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하 김형만의 한국 유학이야기-31] 조선 후기 유학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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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하 김형만의 한국 유학이야기-31] 조선 후기 유학 개관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21.10.24 22:28
  •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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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호란 후 실용주의 내세운 양명·서·실학 군림하던 주자학에 맞서
서양 열강의 침입 일본의 강제 개항 직면 한말 쇄국과 개화파 양분

[목포시민신문] 조선 왕조가 개국한 이래, 전반기를 통하여 사회 제도가 정비되어 가면서, 그에 병행하여 유교 또한 지도적인 이념으로 정착되고, 그 이론과 사상 또한 심화되어 갔다. 사실 성리학과 예학(禮學)의 융성은 한국사상사의 정화(精華)를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 중기에 임진왜란에서 병자호란 사이에 거듭된 변방 이민족의 침입과 이에 따른 국토의 황폐화는 사회 제도와 질서의 전반에 걸친 변형과 붕괴 현상을 드러내게 되었다.

이러한 기존 사회 체제의 변형은 그 근거를 이루는 시대 이념으로서의 유학 사상에도 많은 새로운 문제를 던져주었다. 오히려 조선 전기의 통치 이념으로 절대적인 권위를 확립했던 주자학의 체계는 비록 정통적 지위를 잃지는 않았으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국가를 경영하고 민중을 계도하여 민생을 안정시키는 데 한계를 드러내며, 국가 지도 이념으로서의 기능에 상당한 퇴조를 보이게 되었다. 반면에 후기 사회에 새롭게 발생한 상황과 국면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그 해결책을 제시하려는 체계적인 노력이 주자학의 체계와는 상당히 다른 양상을 띠면서 전개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거듭된 외적의 침입으로 국토가 유린당했을 때 가장 큰 사회 문제는 경작지의 축소로 생산이 감소하여 백성의 생활이나 국가의 재정이 극도로 궁핍하게 된 것이었다. 이러한 난국을 해결하기 위하여 대동법(大同法균역법(均役法환곡법(還穀法) 등을 시행함으로써 도탄에 빠진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국가 재정의 확충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조선 전기에 사화(士禍)를 겪으면서 확립한 사림정치(士林政治)의 기반도, 외환(外患)을 전후하여 혼란한 시기에 정권 투쟁을 일삼았던 당파주의자와 조선 말기에 세도(勢道)를 장악했던 척족에 의하여 붕괴되고, 민심과 의리를 외면한 채 권세와 사욕을 추구하는 풍조가 만연하여 정치 기강은 뿌리가 뽑혔던 것이다.

백성과 나라를 구제할 방책을 찾아도 이미 기강이 무너지고 물욕에 눈이 어두워진 퇴폐한 풍토에서 청백리는 찾아볼 수 없고 탐관오리만 즐비하니, 개혁 정책인 삼정(三政田政·軍政·還穀)도 한 번 문란해지자, 백성은 굶주리고 나라는 빈약해져도 세력가만 살찌는 타락상을 드러내게 되었다.

조선 후기 성리학은 오히려 현실의 역사적 상황이 복잡하고 어지러운 만큼, 이를 해명하려는 성리학파의 이론적 입장도 직선적인 강경함을 드러내었던 것을 볼 수 있다. 전기 이래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의 인성(人性)에 대한 분석과 변론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보편적인 성품이 구체적으로 인간과 동물에 있어서 같은가 다른가, 인물성동이(人物性同異)’의 문제에 관한 호락논쟁(湖洛論爭)에서 보듯이, 그 구체성을 더욱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하겠다. 리기론(理氣論)의 전개도 조선 전기에는 리·(理氣)의 조화를 추구하는 입장이 우세했다면 후기에 와서는 한쪽을 강조하는 경향이 나타나, 주리론(主理論)과 주기론(主氣論)이 양극적(兩極的)으로 발전하여 갔다.

