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GO와 함께-목포 산돌교회 김종수 목사] '바라바'냐 '예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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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GO와 함께-목포 산돌교회 김종수 목사] '바라바'냐 '예수'냐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21.05.20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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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돌교회 김종수 목사

[목포시민신문]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 당시 명절 때마다 총독이 사람들이 요구하는 죄수 하나를 놓아주는 관례가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가 십자가 처형을 당할 당시 총독은 빌라도였습니다. 빌라도는 누굴 사면했으면 하느냐고 몰려온 무리에게 묻습니다. 사면 대상에 둘을 올려놓습니다. ‘바라바예수입니다. 이 때 예수 운동에 위협을 느낀 대제사장들에 의해 선동된 무리는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거세게 요구했습니다. 여론은 바라바와 예수 중 단연 바라바였습니다. 바라바는 민란을 일으켜 사람들을 죽인 폭동의 수장입니다. 빌라도는 그 선택의 책임을 무리에게 돌립니다. 사실 빌라도에게는 예수의 죄의 유무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에겐 자신의 권력을 흔드는 유대인 무리의 소요가 더 중요했습니다.

바라바예수’, 실은 두 메시아입니다. ‘바라바는 헬라어로아들이라는 의미의바르하나님 아버지를 뜻하는아빠‘, 두 단어의 결합입니다. ’바라바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메시아 칭호입니다. ‘바라바는 물리적 힘의 메시아입니다. 거기에 비해 예수는 저항도 없이 잡혀 십자가에 달리신 힘없는 메시아입니다. 바라바는 강력한 힘의 메시아,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 메시아입니다. 잘 먹고 잘 사는 세상 나라의 메시아입니다. 예수가 꿈꿨던 세상은 강력한 통치의 세상이 아니라 생명과 평화로 이끌어지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바라바가 지배의 메시아라면, 예수는 섬김의 메시아입니다. 바라바가 남을 죽여 자기를 세우는 메시아라면 예수는 자기를 죽여 남을 구원하는 메시아입니다.

5월이 오면 생각나는 역사가 있습니다. 지배의 두 역사입니다. 바라바의 역사입니다. 5.16 5.18입니다. 남을 죽여 자기를 세운 역사입니다. 두 독재자는 메시아로 칭송되기도 합니다. 하나는 반만년 가난한 이 나라를 구했다는 것으로반신반인으로 칭송되기도 하고 또 하나는민주화의 아버지라고 자화자찬입니다. 메시아를 자처하는 사람들입니다. 지배의 메시아들입니다. 그들은 탱크와 장갑차, 헬기 등 무력을 앞세우고 백성을 적으로 여기고 서울과 광주를 유린했습니다. 우리 시대의 바라바들입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나라를 위한 무력이었다고 말합니다. 자의든 타의든 상당한 무리도 그들을 지지합니다. 그들이 지배하는 시대에 신문도 방송도 앞다투어 그들을 찬양합니다. 종교도 예외는 아닙니다. 나라를 구한 지도자로 찬양하고 그들의 권력이 굳건하게 세워지도록 기도합니다. ‘조찬기도회라는 말은 어용의 대명사가 된지 오래입니다.

무력의 지배만 지배가 아닙니다. 군사적 정치적 지배만이 아니라 경제적 지배 역시 예외일 수 없습니다. 여전히 유전무죄 무전유죄입니다. 돈의 위력, 경제적 힘의 위력입니다. 그래서 무슨 죄를 지었든 재벌을 사면하자고 합니다. 경제의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합니다. 그 여론이 70%라는 보도도 여기 저기 있습니다. 돈이 있으면 그가 메시아입니다. 그래서 선거 때마다 공약의 1위는 경제 살리기입니다. 경제제일주의입니다. 사람다움을 공약으로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차별과 혐오는 여전히 선거의 금기 사항입니다. 아직도 차별금지법 하나 못 만들고 있습니다. 표를 의식하느라 가야할 길을 가지 않습니다. 섬김의 표가 아니라 권력의 표, 지배의 표 말입니다.

아직 제도적 민주주의조차 갈 길이 멀지만, 경제적 지배는 더욱 기승을 부립니다. 황금만능주의, 물량주의는 계층을 공고히 했습니다. 빈익빈 부익부는 더욱 굳어져가 개천에 용이 나는 일은 없게 되었습니다. N포 세대의 N은 늘어만 갑니다. 그 옛날 만석보 집안에 사회주의자가 많다는 낭만의 시대는 지났습니다. 무엇이든 기득권을 내려놓기가 쉽지 않겠지만 부의 기득권은 더욱 그렇습니다. 이미 오래 전 자본주의가 세상을 지배합니다. 물질이 근본이 되는 세상, 그래서 이 되는 資本主義 세상입니다. 근본이 물질이라는데 당연히 재벌이 메시아 바라바입니다. 가치가 그러하니 사람들이 다 돈돈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5.18은 무력의 메시아 바라바만 나부낀다고 절망만 하지는 않습니다. 바라바가 있다면 예수도 있습니다. 쿠데타를 일으켜 세상을 구하겠다는 메시아, 바라바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남을 죽여 자기를 세우는 바라바도 있지만 지기를 죽여 남을 살리는 예수도 있습니다. 5월 광주의 영령들이 그러합니다. 그들이 없었다면 이 땅은 아직 지배의 메시아, 힘의 메시아가 판을 치고 있었을 것입니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산다지요? 그 피가 어디 하늘에서 떨어지나요? 이 땅의 예수들이 흘린 피가 있었습니다. 지배의 메시아가 아니라 죽기까지 한 섬김의 메시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어느 찬송가의 가사처럼이름 없이 빛도 없이사라져간 민초들이 있습니다. 우리 시대의 진정한 메시아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총탄에 쓰러져간 힘없는 예수 메시아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진정한 역사를 만듭니다.

