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하 김형만의 한국유학 이야기⑮] 신진사류의 진출과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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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하 김형만의 한국유학 이야기⑮] 신진사류의 진출과 성장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21.06.03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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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난 후 성리학자 중심 토지 등 사회개혁 추진… 조선 건국 동력 작용

[목포시민신문] 무신의 난이 일어난 이후에도 문학활동은 계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어느 면에서는 오히려 더 활기를 띠었던 감이 없지 않다. 이때 등장한 일부 문인들은 전에 볼 수 없었던 왕성한 창작의욕과 날카로운 비평의식을 가지고 문학을 새롭게 하였던 것이다. 또 그들은 문학을 통해 발랄하고 진취적이었던 고대의 문화적 전통과 기상을 회복하는데 일정한 기여를 하였다. 이것은 유학계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쳐 고려 유학의 체질을 변화시키는 하나의 계기를 제공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무신난 이전의 문인과 무신난 이후의 문인은 이미 동질적인 것이 아니었다.

한편, 무신의 난이 일어나고 무신이 집정한 시기에는 문벌귀족 중심의 폐쇄적인 신분질서가 붕괴하면서, 신분변동이 촉진되었다. 특히 그동안 진출이 억제되었던 중앙관부의 이직(吏職)이나 지방 향리 또는 중소지주층에 기반을 둔 문인들이 과거 등을 통해 중앙 정계에 등장하여 관료로서 활약하였을 뿐 아니라, 나중에는 새로이 학계를 주도하는 주체세력으로까지 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들을 신흥사류(新興士類)’ 또는 신진사류(新進士類)’라 한다. 특히 지방 향리층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이들 신진사류란 고려 후기에 등장한 신흥세력 중 새로운 사회를 이끌어갈 학자·관료 가운데 유교적 소양이 깊고 정치적 실무에 밝은 사대부, 학자적 관료또는 관료적 학자를 의미한다. 이들은 최씨 집권 시기에 문학·종교·사상 방면에 종사하면서 새로운 문화 방향을 모색하였고, 그 뒤에는 성리학을 수용하여 자신들의 학문과 경륜을 더욱 세련시킬 수 있었다. 이들은 무신 통치 기간에 등장하기 시작해서 무신정권이 무너진 다음에는 정치적인 활동을 적극 전개하며 보수적 구세력인 권문세족과 정면 대결하여 다투다가 마침내 고려의 정치적 대세를 일변시키기에 이르렀다.

향리 출신의 사대부는 자기의 향리에 소규모의 농장을 가지고 있는 중소지주거나 자영농민이었다. 이러한 사대부들은, 권력을 등에 업고 불법수단으로 막대한 농장을 소유하게 된 권문세족을 경멸하였다. 이러한 중소지주층 출신의 문인 관료가 이른바 권문세족과 밀착되어 있던 불교 세력을 타파하고, 새로운 이념적 무기로써 성리학을 주창하여 그에 따른 유교적 정치 질서를 모색하고자 했던 것은 중국 남송 초기의 사정과 비슷한 바 있다고 할 것이다. 새로운 정치철학인 정주학의 세례를 받은 그들로서는 개혁적이고 진취적인 성격이 강하여 구질서를 비판 내지 부정하였으며, 유교적인 관료체제를 확립하여 그 체제 안에서 자기들의 활동기반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한편 그들은 당시 대외적인 입장에서 배원친명(排元親明)의 외교노선을 취하였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그들의 사상적인 기반인 성리학의 특성에서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아울러 그들의 적대세력인 권문세족과 보수적 관료층이 원나라의 세력을 배경으로 하였기 때문에, 그 반대적 입장에서 배원친명의 노선을 취한 것이기도 하였다.

이후 공민왕 때 과거제도와 학교제도가 재정비되면서 사대부의 이념과 세력은 급속히 심화·확대되었다. 이들은 과거를 통해 중앙의 정치무대로 대거 진출하였고, 또 유교사상에 입각한 왕도정치·문치주의의 구현을 이상으로 하면서 동시에 유교적 관료정치를 지향하였다.