조선 사상사에서 전기와 후기를 나누는 분수령으로 삼는 임진왜란·병자호란은 한반도가 외국과 깊게 접촉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조선 사회에 수입되기 시작한 문물은 주로 중국으로부터의 양명학(陽明學)과 서양 문물 및 청조학풍(淸朝學風)이었다. 비록 조선 후기에도 정통의 주류에 참여하지는 못하였지만, 양명학이 공인되지 못한 채 소수의 지식인에 의해 연구되어 우리 학문 사상계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던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조류를 타고 서양의 과학 기술과 천주교 신앙이 중국을 거쳐 한반도에 침투되었을 때는 조선 사상사에 가장 큰 충격이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조선 후기 주자학의 배타적이며 교조적인 사조는 서양 문물을 우선 배척하였으며, 이에 따라 사상의 갈등이 심각하게 일어나게 되었다. 서양 사상의 표면을 이루는 서양적인 제도와 예법 풍속이 동양의 전통적 제도와 도덕 규범에 직접적인 상반성을 드러내고 있는 만큼, 전통 사상의 배척적 태도는 자기방어의 본능이면서 자기 확신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었다. 여기에 자주 의식이 각성되고, 조선 말기에 이르러 서양의 무력 위협이 가중되자, 민족자존을 위한 구체적인 민족의식에로까지 심화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던 것이다.

한편 국내의 사회적인 현실 문제에 대한 관심과 청조의 실증적인 학풍에 자극을 받아 재야의 사림 가운데 새로운 학풍을 일으켜 체계화를 위한 노력이 일어났다. 이것을 곧 실학(實學)이라 일컫는다, 이 실학은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문제에 관심을 집중하여 학문적으로 상당한 업적을 성취하였다. 그러나 이들 실학자는 정치적 근거를 확보하지도 못하였고, 혹은 관료라 하더라도 정책 결정의 위치에까지 진출하지 못하였기에, 그 학풍이 사회 개혁에 직접적으로 시행되지는 못하고 말았다.

양명학이 이론적 비판을 받으면서도 일부 소론(少論)의 가문에 계승되었고, 서학(西學)이 기호지방 남인(南人)을 중심으로 배척과 탄압을 받으면서도 세력을 확장해 갔던 것은, 비록 표면적으로는 주자학의 정통성에 도전하지는 못하였다 하더라도, 주자학이 누린 절대적 권위가 지식인의 의식 내면에서 동요되기 시작하였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 실학은 경제·제도·기술·생산 등 현실의 문제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개발하고, 나아가 주자학의 체계에 대해 상반된 견해마저 보이는 비판적이고 개혁적인 정신을 발휘하였다.

이러한 정신적 상황에서는 전기에 군림하였던 주자학은 오히려 낡은 의식을 대표하여 권위만 고집하는 듯한 인상을 주지만, 양명학·서학·실학 등 새로운 사상이 다양화하고 복합화하는 풍토가 형성되었다. 이렇듯 여러 가지 사상의 흐름이 한 시대에 출현하였을 때 상호 간의 갈등·대립·비판이 없을 수 없으며, 또한 서로 영향을 받고 수용·조화하는 측면도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서화가 항산(恒山) 장근헌의 작품 '우리의 가을

조선 후기 사회의 경제적 곤란은 사회 제도와 정치 기강의 퇴폐로 인하여 근본적인 해결은 어려웠으나, 역대의 군왕 가운데 그 해결책을 위해 진력하였던 영조·정조대에는 상당한 안정과 문화적인 중흥의 기운을 일으켰다. 탕평책의 시행으로 노론의 일당 전횡을 탈피하고 소론과 남인도 등용해 보려고 노력하였으며, 특히 정조의 문화 정책은 규장각의 확장으로 많은 도서가 수집·연구·출간되어 학풍이 크게 발전하여, 전기의 세종 이후 융성한 문화적 전성기를 이루었다.

정조는 서양 문물의 수용에 다소 온화한 태도를 지켰으나, 순조 이후 벽이단론(闢異端論)의 화살이 서학(西學)에 집중됨으로써 서학의 세력은 결정적으로 분쇄되었으나, 정통 이념도 그만큼 경색해지고 폐쇄화되어 포용성을 잃게 되었다. 더구나 고종 초부터 서양의 무력적 침입이 실제로 닥쳐왔을 때 이에 대한 반응은 주전론(主戰論)으로 굳어졌고, 그 이론적 배경은 서양이 짐승이나 오랑캐와 다름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가 침략자에 대한 국가 방어의 자주 의식으로서 중요한 정신적 전통을 이루어 왔던 것이지만, 동시에 세계사의 조류나 서양의 현실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고, 또 알려고 하지도 않는 폐쇄성에 빠지고 말았다. 마침내 일본의 무력 위협 앞에서 개항(開港)을 강요당한 후 새로운 사조에 눈을 뜨자, 국가의 자주성을 지키는 것은 서양의 기술과 무기를 도입하고 국내의 제도를 개혁하여 부국강병을 이루어야만 가능하다는 견해가 나와 개화사상(開化思想)을 형성하였다.

