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하 김형만의 한국유학 이야기 18] 고려 후기의 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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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하 김형만의 한국유학 이야기 18] 고려 후기의 유학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21.07.02 09:15
  •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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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정권 쇠퇴기 이후 퇴락한 불교 대안으로 고려 성리학 대두
이색·정몽주·정도전·윤택·김초·권근 등 유학 필요 역설 보급 앞장

[목포시민신문] 고려시대 유학계의 학풍(學風)은 한당류(漢唐流)와 송학류(宋學流)의 학풍으로 구분할 수 있다. 즉 고려의 초 중엽은 한당류의 학풍이 행하여지고 그 말엽은 송학류의 학풍이 행하여진 것이다. 그리하여 고려의 초 중엽에는 유자들이 한편으로는 훈고를 중심으로 한 통경명사(通經明史)의 학문에 힘써서 성현의 교훈과 치란(治亂)의 역사를 알아 치국안민(治國安民)의 바탕으로 삼으며, 또 한편으로는 시문(詩文)의 연마를 주안으로 하는 문장의 학문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또한 성리학(주자학)이 수용되기 이전에 한국 유학사상은 삼국시대 이래로 오경(五經)을 중심으로 한 한·당 시대의 학풍이 지배적이었지만, 주자학에 있어서는 오경보다도 사서(四書)를 중심으로 그 이론을 전개하였다. 즉 종래와 같은 요순·주공·공자의 경사(經史)를 중심으로 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사서의 연구가 수행되었다. 사대부들의 이러한 주자학적 학문 경향은 원시 실천 경세(經世)유학에서 점차 공소(空疏)한 이론 사변(思辨)유학으로 나아가는 발단이 되었고, 여기에 사장(詞章)을 중시하는 풍조가 더해지며, 훗날 나라의 원기(元氣)인 선비는 문약(文弱)으로 흐르고, 국세(國勢) 또한 날로 쇠미(衰微)해지며, 민생(民生)을 도탄에 빠뜨리고 구학(溝壑)에 밀어 넣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이었다.

고려의 지식인들이 신앙은 불교를, 정치는 유교를 숭상하여, 유자나 승려는 모두 양쪽을 겸하였으므로 서로 반목하는 바가 없었다. 최충을 해동공자라 일컬었지만, 불교 고승들의 비문을 찬한 일도 있으며, 김부식을 완고한 유학자로 여기지만 그가 지은 원효의 화상찬이나 대각국사비 같은 것은 너무나 유명하다. 그러나 이때부터는 주자학과 불교가 근본적으로 대립하는 형세가 되었다.

고려 유학의 전체적인 흐름은 자주적이며 유··노장(儒佛老莊)의 절충성이 강렬하였는데, 그것이 또 고려 유학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러나 성리학을 수용함으로써 불교와 노장을 이단으로 공박하는 경향이 나타나 유·불의 이념투쟁기로 접어들게 된 것이다.

주자학이 전래되기 이전의 고려 사회를 초기와 중기로 나누어 각 시대의 유교와 문교에 대한 성쇠를 살펴본다면, 초기는 태조 이래 성종을 거쳐 예종·인종에 이르기까지 숭유정책으로 문교가 진흥되고 유학이 발전되었으나, 중기 이후 무신 집권기부터는 암흑기라 할 정도로 유학이 침체되었던 것이다.

고려사를 보면, 의종 말년에 무인(武人)의 변이 갑자기 일어나 옥과 돌이 함께 탔으므로(玉石俱焚), 겨우 몸을 빼어 산중으로 들어간 자는 승복을 입고 여생을 마치었다. 그 뒤 국가에서 점차 문교를 회복하여 선비들이 배우려는 뜻이 있으나 배울 곳이 없어 승려의 의복을 입은 자를 찾아가 배웠다고 하였으니, 당시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고종 때부터는 몽고와의 항전이 시작되어 국토가 유린당함이 말할 수 없을 정도였으며, 이어서 원나라와 연합하여 일본을 정벌한 일이나, 원나라의 지나친 조공 요구 등으로 나라는 경제면에서 피폐함을 면치 못하였다. 고려 중기 이후 내우외환이 거듭되어 인종 때의 이자겸·묘청의 난 및 금나라에의 복종, 의종 때 무신 정중부의 난, 명종 때 망이·김사미의 난, 고종 때의 거란·왜구·몽고의 침입, 원종 때의 삼별초의 난 등 악순환의 연속이었으므로 자연히 문화 전반이 침체를 면치 못하였다.

