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하 김형만 한국유학이야기-36] 호락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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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하 김형만 한국유학이야기-36] 호락논쟁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21.11.26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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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성-물성의 같음과 다름 논쟁 조선 주자학의 백가쟁명
연구학자 출신지 따라 호-락학파로 갈려 치열한 사상적 논의 전개
북벌론·배청사상 싸고 대립…락파계 북학론 전개 청문화 수용 앞장

[목포시민신문] 한국 성리학에서 다룬 문제들 가운데는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과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 이외에도, 보편논쟁인 인물성동이(人物性同異)에 대한 논변이 있었다.

인물성동이에 대한 논변은 인간과 사물의 본성 즉,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이 같은가 다른가에 대한 논쟁으로, 학맥의 지역적 특성에 따라 호락논쟁(湖洛論爭)’이라고도 한다.

인성과 물성이 같다고 보는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낙론(洛論)’이라 하고, 다르다고 보는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호론(湖論)’이라고 한다. 이러한 명칭은 낙론의 대표적인 인물인 이간이 비록 온양 사람이었지만 그를 지지했던 김창흡·이재·어유봉·박필주 등이 주로 서울, 경기 지방의 낙하(洛下)에 살았고, 호론의 대표적인 인물인 권상하와 한원진을 비롯하여 그들의 지지자인 채지홍·윤봉구·최징후 등이 충청도 지방에 살았던 데서 붙여진 명칭이다.

호락논쟁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는 것은 두 가지다. 첫째는 인성과 물성이 같은가 다른가의 문제이고, 둘째는 마음이 아직 발현하지 않은 상태에도 선악(善惡)이 있는가 없는가에 관한 문제이다.

외암 이간과 남당 한원진의 인물성동이논쟁의 초점은 본연지성(本然之性)을 무엇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달라진 것이었다. 이간은 이 본연지성을 일원의 입장에서 보아 인간과 사물의 보편성을 주장하지만, 한원진은 본연지성을 리()와 기()가 합해진 것으로서의 기질지성(氣質之性)으로 보아 인간과 사물의 다름을 주장한 것이다. 따라서 이간은 본연지성의 순수한 선을 주장하여 마음의 본체가 아직 발현하기 전에는 성()의 상대적인 선악이란 존재할 수 없다고 한다. 인간이 기()를 품수(稟受)받는데 맑고 탁하며, 순수하고 잡스러운 차이가 있어 다양하기는 하지만 마음이 발현되지 않으면 기()는 순선(純善)하여, ()이라고 할 수 없다. 이와같이 아직 발현되지 않은 상태에서 마음의 본체는 순수한 선이라고 주장하여, 한원진이 기질지성의 측면에서 성()에 선악이 있다고 주장한 것에 반박하였다. 그러므로 이 논쟁은 두 사람의 성()에 대한 개념의 차이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인물성동이론은 율곡 이이에 의해서 리통기국설(理通氣局說)로 정립되었지만, 율곡 계통의 권상하 문하에서, 이간은 주리적(主理的) 입장에서 리통(理通)을 강조하고, 한원진은 주기적(主氣的) 입장에서 기국(氣局)을 강조함으로써 제기된 것이었다.

이간의 주장대로 기()를 배제한 가운데 리()만을 말하면 인간과 사물의 성()이 같다는 보편성을 말 할 수 있지만, 한원진의 주장처럼 리()와 기()의 묘합(妙合) 속에서 성()을 보면 인간과 사물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인물성동이론은 사단칠정론과 더불어 한국 성리학의 이론적 발전에 기여한 바가 크다고 할 수 있으나, 오랜 논쟁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율곡의 리통기국설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느낌을 주게 된다.

이 호락 양론은 비록 외암, 남당 양인의 논변에 의하여 현저하게 세상에 드러났으나, 그것이 시작된 것은 그보다도 좀 더 이전으로 소급해 올라갈 수 있다. , 호학(湖學)은 수암 권상하에게서 시작된 것을 남당이 계속한 것이요, 낙학(洛學)은 농암 김창협에게서 본원한 것을 도암 이재가 계승한 것이다.