한말의 상황은 의리파가 일본을 비롯한 서양 세력에 대한 저항과 배척을 지속하고, 개화파가 이들 외세에 힘을 입어 자기 세력을 확보함으로써 개혁 정치를 펴보려고 하여, 두 입장이 상반되고 대립하였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두 입장의 근본은 민족의식과 자주의식에 있었고, 다만 방법을 전통 사상에서 찾느냐 서양식 근대화에서 찾느냐에 따라 나누어지는 것이었다. 오늘날 국제정세의 냉혹한 현실에서는 저렇듯 국론을 분열시켰던 상반 대립된 입장도, 새롭게 상보(相補) 상수(相須) 상승적(相乘的)으로, 화합을 이루어내는 원융회통(圓融會通)의 지혜가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다.

/ 다음 호에는 한국유학 이야기 32번째로, '모화 사상의 고취'가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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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한 2021-10-26 12:03:25
@한국 유교 최고 제사장은 고종황제 후손인 황사손(이 원)임. 불교 Monkey 일본 항복후, 현재는 5,000만 유교도의 여러 단체가 있는데 최고 교육기구는 성균관대이며,문중별 종친회가 있고, 성균관도 석전대제로 유교의 부분집합중 하나임.

@ Royal성균관대(조선.대한제국 유일무이 최고교육기관 성균관승계,한국 最古.最高대).Royal서강대(세계사반영,교황윤허,성대다음예우)는 일류,명문.주권,자격,학벌없이 대중언론항거해온 패전국奴隸.賤民불교Monkey서울대.주권,자격,학벌없는 서울대.추종세력 지속청산!

http://blog.daum.net/macmaca/2967

윤진한 2021-10-26 12:02:39
일본 잔재이자, 불교 Monkey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는 한국영토에 주권.자격.학벌 없어왔음
*성균관대로 정통을 승계하기로 하자, 미군정이 향교재단의 재산으로 성균관대 재정에 기여토록 하는 법을 추가로 만들어 주어,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때 대통령령으로 시작된 한국민족문화대백과발행으로 행정법상 조선 성균관 승계를 추가로 법제화. 성대 6백주년 행사때는 대통령.국무총리.교육부 장관 참석.
.*성균관대,개교 6백주년 맞아 개최한 학술회의. 볼로냐대(이탈리아), 파리 1대(프랑스), 옥스포드대(영국), 하이델베르크대(교황윤허,독일),야기엘로니안대(폴란드) 총장등 참석.
http://blog.daum.net/macmaca/1467

http://blog.daum.net/macmaca/733

윤진한 2021-10-26 12:01:22
할때, 전국적인 반대와 서울대생들의 등록거부.자퇴등이 있었던 상황도 인식해야합니다.

국제법상 일본이 항복후, 포츠담선언(카이로선언 포함)에 따라, 한국영토에서 일본의 모든 주권은 없어왔음.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는 한국영토에 주권.자격.학벌이 없어왔음. 현행헌법 임시정부 구절(한일병합 무효, 을사조약등 불평등 조약 무효, 대일선전포고)에도 맞지 않는게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임.해방후 미군정부터 국사 성균관(성균관대)교육을 시켜온 나라 대한민국임.

국사 성균관(성균관대)나라. 조선.대한제국 유일무이 최고 교육기관 성균관의 정통 승계 성균관대는 국내외에서 6백년 넘는 역사를 행정법.국제관습법으로 인정받고 있음.Royal성균관대.세계사의 교황반영, 교황윤허 서강대는 국제관습법상 성대 다음 Royal대 예우.패전국

윤진한 2021-10-26 12:00:44
근대와 현대에는 고종의 을사조약무효, 대한민국 임시정부, 해방후 미군정법령에 따른 성균관 재건, 조선성명 복구령에 따라 전국민이 유교국 조선의 한문성명.본관 의무등록으로 행정법.관습법상 유교국 복구,국사 성균관(성균관대로 정통승계, 현재 6백년 넘는 역사와 전통을 국내외에서 인정받고 있음)교육을 정신적 구심점으로 삼아야 할것입니다.Royal성균관대는 太學등의 별칭있고,왕립대학이며, 대한제국의 皇대학 전통과 자격을 가지고 있음. 해방후의 주권없는 일제잔재 중심 비신분제 국립대학과는 성격도 다름.

카이로선언이후 프랑스.소련.폴란드등이 승인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제법.국내법적 위상을 상기하고, 패전국 일본잔재로 한국영토에 주권이 없어온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패전국 일본잔재로 적산재산 형태)를 국립대로 강행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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