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하 김형만의 한국 유학이야기 24]사림세력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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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하 김형만의 한국 유학이야기 24]사림세력의 등장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21.08.29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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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건국 주역 훈구파 폐쇄적 권력과 특혜로 부패
개혁 부르짖는 사림파 등장과 피로 물든 권력 투쟁

[목포시민신문] 조선왕조의 초기에 정치·경제·사회·문화를 지배해온 것은 양반사대부였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특히 훈구세력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 실질적으로 조선의 사회를 움직여왔다.

훈구세력은 이성계를 도와 건국에 공로가 큰 정도전·조준 등을 비롯해서, 역대의 제왕을 보좌하여 조선의 제도를 정비하는 데 참여한 인물들이었다. 세종 때의 집현전 학자들도 크게 보면 여기에 포함시킬 수도 있겠다. 그러나 세조에 의하여 성삼문 등 사육신(死六臣)을 비롯한 많은 학자가 죽임을 당한 뒤에는, 세조를 도와 그를 왕위에 추대한 인물들, 정인지·최항·양성지·신숙주·서거정 등이 주로 훈구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들은 높은 관직을 차지하고, 많은 토지와 노비를 소유한 집권세력이었다. 이들은 또 실용적인 학문에 능하여 많은 관찬사업에 참여한 관학자였다. 그리고 이들은 대개 기내(畿內)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으므로 근기파(近畿派)라 불러도 좋은 그러한 세력이었다.

이 훈구세력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인물들도 있었다. 우선 세조의 찬탈을 불의의 행위로 단정하고,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의리에 따라 두문(杜門) 혹은 방랑으로 일생을 보낸 사람들이 그러하다. 김시습을 비롯한 생육신(生六臣)은 그 대표적인 존재였다. 그런가 하면 세상을 비웃고 청담을 즐기는 일파가 있었다. 이러한 비판 세력이 그들의 주변에 있기는 하였지만, 훈구세력은 확고한 정치적 지위를 누리고 있었으며, 또 많은 농장을 차지하여 경제적 뒷받침을 얻고 있었다. 그들은 국가로부터 우선 과전을 받은 데다가 또 허다한 공신전을 받았다. 농장의 확대는 한편으로는 국가의 공적인 수입을 줄이고, 한편으로는 농민의 생활을 곤궁하게 하였다. 또 공납의 방납제도, 군역의 요역화, 환곡제도의 고리대화 등으로 농민생활은 지극히 불안정하게 되었다. 많은 농민이 유민(流民)이 되어 농촌은 황폐해 갔으며, 각지에는 도적의 무리가 횡행하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명종 14(1559)에서 17(1562)까지 황해도 일대를 무대로 활약하던 임꺽정은 그 대표적인 것이었다.

조선조에 있어서 사림(士林)의 사회적 참여와 활동이 성행하였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특히 조선조 전기 국초로부터 명종 말에 이르는 시기는 사림의 사회적 참여와 그 좌절이 되풀이되던 시기였다. 그 당시 사림이라면 본래 지방에 근거지를 가지고 있는 중소지주 출신의 지식인으로, 중앙의 정계에 진출하기보다는 지방에서 유향소나 향청을 통하여 영향력을 행사해오던 세력이었다. 이들은 성리학을 사상의 기반으로 삼고 유교 경전을 중시했으며, 의리와 명분을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이른바 사림의 유자(儒者)라면 첫째 말과 몸가짐을 삼가 단정히 할 것이며, 더 나아가 뜻을 굳게 하여 지조를 지키고 의()를 태산과 같이 중히 여기어, 의가 아니면 천금을 주어도 받지 아니하고, 목숨을 걸고 불의에 항거하는 등, 청렴결백과 절의(節義)를 중히 여기는 진정한 선비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자기 자신만을 깨끗이 닦고 지키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독선기신(獨善其身)’은 진정한 사림이라고 할 수 없으며, 반드시 겸선천하(兼善天下’)하여야만 하는 것이다. 겸선은 즉 남을 교화하여 선을 같이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유교의 수기안인(修己安人)을 궁행(躬行) 실천하는 이를 진정한 사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국가에서도 정책상 사림을 크게 장려 육성하고 사기(士氣)를 국가의 원기(元氣)라 하여 그것을 될수록 좌절시키지 않는 것을 주의로 삼았다.

사림이 중앙의 정치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성종 때였다. 성종은 세조 때부터 중요 관직을 독차지하고 있던 훈구파 공신들을 견제하기 위해 사림을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 등 삼사의 관리로 등용했다. 당시 사림파의 중심인물은 김종직으로, 길재의 학통을 이은 인물이었다. 이후 사림파와 훈구파는 치열한 경쟁을 벌이며 훈구파의 공격으로 여러 차례 사화를 겪었다. 연산군 때의 무오사화와 갑자사화, 중종 때의 기묘사화, 명종 때의 을사사화 등 대규모 사화만 네 차례나 있었다.

