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하 김형만의 한국 유학 이야기 29] 임진·병자의 외환과 의리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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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하 김형만의 한국 유학 이야기 29] 임진·병자의 외환과 의리사상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21.10.11 17:34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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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적 국가윤리와 충의사상 민족의식 고양시키는데 기여
의병운동 말기 척사위정운동과 의병운동, 국권상실기의 무장독립투쟁으로 이어져

[목포시민신문] 조선조 중기에 있었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양대 외환(外患)은 민족사적으로 가장 비참하고 치욕스러운 사건이었다.

14세기 말에 조선조가 성립하여 창업 수성의 2백여 년이 지나며, 국운은 다시 기울기 시작하였다. 연산군 때로부터 중종·명종에 이르기까지 50년에 걸쳐 사화가 잇달아 일어나서, 수많은 선비가 살육되고 추방되었으며, 특히 을사사화(1545) 이후에는 윤원형 등 간신들이 국권을 장악하여 정사를 어지럽히고, 가혹한 형벌과 세금으로 백성들을 괴롭히며 사리사욕을 취하기에 급급하였다. 20여년 국사를 전횡하던 윤원형이 내쳐짐으로써 사림이 다시 정계에 복귀하게 되었다. 억압되었던 사림들이 다시 힘을 떨치고, 각종 적폐를 개혁하여 백성들의 피폐한 생활을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그에 상당한 시간과 단합된 힘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10년 뒤인 1575(선조 8)에는 붕당이 생겨서 사대부가 분열하였다.

조선이 이와 같이 국내적으로 진통을 겪고 있는 동안 일본은 豐臣秀吉이 나와 1백년간의 전국시대로부터 전국을 통일하여, 조선을 비롯한 대륙 침략의 야욕을 품고 있었다.

북방의 만주족도 또한 명나라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17세기 초에는 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던 것이다.

일찍이 퇴계는 왜의 사신이 화친을 요청하였을 때 인종에게 올리는 상소(甲辰乞勿絶倭使疏, 1545)에서 나라에서는 이미 북쪽의 오랑캐와 틈이 생겼으니, 어찌 저 섬 오랑캐의 괴수 중 억세고 사나운 자가 있어서 이를 갈며 보복하고자 하여 우리 변방을 침범하지 않을 줄 알겠습니까? 만약 남북의 두 오랑캐가 일시에 함께 일어난다면 동쪽을 지탱하면 서쪽이 흔들리고, ()를 지키면 등()이 무너질 것이오니, 나라에서는 장차 무엇을 믿고 능히 이일을 처리할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라 하였다. 퇴계는 왜에 대해서는 적절히 쓰다듬어 두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화친의 요청을 허락함은 가하지마는 방비를 조금이라도 해이하게 해서는 안 되며, 예로써 대해 주는 것은 가하지만, 칭찬하기를 지나치게 해서는 안 되며, 양곡과 폐백으로 그들의 뜻에 맞도록 하여 실망시키지 않음은 가하지만, 저들의 끝없는 요구를 들어주어 뇌물이 지나치는 것은 안 된다 하였다. 또 왜에 대해서는 함부로 단교하기도 어려운 일이지마는, 지나치게 후대함은 오히려 저들을 방자하게 만들어 우리를 모욕하게 할 수 있는 것이므로 이를 경계하여야 하며, 조선이 왜국을 대하는 문제는, 백 년 사직의 근심과 억만 생령의 목숨에 관계되는 일로써 이 한마디 말을 하지 않고 죽는다면 영원히 한이 되겠기에 말씀을 아뢰는 것이라 하였다.

 