한편, 고려 후기 불교의 사회적 영향을 고찰해보면, 사회적 공헌으로서는 구호사업과 승병을 들 수 있고, 문화적 공헌으로는 대장경 조판과 승려의 학문적 기여를 들 수 있다. 그러나 불교의 융성은 시대적 변천을 겪으면서 부패하고 타락한 면을 보이게 되었으니, 그 대표적인 것이 보()를 통한 영리사업과 권력과 연관된 사회적 비행, 그리고 왕실의 지나친 불공 행사로 인한 재정의 탕진 등이었다. 또 고려 중기부터는 밀교·풍수·도참 등이 성행하고, 또 그것이 저속한 미신적 행사에 관련되어 풍속을 어지럽혔다. 더욱이 불교 신자 중에는 한편으로 무속을 신봉하는 자가 많았으니, 묘청에 있어서도 그러한 신비적 요소가 있었으며, 신돈은 그 대표적 예이다. 이와 같이 고려 사회는 중엽 이후로 내외적인 여러 요인으로 유학이 쇠퇴하고, ··도 삼교를 겸한 이규보·최자 등으로 대표되는 문사들 또한 나타나게 되었다.

충렬왕 6년에 왕이 말하기를, 오의 유자는 다만 과거(科擧)의 문장만 배우고 경사(經史)에 박통한 자가 없으니, 일경일사(一經一史) 이상 통한 자로 하여금 국자생(國子生)을 가르치게 하라고 한 것으로 보아 당시의 사정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왕은 그해 7월에 7인의 경사교수를 임명하여 생도를 가르치게 하고, 22년에는 경사교수도감을 설치하여 7품 이하의 관원으로 하여금 경학과 사학을 배우게 하였다.

또 왕 30년에는 원나라 야율희일의 권고에 따라 대성전(孔子廟)을 개축하고, 안향의 건의로 섬학전을 설치하였다. 이로부터 문교는 진흥되기 시작하여 공민왕 원년에는 서울의 동·서 학당을 개수하고, 16년에는 성균관을 개영하는 한편, 이색을 대사성에 임명하고, 김용구·정몽주·박의중·이숭인 등을 교관으로 두어 학생을 가르쳤다. 이때 성균관을 중심으로 당시 전래된 주자학이 강론되어짐에 따라 학풍 자체도 종래의 문학 중심에서 경사(經史)의 이론 중심으로 변하여 갔다. 이색은 학제를 고쳐, 오경·사서재를 설치하고, 일경일재(一經一齋) 식의 학습 방법을 채택하니 유학은 더욱 발전되고, 성균관을 중심으로 불교 배척이 맹렬히 전개되었다.

우리나라에 유학이 수용된 것은 불교의 수입보다도 먼저였으나, 삼국의 말엽과 통일 이후의 신라와 고려 일대를 통하여 불교에 매양 사상계의 패권을 장악당하여 별로 기세를 펴지 못하고 항상 불교의 말미에 추종하는 태세를 보일 뿐이었다.

그리하여 비록 고려 태조의 유훈에, ‘나라를 다스리고 집안을 거느리는 사람은 스스로 경건하게 자숙하고 삼가야 후환을 없앨 수 있다. 폭넓게 경전과 역사서를 읽고 옛일을 거울삼아 오늘을 경계하라. 주공은 위대한 성인이시다. 그는 무일편을 지어 (게으르지 말고 안일에 빠지지 말라) 성왕을 훈계하였다. 나의 자손들도 마땅히 그것을 써 붙이고 출입할 때마다 쳐다보며 성찰할지어다.’ 라 한 것이 있고, 또 고려조의 역대 왕들 중에 간혹 유학을 장려하는 이가 있어서 광종은 과거제도를 실시하였으며, 성종은 주공 공자의 학문을 흥기시키라는 교령을 발포하고 또 국자감을 창립하였으며, 문종은 경전을 간행하여 문교를 장려하고, 예종은 국학에 양현고를 두며, 인종은 노장의 학문을 금하고, 또 효경·논어를 여항의 어린아이들에게 나누어준 것과 같은 것이 있었으나, 이것은 대개 불교를 장려하는 여가에 취미로 조금씩 색채를 더한 것임에 불과하였다. 그것은 12년의 세월을 허비하여 2,800칸의 장려(壯麗)를 가진 흥왕사가 소위 문교를 장려하였다는 문종 시대에 조성된 것만을 보아도 가히 그 실정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학계에는 홍유석학(弘孺碩學)이 굴기하지 못하고 간혹 호학유지(好學有志)의 선비가 출현하였다가도 그 후 유업을 계승하는 후배고족(後輩高足)이 없어서 항상 사상의 중축과 주류는 한결같이 불씨 일종의 문역을 떠나지 못하였었다.

그리하다가 고려 말엽에 이르러 불교가 점점 쇠퇴하여, 불교계 안에서 이것을 만회 광구하여 일으킬 운동과 인물이 없고, 밖으로 시대의 강하함에 따라 한갓 국민의 신뢰와 존경을 상실하게 되자, 이 기회를 타서 유학은 불교에 대신하여 점차로 그 세력을 펴고 머리를 들어 사상계의 왕좌를 향하여 일보일보 전진의 걸음을 걷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유학은 마치 주먹돌에 눌렸던 풀싹이 압력의 제거를 얻자 왕성한 세력으로 상공을 향하여 뻗어 올라가는 것과 같은 형세로 날로 더욱 자라고 또 발전하였다. 그리하여 이색·정몽주·정도전·윤택·김초·권근 등이 소리를 가지런히 하여 유학 존숭의 필요를 역설하고 또 유학의 선전 보급에 전력을 다하였다.

