적기 위해 주로 조사, 접미사, 부사와 명사의 일부에만 사용하던 문자를 뜻한다. 주로 국가 기관이나 개인 간에 주고받는 서신, 문서, 계약서 등에 사용된 문자다. 구결은 한자를 읽을 때 구절의 끝에 붙여 문법적 관계를 나타내는 표기법이다. ()라고도 하며 한자와 한자를 변형한 약체자(略體字)를 사용했다는 점에서 이두와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이두와 구결의 표기법을 집대성한 것이 바로 향찰이다. 향찰은 겉으로 보기에는 한자를 나열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이를 사용했던 신라인들은 이것을 보며 한자로 읽은 것이 아니라 우리말로 읽었다. 이 향찰이라는 명칭은 당문(唐文)에 대한 상대적 표현으로 우리말을 적은 글자 또는 우리말을 적은 글이라는 뜻이다.

어순도 중국식 어순으로부터 탈피하여 중국식 어순인 주어-서술어 -목적어주어-목적어-서술어의 우리말 어순으로 바꾸고 명사나 용언 어간에 각각 조사와 어미를 첨가하는 방식을 채택하였다.

이두는 훈민정음이 창제될 때까지는 한문 번역의 구실도 하였으며, 훈민정음이 창제된 후에는 그 쓰임이 쇠퇴하기 시작하였으나 소송문·고시문·보고서 등의 관용문에는 조선 후기 때까지도 여전히 사용되었다.

흔히 이두문을 신라 설총의 작이라 하나, 그러나 설총 이전의 고비(古碑)에도 왕왕 이두문으로 적은 시가(詩歌)가 보이므로, 설총 이전의 작임을 의심할 것이 없다. 다만 기존의 한자차용표기법을 정리하여 이후의 발달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후세의 거란문(契丹文), 여진문(女眞文), 일본문(日本文)은 모두 이두문을 모방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말을 표기하는 데는 한계가 있어 결국 이두는 우리 문자로 정착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하고 세종대에 이르러 훈민정음의 제정을 보게 된 것이다.

생각건대, 왜 이두(吏讀)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는지, 에 주목해보면 이것이 관리(官吏) 서리(胥吏)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관용의 문서에서 그 음과 뜻, 어순을 명확히 함으로써 문서의 오독(誤讀)과 한자(漢字)의 품사 전용에서 오는 혼란을 막기 위한 것 또한 그 한 이유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즉 관용 문서의 필요에서 처음 발단되었거나, 혹은 우리말로 음역해서 쓰던 것을 관용으로 취하여 활용한 데서 이두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 같다. 실제로 조선 시대 후기까지도 관부(官府)에서 발급하는 완문(完文)이나 민간에서 관부에 올리는 소지(所志, 白活) 등에 사용했던 이두문의 용례들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다음 호에는 한국유학 이야기 11번째로,' 강수, 설총, 최최원과 문묘종사(文廟從祀)'가 연재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