첫 사화는 연산군 4(1498)에 있은 무오사화(戊午史禍)였다. 이를 특히 사화(史禍)라고 적는 것은 그것이 사초에 기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김종직의 제자인 김일손은 사관으로 있으면서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을 사초에 올렸었다. 김종직이 단종을 항우에게 죽임을 당한 의제에 비기어 그 죽음을 슬퍼하고 세조의 찬탈을 비난한 것이 조의제문이었다. 연산군 초에 성종실록의 편찬을 위한 사국(史局)을 열었을 때 위의 사초가 발견되자 훈구세력은 연산군을 충동시켜 김일손 등의 사림학자를 혹은 죽이고 혹은 귀양 보내었다. 이 결과로 사림의 세력은 크게 꺾이게 되었다.

그 뒤 연산군은 사치와 향락에 취해서 그로 인하여 재정의 낭비가 많았다. 연산군은 재정이 곤란하게 되자 훈구공신들의 토지와 노비를 몰수하려고까지 하였다. 훈구세력이 왕의 이러한 행동을 억제하려고 한 것은 물론이다. 연산군은 그들의 간섭을 억압할 기회를 노리게 되었다. 이때 궁중과 깊은 인연을 가진 무리가 연산군의 생모 윤씨의 폐출사사사건을 들추어서 그를 충동하여 훈구 및 사림의 잔존세력을 혹은 죽이고 혹은 귀양 보내었다. 이것이 연산군 10(1504)의 갑자사화였다.

서화가 항산 장근헌의 무인도.

그 뒤 방탕한 생활이 도를 지나친 연산군은 쫓겨나고 중종이 즉위하였는데, 중종은 연산군과는 달리 자기의 전제적인 힘을 억제하고 유학자들의 의견을 존중할 줄 아는 임금이었다. 사림의 소장학자 조광조가 등용된 것은 이러한 중종에 의해서였다. 조광조는 유교적인 도덕국가의 건설을 그의 정치적 목표로 삼고 있었다. 그는 유교적인 미풍양속에 어긋나는 미신을 타파하고, 권선징악과 상호부조를 그 정신으로 하는 향약을 실시하여 유교적 도덕을 향촌에 확립시키려 하였다. 그는 또 여러 가지 서적을 번역 인쇄하여 일반 국민이 유교적인 교양을 갖도록 노력하였다. 그리고 내외 요직자로 하여금 덕행이 있는 인물을 천거케 하여 그들을 왕이 친시(親試)로써 채용하는 현량과를 설치케 하였다. 그 결과로 사림이 많이 등용되게 되었다. 이렇게 그의 세력이 커지자 자연 훈구세력의 미움을 받게 되었으며, 이러한 훈구세력의 반발은 위훈삭제사건을 계기로 폭발하게 되었다. 위훈삭제란 중종반정 공신 중에서 람수자(濫受者) 76명의 훈을 깎는 것이었다. 이에 분격한 훈구세력은 모략으로 왕을 움직여서 조광조 일파를 제거했던 것이다. 이것이 기묘사화이며(중종14, 1519), 이로 인하여 사림세력은 또 한 번 크게 꺾이었다.

그 뒤 중종의 배다른 두 아들의 왕위 계승을 에워싼 싸움의 결과로 일어난 것이 을사사화였다. 인종과 명종의 계승 문제는 그들 외척의 대립으로 나타났고, 이 양자에는 당시의 양반관리들이 또한 부화하여 파를 이루었다. 인종이 먼저 즉위하였다가 곧 돌아간 뒤를 이어 명종이 즉위하면서 집권한 그의 외척 세력이 반대파를 처치한 것이 곧 명종 즉위년(1545)의 을사사화인 것이다.

위에서 설명한 네 번 사화는 그 경우가 모두 달랐다. 그러나 사림세력이 중앙의 정치 무대에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빚어진 훈구세력과의 대립 투쟁이 그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들은 몇 차례의 사화에 의해 타격을 받으면서도 꾸준히 그 세력을 키워 16세기 이후 사상계를 주도함으로써 조선 유학의 주류를 이루었으며, 점점 정치의 주도권을 잡아가고 있었다.

16세기의 사림은 정치적으로 훈신·척신 계열과 대립하는 관계 속에서 하나의 정치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다. 사화로 인해 세력을 잃고 재야로 쫓겨났던 이들 사림은 선조 때에 이르러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권력을 장악하였다. 이후 사림 사회는 학연에 따라 여러 정파로 나뉘는 변화를 일으켰다.