/다음 호에는 한국유학 19번째 이야기로, '성리학의 수용과 그 특성'이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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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한 2021-07-03 21:08:35
하나인 한국이 불교Monkey 일본의 강점기를 겪으며 대중언론등에서 유교가 많이 왜곡되고 있음.
http://blog.daum.net/macmaca/3131

​유교나 가톨릭은 하느님이 창조하신 인간이 가장 중요할뿐, 사람이 동물로 윤회하거나 하는것을 인정치 않습니다. 전생이나 내세도 없습니다. 다만 유교는 사람이 죽으면 혼이 하늘로 승천하고, 현세에서 죄를 지었으면 그에 맞게 처우됩니다. 그게 타종교에서 말하는 천당개념이겠지요.

윤진한 2021-07-03 21:08:00
파생된 유교의 지류.

역사적 순서로 보면 황하문명에서 은.주시대의 시원유교[始原유교:공자님 이전 하느님(天)과 여러 神明을 숭배]에서, 한국 고조선의 기자조선으로 始原유교유입, 기자조선(始原유교) 마지막왕 기준의 후손이 삼한건설, 삼한(始原유교)의 영토에서 백제(마한).가야(변한).신라(진한)가 성립됨.
@인도에서 불교도는,불가촉賤民.조계종승려賤民한국과비슷.강점기 하느님에 덤비며(창조신내리까는 부처처럼)유교부정,불교Monkey일본.하느님보다높다는 성씨없는 일본점쇠賤民.후발천황(점쇠가 돌쇠賤民.불교Monkey서울대 전신 경성제대설립)옹립.한국은 세계종교유교국.수천년 유교,하느님,조상신,공자 숭배.해방후 조선성명복구령 전국민이 행정법.관습법상 유교국복귀. 동아시아(중국,한국,베트남,몽고) 세계종교국중 하나인

윤진한 2021-07-03 21:06:47
숭배.세계사로보면 한나라때 공자님도제사,동아시아(중국,한국,베트남,몽고지역)에 세계종교 유교성립,수천년전승.한국은殷후손 기자조선 기준왕의 서씨,한씨사용,三韓유교祭天의식. 국사에서 고려는 치국의道유교,수신의道불교.세계사로 보면 한나라때 동아시아 지역(중국,한국,베트남,몽고지역)에 세계종교 유교가 성립되어 지금까지 전승. 이와 함께 한국 유교도 살펴봄.

한국 국사는 고려는 치국의 도 유교, 수신의 도 불교라고 가르침. 고려시대는 유교 최고대학 국자감을 중심으로, 고구려 태학, 백제 오경박사, 통일신라 국학의 유교교육을 실시함. 유교사관 삼국사기가 정사(正史)이던 나라.http://blog.daum.net/macmaca/3057

@무속은 은.주시대 始原유교의 하늘숭배,산천숭배,조상숭배, 주역(점)등에서 파생된

윤진한 2021-07-03 21:05:33
자격,학벌없이 대중언론항거해온 패전국奴隸.賤民불교Monkey서울대.주권,자격,학벌없는 서울대.추종세력 지속청산!
http://blog.daum.net/macmaca/733
http://blog.daum.net/macmaca/2967

@한국은 세계사의 정설로,한나라때 동아시아(중국,한국,베트남,몽고)에 성립된 세계종교 유교국으로 수천년 이어진 나라임. 불교는 고구려 소수림왕때 외래종교 형태로 단순 포교되어, 줄곧 정규교육기관도 없이, 주변부 일부 신앙으로 이어지며 유교 밑에서 도교.불교가 혼합되어 이어짐. 단군신화는 고려 후기 중 일연이 국가에서 편찬한 정사인 삼국사기(유교사관)를 모방하여, 개인적으로 불교설화 형식으로 창작한 야사라는게 정설입니다.

유교,공자.은,주시대始原유교때 하느님.조상신숭배.

윤진한 2021-07-03 21:04:24
한국 유교 최고 제사장은 고종황제 후손인 황사손(이 원)임. 불교 Monkey 일본 항복후, 현재는 5,000만 유교도의 여러 단체가 있는데 최고 교육기구는 성균관대이며,문중별 종친회가 있고, 성균관도 석전제사로 유교의 부분집합중 하나임. @일제강점기 강제포교된 일본 신도(불교), 불교, 기독교는 주권없음. 강점기에 피어난 신흥종교인 원불교등도 주권없음.

주권없는 패전국잔재 奴隸.賤民이자, 하느님.창조신을 부정하는 Chimpanzee계열 불교일본서울대Monkey와 추종세력들.@@ Royal성균관대(조선.대한제국 유일무이 최고교육기관 성균관승계,한국 最古.最高대).Royal서강대(세계사반영,교황윤허,성대다음예우)는 일류,명문.주권,자격,학벌없이 대중언론항거해온 패전국奴隸.賤民불교Monkey서울대.주권,자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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