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벌론 등 헛된 명분·자존심 조장하며 집권 이념화로 양란 후 피폐한 민생 등한시
[목포시민신문] 조선의 외교정책은 존명사대(尊明事大)를 기본으로, 명(明)과의 친선 유지에 힘써 왔다.
임진왜란을 계기로 조선의 유교계에서는 모화사상(慕華思想)과 숭명의식(崇明意識)이 크게 고취되었으며, 병자호란을 겪고 난 직후 절정에 달하였다. 모화사상이란 중국의 문물이나 사상을 숭모하는 사상이다. 바꾸어 말하면 선진문화를 동경하여 본받으려 하는 문화지향의식을 말한다. 흔히 모화(慕華)와 사대(事大)를 혼동하는 경우가 없지 않은데, 사대란 외교 정책상의 개념이고, 모화란 문화·문명상의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사대의 경우 국력의 강약과 직결되지만, 모화의 경우 그러한 차원을 넘어서 문화·문명의 고하(高下)와 직결된다. 종래 우리나라가 중국에 대하여 사대와 모화 두 가지를 함께 행한 것은, 중국이 우리나라보다 문화의 정도가 훨씬 높았을 뿐 아니라, 동시에 강대국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이 역대로 사대정책을 써왔으나, 어디까지나 주권국가의 체모를 잃지는 않았다.
임진왜란은 우리나라에 미증유한 국난이었다. 전후 7년에 걸쳐서 국토의 태반을 유린당하고 다수의 생명과 재산에 참화와 손해를 입혔다. 비록 안으로 이충무공의 전공과 각처 의병의 분전이 있었다 할지라도, 밖으로 명나라의 국력을 기울인 원조가 아니었더라면 도저히 극복하기 어려웠다. 우리는 이처럼 큰 은혜를 입었으므로 명나라가 그때 우리나라를 재조(再造)한 공(功)이 있었다고 하는 것이다. 또한, 명나라는 그것이 중요한 하나의 원인이 되어 새로 일어난 청조(淸朝)에게 나라를 빼앗기게 되었던 것이다.
명나라는 정통의 중화 문명과 문화는 물론, 주공·공자 이래의 선성(先聖)·선왕(先王)의 전모(典謨)를 계승하였다고 여기는 조선의 유학자들로서는, 유목과 수렵밖에 아무것도 모르는 야만 미개의 청나라가 명나라를 전복시키고 그 지위를 대신하려는 때에, 그 전자를 옹호하고 후자를 배척하려 하는 마음이 생길 것은 또한 당연한 일이다. 그리하여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계기로 하여 조선 유학자들 사이에 모화사상이 크게 일어나, 명나라를 존숭하고 청나라를 배척하는 숭명배청사상(崇明排淸思想)은 곧 존왕양이(尊王攘夷)의 춘추대의(春秋大義)라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 사상과 이 주장은 널리 국민에게 침투하여 도덕이 되고 의리가 되며 여론이 되어 이후 수백 년 동안을 시종일관하였으니, 저 삼학사(三學士)의 죽음과 만동묘(萬東廟)의 제향과 숭정기원(崇禎紀元)과 영력기원(永曆紀元)의 사용 등을 보면 그 소식을 짐작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당쟁으로 인하여 서로 원수가 되어 있으며, 조야를 막론하고 모든 곳에서 당론으로 저마다 시끄럽게 떠드는 가운데서도, 이 모화사상에 관한 의리와 주장만은 당쟁을 초월하여 동일한 보조를 취하였었으니, 이 사상이 어떻게 크고 또 깊게 고취되고 중시되어 있던 가를 입증하는 하나의 증거라고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당시에 모화사상을 고취한 대표적 인물로는 김상헌·정온과 홍익한·윤집·오달제 삼학사와 송시열 등을 들 수 있겠다.
17세기에 들어 명·청(明淸)의 교체라는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도 조선의 주자학도들은 명종·선조조 이래 굳게 다져진 도학(道學)의 기풍 아래 정주학적 도통(道統)을 고수하려 하였다. 특히 송시열에 이르러 조선조의 도학은 춘추대의(春秋大義)의 명분을 통해 오랑캐의 침략에 항거하는 민족의 저항이 척화(斥和)에서 북벌(北伐) 등으로 나타났으며, 이러한 시대적 배경 아래에서 숭명배청사상(崇明排淸思想)이 대두되었던 것이다. 이는 화이론(華夷論)의 바탕 위에서, 중화(中華)의 정통왕조인 명의 멸망으로 인해 소중화(小中華)의 자긍심이 드높아진 것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병자호란 이후, 주자학파는 숭명배청사상의 고조와 더불어 주자학의 관학적 성격을 일층 교조적으로 강화하고, 철저한 사상통일 작업에 의해 대내외적인 위기를 극복하려 하였다. 당시 송시열로 대표되는 정통 주자학파는 정치적으로 집권세력으로서의 기반을 구축하면서, 사상적으로는 이론투쟁 및 이념통일 작업의 주역이 되었는데, 그 바탕이 된 것은 중화주의(中華主義)를 지향하는 것이었다. 호란(胡亂) 후의 당시 상황에 비추어볼 때, 조선이 청의 무력에 굴복하여 현실적으로는 부득이 사대관계를 맺고 있으면서도, 이념적으로는 여전히 중화주의적 지향을 견지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보다 문화적으로 열등한 청은 오랑캐의 낙인을 면할 수가 없으며, 우리의 문화와 도저히 융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여기서 종래 대륙과의 관계에서, 상황에 따라 실리적으로 유연하게 대처했던 외교정책이 점차 후퇴하고 융통성을 잃으며 경직되어 갔던 것이다.