그리고 고려 후기의 사회적 불안과 국가적 시련을 깊이 통찰하여 애국(愛國애민(愛民)의식을 바탕으로 정치철학을 가다듬고 새로운 사회건설을 지향하면서 성장해 가고 있었다. 또 권문세족이나 사원(寺院) 등 보수적인 구세력에 대하여 정면으로 도전하는 사회의식과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당시 권문세족이나 사원에서는 토지를 겸병한 나머지 산천을 표로 하여 경계를 삼을 정도였다고 하며, 이로 인해 신진사류는 자신들이 당연히 받아야 할 분급수조지(分給收租地, 科田) 는 물론 녹봉까지도 지급받지 못하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따라서 국가로부터 관료로서의 생활을 보장받지 못하는 신진 관료파들이 그러한 사태를 초래케 한 권문세족이나 사원에 대해 불만이 없을 수 없었고, 또 그들이 농장을 부정하고 토지의 재분배를 요구한 것은 당연하였다.

고려 말기의 전제(田制)의 문란상은 공양왕 때 조준이 올린 상소에 잘 나타나 있는데, 그의 상소는 사전개혁(私田改革)에 대한 논의의 기폭제가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신진사류는 전제개혁을 주장하면서 언제나 나라를 통치하는 자는 반드시 토지의 경계를 바로잡는 것으로써 인정(仁政)의 시작을 삼아야 한다고 하는 맹자의 말을 이끌어 전제개혁의 당위성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수탈과 핍박에 시달리는 농민층과 가난한 병사들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얻을 수 있는 것이기도 하였다.

사대부들의 주된 주장은 불교배척과 사전개혁이었는데, 전자가 사상적 측면에 해당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정치·경제적 측면에서 논의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서로 성질이 다른 별개의 것이 아니고 맞물려 있었다. 불교에 대한 비판과 공격은, 불교 교단과 한 통속이 되어있는 중앙 권력층 내지 대농장주인 권문세가들에 대한 투쟁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교에 대한 승리는 정치·경제·사회 등 여러 방면에서 승리를 수반하기도 한 것이다.

서화가 항산(恒山ㅡ늘뫼) 장근헌(대한민국 미술대전 초대작가) 작 '붓'

한편 사대부 계층은 고려 왕조의 테두리 안에서 점진적인 개혁을 추진하는 온건파인 이색·정몽주 등과, 적극적인 급진개혁파인 정도전·조준 등으로 갈라져 대립하였다. 이렇게 대립하게 된 것은 전제개혁이라는 첨예한 문제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사대부 대다수는 온건파에 속하였다. 공민왕 때까지의 개혁은 주로 온건파에 의해 주도되었으나, 그 역시 권문세족들의 반발에 의해 제약되거나 좌절되고 마는 경우가 많았다.

공양왕 당시 사전개혁의 요구가 제기되어 정의에 부쳐졌을 때, 사전을 일시에 혁파하자는 논의에 찬성한 사람은 소수의 급진개혁파 뿐이었고, 권문세족은 말할 것도 없고 온건개혁파까지도 그에 반대한 것이었다.

이에 급진개혁파에서는 본격적이고 적극적인 개혁을 위해 구세력은 물론 온건개혁파와의 사상적 투쟁을 절감하였고, 더 나아가 왕조 자체를 바꾸려는 역성혁명(易姓革命)의 필요성까지 인정하게 되었다. 그들의 급진적인 사회개혁론은 여기에서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가 급진개혁파는 이성계를 정점으로 하는 무인세력에 편승하여 위화도회군 이후, ‘폐가입진(廢假立眞)’을 구실로 창왕(우왕의 아들)을 폐출하고 공양왕을 옹립, 정권을 장악하였으며, 이제껏 구세력과 온건개혁파의 반대에 부딪혀 실현을 보지 못했던 전제개혁을 단행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먼저 전국의 토지를 조사한 뒤 종래의 공사전적(公私田籍)을 모두 불태워버리고 이듬해 새로운 과전법(科田法)을 공포하였다. 과전법으로 인해 불법적인 농장이 모두 몰수되고 토지의 재분배가 이루어졌다. 이 법의 실시에 따라 고갈된 국가재정은 확충되고, 신진 관료들의 경제적 기반이 구축되었으며, 나아가 새로 세워질 조선왕조 경제의 기초가 되었다.