율곡은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묵은 폐단을 시급히 개혁하여 바로잡지 않으면 나라가 부지할 수 없을 것이라 하였다. 율곡은 그의 동호문답에서, ‘지금 백성의 힘은 사경에 든 사람이 숨이 넘어갈 것 같아서 평일에도 유지하기가 어렵거든, 만일 외란(外亂)이 남북에서 일어난다면 질풍이 낙엽을 쓸어버림과 같이 될 것이니, 백성들은 그만두고서라도 종사(宗社)는 어떻게 할 것인가?’ 라 하였고, 선조에게 아뢰는 글 가운데, ‘우리나라가 입국한 지 2백여 년에 달하여 중쇠기가 되었는데, 권간(權姦)들의 혼탁한 영향이 심하여 오늘은 마치 노인과 같이 원기가 없어져서 떨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성상께서 나타나셨으니, 이때야말로 다스려지느냐 망하느냐의 기로에 서있습니다. 만약 이때에 발분 진흥하시면, 이 나라 억만년의 무궁한 행복이 될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장차 멸망함에 이르러 구해낼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라 하였다. 또한, 율곡(栗谷)은 당시에 민중의 질고(疾苦)가 되었던 대표적인 것으로서, 첫째 일가절린(一家切隣), 둘째 진상번중(進上煩重), 셋째 공물방납(貢物防納), 넷째 역사불균(役事不均), 다섯째 서리주구(吏胥誅求)의 폐단을 들고 이를 개혁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사대부의 분열로 나랏일에 총력을 기울이지 못하였으며, 무책임한 집권층 하에서 외침에 대한 방비는 전연 도외시되어 있었다. 그러한 가운데 왜란은 결국 일어나고 말았으며, 나라의 대부분을 휩쓸다시피 하였다. 약탈과 살육으로 나라는 만신창이가 되었다.

선조는 의주로 향하여 피난하였다. 정부의 이러한 무능과 무책임에 일반 국민은 분격하였다. 백성들은 선조와 여러 대신이 서울을 버리고 피난 가는 행로를 막고 소리쳐 욕하기까지 하였다. 두 왕자의 근왕병 모집에 응하는 자도 없었다. 이와 같은 암담한 현상은 백성들을 돌보지 않고 농촌을 황폐케 한 위정자들과 양반사대부의 책임이었다.

그러나 재야의 유림(儒林)은 방방곡곡에서 의병(義兵)이 되어 싸웠으며, 충무공과 같은 위인과 명장이 나와 왜적을 쳐부수었다. 명나라에서도 수많은 군대를 파견하여 7년 동안 계속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참전하였다. 실로 임진왜란은 동양 여러 나라를 격동시킨 대전란이었다.

의병은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 전국적으로 각계각층에서 분기하여 일어났다. 명망 있는 유림을 중심으로 양반·상민·농민을 말할 것 없이 모여들었으며, 승려들도 승병을 조직하여 의병과 연합하였다. 충청도의 조헌, 경상도의 곽재우, 전라도의 고경명과 김천일, 함경도의 정문부 등의 의병장을 비롯하여 수많은 의병이 일어났으며, 승병으로서 서산대사 휴정·사명대사 유정과, 그리고 조헌과 연합하여 싸운 승려 영규 등 의병들의 활동이 매우 활발하였다. 이는 모두 우리 민족이 특유하게 전통적으로 다져온 바, 내 나라와 내 집을 지킨다고 하는 충효사상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유학에서는 인()과 의()를 근본정신으로 하는 것이며, 인은 친자 관계에서, 의는 군신 관계에서 가장 절실하게 나타나는 것이라고 보았다. 하나는 가정을, 그리고 하나는 국가를 두고 일컫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내 집과 내 나라가 모욕을 받고 침해를 받으며, 자주권이 짓밟힐 때 여기에서 의리정신이 강력하게 발휘되는 것이며, 충절과 절의를 낳게 된다.

유송(遊松) 조병연 화백 작 월중한매(月中寒梅).

의병의 지도자는 대학자요, 선비이며, 민중과 호흡을 같이 한 민족의 지도자였다. 그들이 국난을 당하여 솔선하여 전쟁에 참가하였던 것이다.

1597년에 7년간 계속된 왜란은 끝났다. 난이 끝난 후 나라의 참상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 후 30년만인 인조 5(1627)에 정묘호란을, 9년 후인 인조14(1636) 병자호란을 겪었다. 특히 병자호란 때에는 김상헌 등의 척화(斥和)와 최명길 등의 주화(主和)의 갈등이 있었는데, 명분적인 척화론을 고집한 것만을 의리라 추켜세울 수는 없는 것이며, 현실적인 주화론 또한 애민우국(愛民憂國)의 충정에서 비롯한 의리였던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인조는 항복을 결심하고 삼전도에서 청나라 태종에게 무릎을 꿇게 되었다.

