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타적 교조주의 학풍 비판 자유로운 실사구시 태도 경전 재해석 앞장
노론 집권기 송주자 학설 어긋날 땐 사문난적 몰려 비극적 말로 맞아
[목포시민신문] 임진·병자의 외환으로 민족의 대수난기를 뼈저리게 겪은 이후, 현실문제를 중심으로 새로운 개선책이 요구되었다. 현세적이며 실천적인 유교를 국교로 입국한 조선은 중기에 접어들면서 초기의 실천적 경세유학(經世儒學)에서 점차 이론적이고 사변적인 성리학풍(性理學風)이 일세를 풍미하게 되었다. 그러나 주자학(성리학)이 이끄는 조선의 현실은 민생을 도탄에 빠뜨리는 것에 다름아니었다. 이미 당시의 현실은 통치 질서가 문란해지고, 그 제도적 모순과 한계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며 차츰 체제교학(體制敎學)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하여 갔다. 그리하여 주자학은 국가가 당면한 현실문제의 극복에서 무력함을 노출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민생의 현안을 타개할 만한 역량 또한 기대하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성리학 자체에 내재한 배타적 벽이단론과 주자학적 교조주의가 지배하던 학계·사상계의 한 모퉁이에서도 사변적 성리학의 허무성·진부성·고루성에 대한 반성적이고 자각적인 사조가 싹트기 시작한 것은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당연한 현상이 아닐 수 없었다. 즉 소위 실학파(實學派)와 반주자학적(反朱子學的ㅡ脫性理學的) 학자가 이즈음에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실학파의 비조로는 반계 류형원을 꼽고, 양명학에 침잠했던 학자로는 하곡 정제두가 있지만, 그들보다 선배로서 노골적으로 주자의 학설을 비판하고 자기의 견해를 주장했던 백호(白湖) 윤휴와 서계(西溪) 박세당의 존재를 잊을 수가 없다.
백호와 서계는 종래 금과옥조로 받들어 신성불가침으로 여겼던 주자의 경의(經義)에 대하여 과감히 자신의 견해와 학설을 피력하며 유가경전(儒家經傳)의 새로운 해석을 통해 공·맹(孔孟)의 원시유학(原始儒學)으로 돌아가 현실을 타개하려던 것이었다. 결국, 이 때문에 그들은 사문난적(斯文亂賊)의 죄명까지 뒤집어쓰게 되었지만, 당시에는 확실히 큰 이채를 발휘한 학인(學人)으로, 학문의 자유를 부르짖고 구각을 탈피하려는 진보적인 그 태도와 사상은 매우 귀한 것이라 하겠다. 더구나 당론이 분운(紛紜)하여 살얼음판 같았던 당시에 주자에 반대하는 이설(異說)을 거침없이 토로했다는 사실은 참으로 대담할 뿐만 아니라, 학문적 양심에 의한 일종의 의분이라고도 볼 수 있다.
주자학 자체가 벽이단적(闢異端的)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어서, 이전에도 주자학 이외의 학문을 이단이라고 하여 비판, 배척해 왔지만, 당시의 주자학도들은 학계를 독점하며 주자의 사상으로써 학계와 정계를 통제하거나 지배하려 하였다. 곧 송시열을 영수로 한 노론이 집권하면서부터는 급전(急轉), 주자의 학설이 곧 정치와 연결되어, 일자일구(一字一句)라도 주자의 학설과 어긋날 때는 논리적 타당성을 떠나 세상을 어지럽히는 근본악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이런 현상은, 적어도 조선 후기의 실학(實學)이 하나의 학문사조로 등장하기까지 계속되는데, 성호 이익이, ‘한 글자에 대하여 의문을 가져도 잘못이라 하고, 고증이나 비교·검토한다면 죄라고 한다. 주자의 글이 오히려 이와 같거늘 하물며 고경(古經)에 있어서이랴’라고 한 것만 보아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하여 율곡 이이의 학통을 이은 송시열 일파가 집권한 뒤로 율곡에게서 볼 수 있었던 자주적이고 진보적인 학문 경향을 상실하였음은 애석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주자학적 교조주의가 지배하던 당시에, 주자의 현실에 대한 인식문제와 이론적 한계성을 지적하고, 주자학 일변도의 학풍을 비판하며, 주자의 학설에 구애되지 않고 유교의 근본사상으로 돌아가 독자적인 현실 타개책을 제시하는 학자들이 나타나게 되었으니, 조선 후기에 있어서 탈주자학(脫朱子學ㅡ脫性理學) 내지 반주자학적(反朱子學的) 학풍이 대두하게 된 것은 사세로 보아 당연한 귀결이 아닐 수 없다고 하겠다.
탈주자학 내지 반주자학적 경향은 주자학과 그 학풍에 대한 전반적인 반성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이는 궁극적으로, 유가경전(儒家經傳)에서 새로운 해석을 도출하여 이를 바탕으로 산적한 현실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함으로써, 총체적인 난국으로부터 국가와 민족을 구하고자 한 것이었으니, 능동적인 개혁사상의 한 발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윤휴와 박세당은 자주적이고 독창적인 견해로써 경전을 해석하여, 주자학의 권위에 과감히 도전한 대표적인 학자였다. 이들은 경전에 대해 묵수적인 종래의 태도를 비판하고, 보다 넓은 안목과 자유로운 입장, 그리고 실사구시적(實事求是的) 태도로써 경전을 재검토, 재해석하여 학풍을 일신하려 하였다.