이러한 숭명배청사상은 조선 후기 집권층 및 사림(士林)의 대외인식의 틀을 이루고 정책의 기조를 형성하였는데, 당시 조야에서 중망을 받고 있던 송시열에 의하여 그 사상적·이념적 정당성이 제고(提高)됨으로써, 조선 말기까지 국가적 이념으로서, 국가의 중요한 지침으로서 거의 국시(國是)나 다름없을 정도로 그 사상적 권위가 지속되면서, 여러 가지 측면에서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조선은 개국 이래 우방국가로서 사대관계를 맺어왔을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때 우리를 구원해준 명나라가 멸망하고 오랑캐인 청나라가 그 지위를 대신하는 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지 않고, 이미 멸망한 명에 대한 의리를 지키며 사대의 예를 다하였는데, 숭정(崇禎)·영력(永曆)의 명나라 연호(年號)를 계속 사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만동묘(萬東廟)와 대보단(大報壇)을 설치하여 명나라 황제를 제사하기도 하였다. 효종은 호란(胡亂) 뒤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가 8년 동안 갖은 수모를 당하고 고초를 겪었기에, 청나라에 대한 복수심과 적개심이 골수에 사무쳐 있었으며, 조선이 당한 치욕 속에서 조야의 민심이 극도의 적개심과 배청사상으로 고조된 가운데 효종이 즉위하였다.
효종은 즉위하자마자 곧 북벌(北伐)의 의지를 굳혔다. 북벌론은 처음에는 대체로 오랑캐에게 주권을 유린당한 굴욕과 원한을 씻기 위한 복수심을 명분으로 하였다. 그런데 효종과 도동지합(道同志合)한 송시열이 더 근원적인 대의의 천명에 북벌의 명분을 둠으로써, 북벌론은 이른바 ‘존화양이(尊華攘夷)’ 및 ‘대일통(大一統)’의 춘추대의(春秋大義)를 그 사상적·이념적 기반으로 하기에 이르렀다.
효종과 효종의 북벌 의지에 영합한 송시열 등은 수년을 두고 북벌을 위해 일련의 준비를 진행시켰다. 그러나 왜란 이후 계속된 피폐와 호란에 의한 황폐로 인하여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 어려웠고, 한편으로 청 태종이 죽고 세조가 즉위한 뒤, 저들의 국세가 날로 강성해져, 효종이 바라던 바와 같은 북벌의 호기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효종이 재위 10년 만에 승하하니, 북벌의 웅지는 물거품으로 돌아갔음은 물론, 당시 조야에 무르익었던 북벌의 여망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뒤를 이은 현종은 부왕의 유지를 이어받을 뜻이나 포부가 없었으며, 게다가 정파간의 정쟁이 격화되어 북벌론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날로 쇠퇴하였고, 헛된 명분과 자존심만 조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청나라의 국세가 날로 강성해지고 문물이 더욱 발달하는데도 불구하고 무턱대고 청을 배척하며, 명나라가 망한 뒤로 중화문명의 정통 계승자가 우리 조선이라는 헛된 교만심에 사로잡혀 우리의 문명은 날로 고루해지고 민생의 파탄은 갈수록 심해졌던 것이다. 이에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적극 수용하자고 하는 ‘북학론(北學論)’이 대두하여 식자층의 넓은 공감을 얻음으로써 북벌론은 더욱 시들어졌고, 홍대용 등 일련의 북학파 학자들은 청조문물을 이적문물시하던 종래의 입장에서 탈피하여 정통 중화문물의 일환으로 보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북벌론은 논자에 따라 그 평가 또한 현격히 다름을 볼 수 있다. 혹은 주변 정세나 현실적 여건을 도외시한 채 복수심에만 사로잡혀 무리하게 제기되었던 실현 불가능한 것이었다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혹은 권력 유지를 위한 방법으로 전국민적 관심을 외부로 돌리고자 한 지배계층의 논리, 또는 명분론적 사대주의 외교의 실패에 대한 호도책으로 보기도 한다. 또한, 북벌론의 배경의 하나를 이루고 있는 존명사대의식(尊明事大意識)과 그 경직성·허구성 등에 집착하였다는,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적지 않다.
한편, 비슷한 시기에 기자사상(箕子思想)의 현양운동(顯揚運動)이 성행하였으며, 소중화의식(小中華意識) 또한 대두되었다.
/ 다음 호에는 한국유학 33번째 이야기로, '예학의 성립과 당쟁의 심화'가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