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하 김형만의 한국 유학이야기 27]성리학의 융성과 학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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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하 김형만의 한국 유학이야기 27]성리학의 융성과 학풍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21.09.22 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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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담 서경덕, 퇴계 이황, 율곡 이이, 노사 기정진, 한주 이진상, 녹문 임성주 등
무수한 석학·명철 도처서 궐기 성리학 고조시켜

[목포시민신문] 주자학으로 일컬어지는 성리학이 우리나라에 전래한 것은 13세기 말엽 고려 충렬왕 때였다. 신유학인 성리학은 고려 말기에 불교와 유교의 전환이라는 커다란 변동을 가져 왔으며. 유교를 국시(國是)로 하는 조선왕조 입국(立國)의 원동력이 되었다.

고려 말에 성리학은 이색, 정몽주 등에 의해 크게 고양, 계발되었고, 그 학통은 정도전, 권근, 길재 등에 의해 조선의 학계에 이어졌다. 그러나 고려의 멸망과 함께 새 왕조 개창에 참여 여부를 놓고 정도전·권근 계열과 정몽주·길재 계열의 양파로 갈라지게 되었다. 훗날 정도전·권근을 연원으로 하는 훈구파와 정몽주·길재를 사승(師承)으로 하는 사림파가 바로 그것이며, 이들은 각기 학문적 성격을 달리하게 되었다.

훈구파는 성리학을 국가의 지도이념으로 확립시키는 등 새로운 국가 건설의 한 수단으로 활용하였다. 이들은 문물 전장 제도를 정비하고, 경세치용에 힘써 조선 초기 치화(治化)의 성세(盛世)를 이루며, 관학(官學)의 학풍을 형성하였다. 특히 권근은 입학도설·오경천견록등을 저술함으로써 조선 성리학 연구의 방향을 선도하고, 경학을 중시하는 등 조선 유학 전반에 걸쳐 심대한 영향을 끼친 선구자로 평가되고 있다. 한편 사림파는 길재의 학문을 이어받아 영남을 중심으로 형성된 학파로, 성리학에 대한 학문적 깊이보다는 시문을 위주로 하는 재사들이 많았다. 이들은 세조 때 김종직이 출사한 데 이어, 성종 때에 대거 관계에 진출하게 되었으며, 연산군 때에 이르러서는 훈구 세력과의 충돌로 무오·갑자의 양대 사화(士禍)가 일어나서 김종직·김일손 등과 김굉필·정여창 등 수많은 선비가 화를 입고 희생되었다.

중종반정 후에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도학파(道學派) 사류(士類)들은 또다시 국정에 참여하여 일대 개혁운동을 전개하였으나, 기성 특권층의 이해와 충돌하여 기묘사화가 일어났다. 그리고 명종 초에는 을사사화로 인하여 또다시 사류들이 비참하게 희생되었다. 이처럼 무오사화로부터 약 반세기 동안은 사림이 희생되고 고초를 겪는 수난의 시대였다.

성리학의 전성기라 할 16세기는 송대 성리학이 이 땅에 전래한 지 2백여 년이 경과한 시기였다. 이때 한국 유학의 쌍벽이라 할 퇴계 이황(1501~1570)과 율곡 이이(1536~1584)가 탄생하였으며, 화담 서경덕(1489~1546), 회재 이언적(1491~1553), 일재 이항(1499~1579), 하서 김인후(1510~1569), 고봉 기대승(1527~1572), 그리고 우계 성혼(1535~1598) 등이 모두 같은 시대의 인물들이었다. 당시로 말하면 성리학이 수용 연구되어 온 역사적 과정으로 보나, 또한 사류(士類)들이 사회활동 보다는 은둔하여 학문을 연찬할 수밖에 없었던 사회적 여건으로 보나, 성리학이 크게 발달되었던 사실은 매우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인종·명종 때와 선조 때는 성리학 연구의 전성시대로, 조선 리학계의 태두인 화담, 퇴계, 율곡이 차례로 이 시기에 굴기하여 일세를 풍미하던 때이다. 일견 우연한 일 같기도 하나, 그 유래는 자못 이유가 있다. 즉 이렇게 성리학이 융성하게 된 데는 두 가지가 이유가 있으니, 하나는 송학의 영향이요, 다른 하나는 사화의 영향이다.