비록 그들이 대부분 자기의 주의·주장을 두드러지게 표방하지 못했고, 또 심한 경우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려 비극적인 말로를 맞이하였지만, 조선조 사상사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후대에 끼친 영향은 실로 상당한 것이었다고 하겠다.
백호의 대표적인 저술로는 《독서기》 11권이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중용》·《대학》 등 경전을 주해하였는데, 혹 차서를 분석하며, 장구를 주해하고 오류를 고증하며 경으로 경을 해석(以經解經)하고자 하는 실증적인 학문방법을 취하여, 그 견해가 자못 탁월한 점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송시열에 의해 이단으로 배척당하였다.
백호는 이에 대하여, ‘나의 저술 의도는 주자의 해석과 다른 이설을 제기하려는 것보다는 의문점 몇 가지를 기록하였을 뿐이다. 만약 내가 주자 당시에 태어나 제자의 예를 갖추었더라도 감히 구차하게 뇌동하여 전혀 의문점을 해소하기를 구하지 못하고 찬탄만하고 앉아있지는 못했으리라. 반드시 반복하여 질문하고, 생각해서 분명하게 이해하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만약 전혀 의심하지 않고 애매한 점을 놓아둔 채 뇌동한다면 존신(尊信)하는 점은 허위에 귀착될 뿐이니, 주자가 어찌 이 같았겠는가? 나는 단지 붕우들과 더불어 강론하여 뒷날의 이해가 점차 나아지기를 기다렸을 뿐이다. 그런데 근래에 송영보(시열)가 이단이라고 배척하였다. 그의 학문은 전혀 의심을 내지 않고, 주훈(朱訓)이라면 덮어놓고 의론을 용납하지 않고 있으니, 비록 존신한다 하더라도 이 어찌 실제로 체득하였다고 할 수 있겠는가?’ 라 반박하였다.
여하간 송우암이 윤백호의 경전 주해에 대하여 취한 태도는 그 당시에 있어서 그의 정적이며 당적이며 학문의 적인 윤백호를 공격하는 구실로는 좋은 자료가 되었을지 모르나, 학문을 연구하는 학도에 대하여 취한 태도로는 대단히 고압적이요 구속적이었다. 당쟁의 감정으로 인하여 학문의 연구와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고 봉쇄한 것이었으니, 우암의 태도가 지나쳤다고 비난하지 않을 수 없는 점이다.
박세당의 자는 계긍(季肯)이요, 호는 서계(西溪)다. 성품이 염퇴(恬退)로 저명하였다. 일찍이 이경석의 비문을 지어 송시열을 비난하고, 또 《사변록》을 지어 사서(四書)와 경전을 개주(改註)하였는데 그 설이 정주(程朱)의 설과 자못 이동(異同)이 있었다. 그러므로 일시 여론이 시끄러워 시열과 세당의 문도 사이에 찬부의 논쟁이 성하였다.
〈이경석비문〉 중에, ‘거짓을 행하고 잘못을 따르는(行僞順非),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구나(世有其人), 올빼미는 봉과 유가 다른데(梟鳳殊類), 도리어 화내고 성을 내는가(載怒載嗔).’ 라고 한 구절이 우암을 풍자한 것이라 하여 반대파인 노론이 들고일어나 《사변록》과 함께 뭉쳐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서계가 살던 당시 학계는 성리학의 전성시대로서 특히 호중학자(湖中學者) 사이에는 인물성편전문제(人物性偏全問題) 등을 가지고 질의가 시작되어 호락시비(湖洛是非)의 전조를 보이고 있을 때였다. 서계는 이러한 분위기에서 당시 성리학자들의 엽등적(躐等的)인 학문을 비난하며, 오로지 경전에 나아가 실다운 연구를 계속하던 실사구시적인 실학자였다.
요컨대 서계 박세당은 당시 정주학적 학풍 일색이던 학계·사상계에서 그 테두리를 벗어나 실증적인 또 자유로운 태도로 원시 경학의 본지(本旨)를 찾아보려고 노력한 학자였다. 그의 이러한 실증적·계몽적인 학풍이 장차 실사구시의 학풍을 촉진시키는 하나의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는 큰 의의를 발견할 수 있다. 또한, 그 이전에도 많은 저술을 남긴 학자가 적지 않지만, 서계처럼 전경서(全經書)를 통해서 주설(註說)을 시도한 이도 매우 드물었다.
이 《사변록》 이외에도 그는 당시 이단시하던 노자의 《도덕경주》와 장자의 《남화경주》를 저술했다는 점을 보아도 그의 학문이 얼마나 다채롭고 자유로웠는지를 알고도 남음이 있다.
/ 다음 호에는 한국유학 이야기 35번째로, '양명학의 전래와 배척'이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