그와 반면에 구세력들은 하루아침에 경제적 기반을 상실한 채 몰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따라서 과전법의 실시는 정치·경제 측면에서 구질서가 신질서로 대체되는 것이라 하겠다. 이것은 아울러 고려 왕조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과전법은 피폐한 농민들의 생활을 개선시켜 주고 공전(公田)을 증대시켜 국가의 수입을 증가시켰다. 과전법에서는 농민층에 유리한 여러 가지 조건이 제시되었는데, 이는 고려 말까지 수차례 내우외환에 대처해 용감히 싸운 농민들의 투쟁의 결과가 일정하게 반영된 것이기도 하지만, 그 이면에는 개혁정치를 통해 농민층의 지지를 얻으려는 신진사류의 의도가 숨어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고려 말 신진사류는 지방의 중소지주 출신이라는 입장에서 일반 백성의 민생(民生) 문제에 보다 큰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해 새로운 학문과 지식의 수용을 추구함으로써, 새로운 역사를 주도하는 계층으로서 확고히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 다음 호에는 한국유학 16번째 이야기로, '고려 불교의 성쇠와 배불론의 대두'가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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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한 2021-06-03 12:32:58
십수억명의 동아시아 세계종교 유교신자.

윤진한 2021-06-03 12:32:21
하며, 수천년 유교를 구심점으로 삼으면서, 개혁할게 있다면 해야하겠지요. 동아시아 유교국가들(중국,한국,베트남,몽고)은 수천년 전통의 유교와, 유교대학(태학.국자감.중국 국자감에서 이어진 베이징대)을 중심으로 漢字의 영향을 받으며 하느님(天)과 神明, 공자님을 숭배해 왔습니다. 한국은 고구려 태학.백제 오경박사, 통일신라 국학, 고려 국자감, 조선 성균관(해방후에 성균관대로 정통승계)이 있었고, 베트남은 국자감이 있었습니다. 베트남 화폐에 국자감이 새겨진건, 한국화폐의 유교적 표상인 세종대왕, 퇴계 이황, 율곡 이이, 신사임당, 거북선처럼 오랜 유교문화 영향입니다. 몽고는 차강사르라는 음력설에 24절기 유교문화가 수천년 유교문화의 전통을 나타냅니다. 2차대전후의 신생 싱가포르와 대만도 유교문화권입니다.십수억

윤진한 2021-06-03 12:31:42
동아시아 지역(중국,한국,베트남,몽고지역)에 세계종교 유교가 성립되어 지금까지 전승. 이와 함께 한국 유교도 살펴봄.

한국 국사는 고려는 치국의 도 유교, 수신의 도 불교라고 가르침. 고려시대는 유교 최고대학 국자감을 중심으로, 고구려 태학, 백제 오경박사, 통일신라 국학의 유교교육을 실시함. 유교사관 삼국사기가 정사(正史)이던 나라.
http://blog.daum.net/macmaca/3057

역사적 순서로 보면 황하문명에서 은.주시대의 시원유교[始原유교:공자님 이전 하느님(天)과 여러 神明을 숭배]에서, 한국 고조선의 기자조선으로 始原유교유입, 기자조선(始原유교) 마지막왕 기준의 후손이 삼한건설, 삼한(始原유교)의 영토에서 백제(마한).가야(변한).신라(진한)가 성립됨.

@ 역사와 전통을 승계하며,

윤진한 2021-06-03 12:30:45
한국은 세계사의 정설로,한나라때 동아시아(중국,한국,베트남,몽고)에 성립된 세계종교 유교국으로 수천년 이어진 나라임. 불교는 고구려 소수림왕때 외래종교 형태로 단순 포교되어, 줄곧 정규교육기관도 없이, 주변부 일부 신앙으로 이어지며 유교 밑에서 도교.불교가 혼합되어 이어짐. 단군신화는 고려 후기 중 일연이 국가에서 편찬한 정사인 삼국사기(유교사관)를 모방하여, 개인적으로 불교설화 형식으로 창작한 야사라는게 정설입니다.

​유교,공자.은,주시대始原유교때 하느님.조상신숭배.세계사로보면 한나라때 공자님도제사,동아시아(중국,한국,베트남,몽고지역)에 세계종교 유교성립,수천년전승.한국은殷후손 기자조선 기준왕의 서씨,한씨사용,三韓유교祭天의식. 국사에서 고려는 치국의道유교,수신의道불교.

세계사로 보면 한나라때 동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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