그러나 무리는 그들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힘의 메시아를 사면하라고 합니다. 정치건 경제건 말입니다. 하긴 나라를 위해, 백성을 위해 나라를 일본에 넘겼다는 이상한 애국자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기 목숨을 초개처럼 버려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은 무엇입니까? 그들 중 많은 분들이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빛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합니다만 예수는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다.”고 말씀하십니다. 소금은 녹아야 맛을 내고 빛은 태워야 발합니다. 흔적도 없이 녹아지고 사라져야 맛을 내고 태워 사라져야 밝아집니다. 맛깔 나는 세상, 밝은 세상은 온갖 부와 명예를 얻어가며 나라를 팔아먹은 데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름을 내세우려는 한 그것은 가짜 메시아, 지배의 거짓 메시아일 뿐입니다.

1970 11 22살 전태일은 자신을 불태웠습니다. 그는 일기에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자고 썼습니다.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알리지 않고서는 평화시장의 어린 노동자들이 살 길이 없음을 알았습니다. 소설가 김훈은 그의 이 일기를 생각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자신의 죽음을 차분하게 준비하면서 시대의 희생 제단을 향해 스스로 나아가던 마지막 날들의 내면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절망을 저항으로 전환시켰고, 저항의 연대를 이루어냈고, 시대 전체를 지배하던 경부고속도로의 이데올로기를 밀쳐내고 인간의 공간을 확보했다.”

그는 자기를 태워 세상의 빛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를 자살했다고 장례를 치러줄 수 없다고 한 종교인은 도대체 누구인가요? 그럼 죽을 줄 알고 십자가의 길을 갔던 예수도 죽음을 작정했는데 그것도 자살인가요? 한국 기독교계는 바로 전태일을 통해 비로소 역사적 예수를 발견합니다. 그래서 나온 신학이민중신학입니다. 민중신학은 바로 이 구체적 사건에서 나온 신학입니다. 한 노동자의 산화에서 나온 살아있는 신학입니다. 한국 기독교는 비로소 그를 통해 십자가의 예수를 경험합니다. 바라바 메시아로서는 결코 찾을 수 없는 신학입니다.

전태일은 기꺼이 자기 십자가를 졌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십자가만 생각합니다. 예수의 십자가로만 구원 받았다고 여깁니다. 당사자 예수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나를 따라오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마가복음 8:34)

예수의 십자가가 아니라자기 십자가를 말합니다. 예수의 십자가에 편승하는 것이 구원이 아닙니다. 자기 십자가입니다. 자기 희생입니다. 희생은 값입니다. 값진 삶이 되려면 값을 치러야 합니다. 사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십자가가 은혜라고 고백합니다. 은혜는 빚을 진 것입니다. 그럼 갚아야 합니다. 자기 십자가로.

전태일 산화 50년이 지났습니다. 그 사이에 많은 전태일, 너무나 많은 예수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노동의 성적표는 참담합니다. 아직 자기 십자가가 부족합니까? 여전히 부와 지배의 메시아가 우리의 여론입니다. 여전히 우리는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말합니다. 아직 치룰 값이 많이 남아 있나 봅니다.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차별, 필수노동자들의 과로사와 늘어만 가는 안전사고, 이주 노동자 문제 등 그 심각성은 쌓여만 갑니다. 갑질하는 지배의 메시아들은 이들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착취의 대상일 뿐입니다.

지난 4, 또 말로만 4.3, 4.19, 그리고 4.16을 말했습니다. 4.3의 배후에는 강력한 지배의 메시아 미국이 존재합니다. 5.18까지, 아니 지금까지 이 지배의 메시아는 방위비분담금이라는 명목으로 우리를 갈취합니다. 분단의 선은 누가 그었는가? 그러고도 지켜줄테니 돈 내라는 것입니다. 어디서 본 옛날 시장 건달들 이야기 같습니다. 우리 사회 비극의 사건 뒤에는 어김없이 미국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름다운 나라라니 어이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무리는 바라바 메시아를 칭송합니다. 전시작전권조차 바라바에게 내어준 군사대국 7, 경제대국 10위가 너무 부끄럽습니다. 남북 문제에는 미국의 승인을 받았냐고 묻는 정당도 있으니 말입니다. 아직 청산되지 않은 친일 친미 사대주의는 바라바의 DNA를 짙게 이어갑니다. 하긴 그 예수를 믿는 기독교 역시 세습 등으로, 기득권을 고수하고 있으니 확실히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대제사장이 사주한 무리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소리치는 것은 당연합니다. 부끄럽게도 실제로 예수가 아니라 바라바를 믿고 있는 것입니다. 바라바냐 예수냐, 아직도 아니 갈수록 너무 쉽고 당연한 선택이 아닌가 싶어 보여 씁쓸한 5월입니다.

/약력

연세대학 신학과 및 대학원 졸

목포산돌교회담임목사

전남 NCC회장

목포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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