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하 김형만의 한국 유학이야기 28]당쟁의 발생과 학파의 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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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하 김형만의 한국 유학이야기 28]당쟁의 발생과 학파의 분열
  • 류용철
  • 승인 2021.10.04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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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 학문적 당쟁 초월 못하고 도리어 당쟁에 빠지다

학문 연구에 공평정직 없고, 사물 비판도 광명정대 없으며

당파적 감정과 선입(先入)의 주견(主見)만 보며 생각하게 됨

학리(學理)의 연구도 진리 그것을 위한 것이 아니요 당쟁 위한 것

사리시비(事理是非)의 논쟁도 정의보단 타인 헐뜯고 잔신 위한 것

[목포시민신문] 사림(士林)이 중앙의 정치 무대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면서, 정치에 참여하는 양반의 수는 더욱 증가하여 갔다. 그러나 관직의 수는 일정하여 큰 변화가 없었다. 일정한 관직을 허다한 양반 귀족들이 서로 차지하려고 하면, 자연히 대립 투쟁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이조 전랑 자리를 두고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선 것이 당쟁의 시작이었다.

명종·선조 시대에는 학자들이 많이 나타나 리기(理氣심성(心性)의 학()이 크게 일어났다. 학자들은 리기·심성 문제를 정밀하게 분석하고 깊이 연구하였다. 학설과 견해의 차이로 여러 가지 논쟁이 일어나서 우리나라 학계의 단조로움과 적막함을 깨뜨렸던 이 시기야말로 유학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다.

학명(鶴鳴):시경의 '鶴鳴九皐 聲聞于天ㅡ 학이 후미진 못가에서 울어도 그 울음소리가 하늘에까지 들리네'란 뜻으로 현인 군자는 재야 산림에 깊숙이 숨어 있어도 그 학문과 덕행이 자연히 세상에 알려진다는 것을 비유한 것.

영남에는 퇴계 이황·남명 조식이 있었고, 호남에는 일재 이항·하서 김인후·고봉 기대승·미암 류희춘이 있었으며, 경기에는 소재 노수신·율곡 이이·우계 성혼 등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성리학에 밝았으나 그중에서도 퇴계와 율곡이 가장 뛰어나고 유명하여 조선조 유학계를 대표하는 학자로 손꼽혀, 영남 사람들은 퇴계를 동방의 주부자(朱夫子)’라 칭송하고, 기호 사람들은 율곡을 동방의 대현(大賢)’이라 기리었다. 이 양현(兩賢)은 그 품격이 고결하며 학문이 정밀하고 깊어 동방의 유학을 집대성하였다. 그 뒤 그들의 학통은 끊이지 않고 이어져 그 학풍과 사상이 후세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였다.

당시 사림(士林)들은 그 기상이 너무 높고 언론이 너무 날카로운 경향이 있었다. 또 사류(士類)들 간에는 학파와 문벌의 차이도 있었고, 노소·신구간의 사상의 충돌도 있었다. 선조 8년에 드디어 심의겸과 김효원 양인의 정쟁적 반목이 계기가 되어 사류는 양분되고 말았다. 두 사람의 대립을 조성한 직접 원인은 전랑직을 에워싼 암투에 있었다. 이때 심의겸을 옹호했던 이들은 서인, 김효원을 옹호했던 이들은 동인이 되었는데, 서인들은 노성(老成)하여 지중(持重)한 이들이 많았고 동인들은 명절(名節)을 숭상하기를 좋아하였다. 양파 간에는 불초자(不肖子)들도 많이 의부(依附)하여 때로는 양쪽을 출입하면서 서로 공격하고 비난함이 매우 심하였다. 이른바 을해당론(乙亥黨論)이 이것이다. 당론의 시초에 그 시비를 분명하게 구별할 수 없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이때 율곡은 선조에게 상소하여 동서 분당의 유래와 조제책(調劑策)을 통론(痛論)하였으나, 당시 사람들은 율곡이 서인을 옹호한다 하여, 율곡을 또한 서인이라고 공격하였다.

원래 동서 분당이 발생하기 약 10년 전에 이준경이 죽음에 임하여 유차(遺箚)를 올려, ‘지금 사람들이 모두 큰 소리로 붕당을 맺고 있으니 이것이 나중에는 반드시 나라의 뽑지 못할 큰 근심이 될 것이라 하여 조정에 붕당의 조짐이 있다는 것을 논하였다. 대개 준경의 뜻은 당시 이이의 무리를 지목해 말한 것이었다. 이때 율곡은 이준경의 말은 세상을 현혹하고 모호하다고 하여, 준경을 반복소인(反覆小人)’이라 하며, ‘조정이 맑고 밝은데 무슨 붕당이 있겠습니까? 대개 사람이 죽을 때에는 그 말이 착하다더니 이제 준경이 죽을 때에는 그 말이 악하군요.’라고 글을 올린 일이 있었다. 이것은 율곡의 총명이 도리어 이준경만 못한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율곡의 총명과 견식으로도 군자 소인의 구별을 엄하게 하는 유학 사상 자체에 붕당의 알력이 필연적으로 따르는 것을 간파하지 못하고, 그 일이 일어남에 이르러 그 폐단을 끊어 없애려고 고심초사(苦心焦思)한 것은 도리어 후인들이 미안하게 생각할 정도였다. 율곡은 매양 피차의 사류들과 화합하여 국사를 함께하고자 상하로 힘써 변론하였으나 결국 허다한 비방만을 받고 말았다.