유학에서는 사람이 정상적으로 지켜야 할 도리를 경상(經常)이라 하고, 비상시에 처하여 응변(應變)하는 것을 권변(權變)이라 한다. 그러나 떳떳한 도리는 누구나 좇을 수 있는 도리이며, 권변이란 성현이라 하더라도 어렵게 처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어떻든 민족의 주체성을 강조한 김상헌 등의 의리파가 전자에 속한다면, 최명길 등은 상황에 따라서 권변을 행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근본에 있어서는 상호 이해되는 점이 있는 것이다.

왜란을 당하자, 유림이 구국에 앞장섬으로써 의병운동이 시작되었고, 이에 향민들이 호국전선의 대열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본격화, 조직화 되었다. 유림과 향민은 대의명분으로 굳게 결집된 저항세력을 형성하였다. 이리하여 의병운동은 거족적인 민족자존운동으로 전개되었는데, 이것은 곧 의병집단의 중심이 되는 농민들의 강한 향토애와 이민족에 대한 적개심, 그리고 위로부터 이끌어주는 유림의 구국일념이 하나로 뭉쳐 애국애족(愛國愛族)의 정신으로 승화되었기 때문이었다. 의병운동의 1차적 목적은 왜적을 물리쳐 향토를 지키는 데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궁극적으로 구국을 위한 길이며, 민족의 자존을 위한 의무이자 사명이었다. 그러므로 의병운동이 거족적으로 전개됨에 따라 민족운동으로서의 성격을 한층 강하게 지녔던 것이다.

특히 유교적 국가윤리와 충의사상은 민족의식을 고양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으니, 이민족의 침입이라는 국가적 위기를 맞아 의병운동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이와 같은 의병운동은 가깝게는 병자호란 때 재현되었고, 나아가 조선 말기의 척사위정운동과 의병운동, 국권상실기의 무장독립투쟁으로 이어져 역사적 전통을 이루었다.

/ 다음 호에는 한국유학 이야기 30번째로, '조선 불교의 쇠퇴와 삼교합일론'이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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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한 2021-10-12 04:49:40
파리의 만국평화회의에 우송한 것이다. 그러나 일경(日警)에게 발각되어 곽종석 이하 대부분의 유림대표가 체포되었으며 일부는 국외로 망명하였다. 그 후 곽종석 ·김복한 ·하용제(河龍濟) 등은 감옥에서 순사하고 그 밖의 인사들도 일경의 고문에 못 이겨 죽거나 처형되었다

http://blog.daum.net/macmaca/3162

윤진한 2021-10-12 04:49:08
독립의군부를 조직하였는데, 1914년 5월 23일 동지 김창식(金昌植)이 붙잡힘으로써 조직이 발각되어 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임병찬을 비롯한 많은 동지들이 일본 경찰에 붙잡힌 사건이 있었습니다.

대한독립의군부 사건 관련자는 모두 54명이었습니다. 당시 경찰은 이 가운데 왕산 허위의 일족, 부하 또는 교유가 가장 많다고 파악했습니다. 실제로 허위의 사위인 이기영, 비서인 이기상 형제가 참여했고, 허위 부대의 참모를 지낸 여영조, 허위의 부하인 정철화도 참여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유림들의 파리장서 운동은 이렇습니다. 3 ·1운동이 일어나자 전국의 유림(儒林)대표 곽종석(郭鍾錫) ·김복한(金福漢) 등 137명이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는 유림단 탄원서를 작성 서명하여 이를 김창숙이 상하이[上海]에서 파리의

윤진한 2021-10-12 04:48:37
고종밀명받은 유림들.대한독립의군부조직,대규모 독립운동획책,발각.

유림들이 3.1운동에 참여치 않은것은,그 선언서에 왕정유지에 대한 언급이 없어서,왕당파 유림이 참여하기 곤란하여서 그러함. 고종의 승하때문에도 일어난 3.1운동임. 구한말 의병과 고종의 밀칙받은 유림들의 항거로 임시정부가 수립된것임.

유림들의 파리장서 운동.유교계는 3ㆍ1운동보다 7년 앞서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하여 대규모의 독립운동을 획책하다가 발각되어 많은 핵심 인물들을 잃은 바가 있었습니다. 아래 자료들을 종합해보면 이렇습니다. 이전에 의병활동을 하다 일본 대마도(對馬島)에 유배되었던 임병찬(林炳瓚)이, 귀양에서 돌아온 뒤인 1912년 고종의 밀칙을 받고 독립의군부 전라남도 순무대장(巡撫大將)의 이름으로 비밀리에 동지를 모으기 시작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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