첫째, 송학은 이론을 주안으로 하므로 종래 한당류의 유학에 비하여 면목을 일신한 것이어서, 전고(典故)나 사장(詞章)에 염증이 났던 학자들에게 커다란 흥미와 유혹을 느끼게 하였다. 둘째, 무오사화에 이어 사화의 당옥(黨獄)이 일어날 때마다 사류(士類)가 거의 멸문의 참화를 당하니, 유림(儒林)이 이로 인하여 원기를 상실하고, 학사(學舍)가 또한 소연(蕭然)하여 부형이 자제에게 조정에 나아가는 것을 금하고, 현철(賢哲)이 또한 함께 멀리 떠나가 산야에 도피하기를 일삼게 되었다. 이리하여 유자들이 실지로 정치, 경제를 연구하여 조정에 서는 것보다, 이론으로 성리의 철학을 배워 산림이나 전원에서 도를 닦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당시 성리학자들의 학풍은 존심양성(存心養性)’궁리진성(窮理盡性)’에 힘써, 안으로 성현을 배우는 법성현(法聖賢)’을 목표로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곧 밖으로 민생(民生)에 절실한 유학 본래의 실천적 경세치용을 외면하고, 이론 사변적 공리공담으로 내달아, 실지로 정치·경제를 연구하여 조정에 서기보다는 산림에 물러나 리기심성(理氣心性)을 논하고 학문으로 문호를 세우며, 전국의 학자가 유업(儒業)을 일삼는 자라면 모두 다 성리의 학을 논하지 않는 자가 없게 되었다. 동서로 한번 붕당이 갈리자 마침내는 패거리 작당으로 이록(利祿)을 다투며 정쟁을 일삼는 가도학자(假道學者)를 양산하여 학문마저 당쟁의 도구로 전락하고 민생은 도탄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였으니, 이러한 폐풍이 민국(民國)에 크나큰 해악이 되었던 것 또한 직시하여야 할 것이다. 맹자는 양생상사(養生喪死살아있는 사람을 부양하고 죽은 이의 장례를 치르는 것)에 서운함이 없게 하는 것이 왕도(王道)의 시작이라 하였거늘, 퇴계 당시에도 임꺽정의 난이 있었던 것이니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종래의 유학은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실천적, 윤리적인 면에 치중되어 있었으나, 성리학에서는 인간 행위의 올바른 준칙으로서 그 원리와 근거를 깊이 묻게 된다. 그러므로 한갓 윤리의 문제에 머물지 않고 철학적 성격을 띠게 되는 것이며, 따라서 매우 이론적이고 논리적인 학문이 된다. 나아가서 성리학자들은 인간의 본성과 우주의 형이상학적 원리를 탐구하였기 때문에, 여기에서 리기(理氣)와 성정(性情)의 문제가 아울러 대두되는 것이다. 퇴계·율곡을 정점으로 하는 전성기의 성리학은 인간성의 문제를 매우 높은 철학적 수준에서 구명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역사적 사회적 현실과 연관성을 가지고 영향을 주었던 것이며, 후세에는 의리사상 및 실학사상으로 전개되는 하나의 계기를 만들었다.

성리학은 일명 리학(理學)이라고도 부르는데, 곧 유교철학을 뜻하는 것이다. 조선 유학은 성리학을 연구 토론하는 과정을 거쳐, 그 발전이 비로소 절정에 달하였다. 이 시기에는 많은 명장·거벽(名匠巨擘)이 앞뒤에서 계승하며, 또 무수한 석학·명철(碩學名哲)이 도처에서 궐기하여 성리학을 고조시켰던 것이다. 따라서 한 영역 내에서 전인(前人)이 일찍이 밝히지 못하였던 곳을 한층 명료하게 발휘한 곳도 있고, 중국의 선유(先儒)가 일찍이 미치지 못한 경계를 비로소 우리 학자들이 개척한 곳도 적지 않다. 그러므로 오늘날 세상 사람들이 조선의 유학을 말할 때는 반드시 성리학을 연상하는 것이 곧 이 까닭이며, 또 이 시기 유학의 업적이야말로 조선 사상이 적지 않게 동양 또는 세계사상사에 공헌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조선 유학의 성리학 계통의 학자 가운데 대가(大家)로 여섯 사람을 꼽는다. 화담 서경덕, 퇴계 이황, 율곡 이이, 노사 기정진, 한주 이진상, 녹문 임성주가 그들이다. 퇴계와 율곡과 한주는 이원론자(二元論者)이나, 화담과 노사와 녹문은 일원론자(一元論者)이다. 그러나 화담과 녹문과 노사는 다 같이 일원론자이면서도, 화담과 녹문은 유기론자(唯氣論者)임에 반하여 노사는 유리론자(唯理論者)이다. 이 육대가(六大家)는 조선 유학 사상사에 있어서 정수요 중추니, 그들의 학문과 사상에는 실로 위대한 것이 있다.

또 한마디 부기할 것은 퇴계 이황의 진퇴(進退)와 사풍(士風)에 관한 일이다. 대개 퇴계는 중종 14(1519)에 일어난 기묘사화를 보고 경계하고 삼가서, 세 번 읍하고 나아가고(三揖而進) 한번 사양하고 물러나(一讓而退), 나아가기에는 겁을 내고 물러가기에는 용감하였던 관계로 당시의 사풍은 그 영향을 받아 크게 변한 것이 있었다. , 퇴계 이전에는 선비가 독서 수업하는 것은 제세안민(濟世安民)을 위하는 것이라 하여, “내가 아니면 그 누가 창생을 구제하리오.” 하는 태도와 기개로, 다투어 조정에 서기를 힘썼으나, 퇴계 이후에는 학자들이 산림에 은둔하여 오직 고답자수(高踏自守)와 독선기신(獨善其身)을 일삼고, 비록 조정에서 부름이 있다 할지라도 쉽게 나아가지 않는 것을 도리어 명예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퇴계의 영향이 크다고 아니할 수 없다. 진실로 학문상으로 보아서는 퇴계의 공헌이 막대하고 또한 우리가 퇴계에게 계유를 받은 것이 많으나, 그러나 정암 조광조 당시의 사류(士類)들에게서 볼 수 있었던 시국을 자임하는 열성과 용기를 퇴계 이후에 다시는 사류들에게서 볼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이것이 퇴계의 소극적 태도와 십분 관련이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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