사림의 진출이나 사화의 발생, 이후 정파의 분열에 따른 당쟁 또한 그 저변의 실상은 결국 관직을 차지하기 위한 세력다툼에서 기인한 것에 불과할 뿐, 이로부터 유교 입국의 국시나 수기이안백성(修己而安百姓)이라는 경세(經世) 실천유학의 실학정신은 이미 내팽개쳐졌으며, 공소한 이론적 사변유학을 탐구하는 것을 학자의 일로 알고, 학문마저 당쟁의 도구로 전락하였으니, 무고한 백성들만 어육이 되었던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 할 것이다.

/다음호에는 한국유학 25번째 이야기로, '지치주의 실천유학'이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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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한 2021-08-30 03:11:21
치국의 도 유교, 수신의 도 불교라고 가르침. 고려시대는 유교 최고대학 국자감을 중심으로, 고구려 태학, 백제 오경박사, 통일신라 국학의 유교교육을 실시함. 유교사관 삼국사기가 정사(正史)이던 나라.
http://blog.daum.net/macmaca/3057
@무속은 은.주시대 始原유교의 하늘숭배,산천숭배,조상숭배, 주역(점)등에서 파생된 유교의 지류.

역사적 순서로 보면 황하문명에서 은.주시대의 시원유교[始原유교:공자님 이전 하느님(天)과 여러 神明을 숭배]에서, 한국 고조선의 기자조선으로 始原유교유입, 기자조선(始原유교) 마지막왕 기준의 후손이 삼한건설, 삼한(始原유교)의 영토에서 백제(마한).가야(변한).신라(진한)가 성립됨.@한국 유교 최고 제사장은 고종황제 후손인 황사손(이 원)임.

윤진한 2021-08-30 03:10:16
소수림왕때 외래종교 형태로 단순 포교되어, 줄곧 정규교육기관도 없이, 주변부 일부 신앙으로 이어지며 유교 밑에서 도교.불교가 혼합되어 이어짐. 단군신화는 고려 후기 중 일연이 국가에서 편찬한 정사인 삼국사기(유교사관)를 모방하여, 개인적으로 불교설화 형식으로 창작한 야사라는게 정설입니다.

​유교,공자.은,주시대始原유교때 하느님.조상신숭배.세계사로보면 한나라때 공자님도제사,동아시아(중국,한국,베트남,몽고지역)에 세계종교 유교성립,수천년전승.한국은殷후손 기자조선 기준왕의 서씨,한씨사용,三韓유교祭天의식. 국사에서 고려는 치국의道유교,수신의道불교.세계사로 보면 한나라때 동아시아 지역(중국,한국,베트남,몽고지역)에 세계종교 유교가 성립되어 지금까지 전승. 이와 함께 한국 유교도 살펴봄.

한국 국사는 고려는 치국

윤진한 2021-08-30 03:09:23
있습니다. 이런 전통적인 신명 섬기기에 대해서, 공자님도 오래된 관습으로, 논어 "향당(鄕黨)"편에서, 관습을 존중하는 예를 표하셨습니다. 신명(神明:천지의 신령)모시기 전통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조상을 섬기는 제사는 유교가 공식적이고, 유교 경전에 그 절차와 예법이 서술되어 있습니다. 유교경전 예기에는 상고시대 조상신의 위치에서 그 혼이 하늘로 승천하시어 인간을 창조하신 최고신이신 하느님[天(하느님, 하늘(하느님)]하위신의 형태로 계절을 주관하시는 五帝가 계십니다. 유교는 하느님(天), 五帝, 地神, 山川神, 부엌신(火관련)숭배등 수천년 다신교 전통이 있어왔습니다. @한국은 세계사의 정설로,한나라때 동아시아(중국,한국,베트남,몽고)에 성립된 세계종교 유교국으로 수천년 이어진 나라임. 불교는 고구려 소

윤진한 2021-08-30 03:08:23
@동아시아는 수천년 유교사회입니다. 공자님 이전의 始原유교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예수님 이전의 구약성서 시대에 해당됩니다. 하느님(天).神明,조상신 숭배가 유교의 큰 뿌리입니다. 유교는 국교로, 주변부 사상으로는 도가나, 음양가, 묵가사상등이 형성되었고, 법가사상은 이와는 다른 현실적인 사상이며, 국가의 통치에 필요한 방법이었습니다(진나라때 강성하고, 유교나 도교와 달리, 한나라때 율령이 반포되어 이후 동아시아에 유교와 별도의 성격으로 국가통치에 활용됨).@일부 지역에서 굿이나 푸닥거리라는 명칭으로 신령숭배 전통이 나타나도, 이를 무속신앙이라 하지는 마십시오. 불교라고도 하지 마십시오. 유교 경전 논어 팔일(八佾)에서는 공자님이전부터 섬겨온 아랫목 신(안방신), 부엌신등을 섬기는 전통도 수록하고 있습니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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