그러나 당시 사류들의 당쟁은 오직 필설(筆舌)을 무기로 하여 이해에 따라 인신공격만을 능사로 하였으므로 그 승패가 전일의 사화같이 참혹하지는 않았다.

그 후에 당파의 분열은 더욱 심각하고 복잡해졌으니, 동인은 나뉘어 남인과 북인이 되고, 북인 가운데 또 대북·소북이 나뉘고, 대북은 다시 중북·육북·골북의 삼당으로, 소북은 둘로 나뉘어 청소북·탁소북이 되었다. 서인은 인조 때에 청서·훈서·노서·소서로 나뉘었다가 얼마 뒤에 다시 합하였다. 숙종대에 이르러 서인은 다시 노론·소론으로 나뉘었고, 남인은 청남·탁남으로 나뉘어, 결국 수백년래로 치유할 수 없는 고질이 되고 말았다.

이 당쟁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고정된 당인(黨人)을 가진 붕당 사이의 싸움이었다는 데에 있다. 당인은 자손 대대로 소속 당파를 세습하였으며, 그의 동족들이 이에 가담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지방에서 가지고 있는 농장이 그들의 경제적 뒷받침을 해주었다. 이러한 당쟁은 한 번의 사건이나 승부로써 결말이 지어질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비록 한때 패배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향촌의 농장에 근거를 둔 그의 자손이 어느 시기에 다시 중앙의 무대에 등장하여 조상을 위한 설원(雪冤)을 하곤 하였다. 그러므로 당쟁은 다만 중앙관리들만의 대립 투쟁이 아니라 전국의 모든 사림의 대립 투쟁이었던 것이다.

당쟁이 격심하여지면서 서원(書院)도 단순한 학문의 도량이 아니라 붕당의 근거지가 되었다. 동족의 자제를 모아 교육함으로써 맺어진 사제(師弟)의 사이란 혈연에 의하여 맺어진 부자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을 속박하는 중요한 제약이 되었다. 스승의 설은 비록 그릇된 것이라 하더라도 제자가 이를 반대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동문계(同門契) 등을 통하여 동학(同學)의 의()를 두텁게 할 뿐만 아니라, 당쟁에 있어서나 출세에 있어서도 모두 시비를 초월해서 결합하였던 것이다.

이제 학파와의 관계를 살펴보면, 동인들은 대부분 퇴계와 남명 계통의 인물들이 그 중견이 되었고, 서인과 그 자제들은 거개가 우계와 율곡의 교우 및 문인들이었다. 퇴계와 율곡은 출신지가 본래 다를 뿐 아니라 학풍과 학설도 다소 차이가 있었다. 게다가 분당(分黨) 이래로 문인들의 당색도 서로 달라져서, 당쟁의 진전에 따라 두 학파도 영구히 각립(角立)하게 되었다. 즉 퇴계의 학문은 영남의 남인 계통 학자들이 받들었고, 율곡의 학문은 기호의 서인 계통 학자들이 그를 좇아, 서로 상대방의 학설을 비난하였다. 이러한 당인들 가운데는 순전한 당색의 감정으로 상대 학설을 비난하여 태도가 매우 불미하였으니, 그 폐해도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당쟁이 격심하던 이 시대의 당인들은 모두 독서하는 선비로서 절의를 중히 여기고 명분을 숭상하였다. 또 대부분 국가의 후은(厚恩)를 받았으므로 임진왜란과 같은 판탕(板蕩)의 때에 분연히 몸을 돌보지 않고 스스로 국난(國難)에 뛰어들어 혹 공업(功業)으로 혹 절의(節義)로써 자기를 버리고 보국(報國)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당쟁이 비록 정계에서 정치가들 사이에 행하여지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자연히 학계에까지 그 영향이 파급되어, 학자들 사이에도 직접 간접으로 그것과 관련을 가지게 되고, 또 학계에 일어나는 학문상의 모든 문제에도 막대한 영향을 주게 되었다. 그러므로 선조조에 당쟁이 한 번 일어난 후부터는 조정에서 무슨 문제가 한번 발생하면 이것이 곧 산림(山林)에 전달되어 학자들 사이에 여러 가지로 파문을 일으키고, 또 이와 반대로 산림에서 무슨 문제가 한번 발생하면 이것이 곧 조정에 파급되어 또한 복잡다단한 제반 결과를 가져오게 되어, 유학이 당쟁으로부터 초월하지 못하고 도리어 당쟁의 와중에 빠져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학문의 연구에도 공평정직(公平正直)한 것이 없고, 사물의 비판에도 광명정대(光明正大)한 것이 없으며, 모든 것을 당파적 감정과 선입(先入)의 주견(主見)으로 보며 생각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때에는 학리(學理)의 연구도 진리 그것을 위한 것이 아니요, 당쟁을 위해서 하는 것이 되며, 사리시비(事理是非)의 논쟁도 정의를 위해 하는 것이 아니고, 남을 지게 하고 내가 이기기 위한 그것이었다. 그런데 이 경향은 동서 분당 이후로 점차로 고조되어 당쟁이 격심한 숙종·경종 연간에 이르러서는 그 절정에 달하였다.

그 실례를 들어보면, 예송(禮訟)이 그러하고, 윤백호(尹白湖)의 경전(經傳) 주석문제가 그러하고, 회니문제(懷尼問題)가 그러하였다.

한편 현상윤은 조선유학사에서 붕당은 유학사상에 내재한 군자와 소인의 구별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유학사상이 행해지는 시대나 국가에서는 필연적으로 붕당이 있었던 것을 역사적 사실로 보아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 다음 호에는 한국유학 29번째 이야기로,' 임진, 병자의 외환과 의리사상'이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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