여하간 이렇듯 주장을 달리하는 양론이 널리 세간에 훤전(喧傳)되어, 이로부터 학자들은 한때 사칠리기설(四七理氣說)을 다투어 논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심성(心性)의 변()을 말하지 않는 자 없고, 또 심성의 변을 말하는 자 반드시 양론 가운데 한쪽에 가담하지 않는 자 없었다. 그리하여 양파는 서로 문호를 각자 세워 가지고 학자 간에 파당을 지어, 오래도록 논변을 계속하여 조금도 그 견해를 서로 굽히지 아니하니, 한때는 양론이 일종의 당색(黨色)의 감이 있었다. 이후 호락(湖洛) 양론의 학자들이 논변한 그 대체의 주장을 보면, 낙론은 성즉리(性卽理)를 주장함에 반하여, 호론은 성()과 리()를 분리하여 리()를 형기(形氣) 이전에 속한 물건이라 하고 성()을 형기 이후의 물건으로 생각하여 성즉기(性卽氣)를 주장하며, 낙론은 인()과 물()의 성()을 주로 리적(理的) 견지에서 설명하려 하고 호론은 그것을 주로 기적(氣的) 견지에서 설명하려 한 것이다.

이간과 한원진은 다 같이 서인 노론 송시열의 제자인 권상하의 문인으로, 이들의 논쟁은 10여년간 진행된 후 이간이 권상하에게 자신의 입장을 정리하면서 마무리 되었지만 이후 조선시대 말기까지 약 200여년 동안 계속되었다. 이 시비는 조선 말기까지 계속되다가 노사 기정진의 학설에 의하여 취송(聚訟)이 해결되는 것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과 이론(異論)은 각기 다른 특성을 지니면서, 조선 후기의 사상계와 학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인물성동론을 주장하는 낙론에서는 곧 사람과 금수(禽獸)가 본연지성은 동일하며 기질지성이 다르다 하고, 이론(異論)을 주장하는 호론에서는 사람과 금수가 본연지성부터 다르다고 한다.

인간 본성의 고유한 가치를 추구하면서 인간과 사물의 차별성을 강조하는 인물성부동론은 배타적이고 자기중심적인 태도를 보여주며, 인간과 사물의 본성을 동일한 근원에서 보는 인물성동론은 후천적인 기질지성의 차이를 넘어서 인(()의 보편적 규범과 원리를 존중하는 가운데, 인간의 주체적 조건을 중시하는 입장을 드러낸다. 이것은 또 기왕에 절대시되던 인간 위주의 사고방식에서 탈피하여 상대적으로 물()의 지위를 높여주었다는데 의의가 있는데, 사물의 이용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킬 소지가 다분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항산(恒山) 장근헌의 '내안의오상고절(傲霜高節)'

인물성부동론은 병자호란 이후 화이론(華夷論)에 입각한 배타의식과 사람과 금수를 동일시할 수 없다는 인수대별적(獸大別的)’ 윤리관이 정립되었던 당시에, 배청의식(排淸意識), 북벌론(北伐論), 대명의리론(大明義理論)의 형성·유지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이에 반해 동론(同論)은 사회현실에서 이질적인 요소에 보다더 포용적인 입장을 보여줌으로써 대조를 이루었다.

특히 인물성동론은 17·18세기에 국책의 최우선 과제로 되어 있던 북벌론의 허구성과 맹목적인 배청의식, 헛된 소중화의식(小中華意識)을 배격하고 청()의 선진문물을 수용하고자 하는 북학사상(北學思想)의 형성에 큰 시사와 영향을 끼쳤으니, 북학파에 속한 학자들이 대부분 노론의 낙론계(洛論系) 출신이었음은 우연이 아니라고 할 것이다.

호락학파의 인물성동이논쟁이 비록 노·소론의 분열처럼 곧장 치열한 정쟁으로 빠져들지는 않았다 하더라고, 서로 학파의 입장만을 고수하여 거의 당론화하였던 것은 실로 유감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정치적으로도 호·락 양 학파의 성립으로 파생된 영향이 적지 아니하였음은 여러 사적(史籍)이 전하고 있는 바이다. 후일 영조 때 임오화변(壬午禍變, 1762)을 계기로 한원진·윤봉구의 문인·후학들이 중심이 된 호론계열은 경주김씨 척족과 연결되어 벽파(僻派)에 가담, 사도세자와 정조를 공격하는 입장에 섰다가, 정조 즉위 이후 호된 정치적 타격을 받았으며, 게다가 송시열·송준길계의 반목 등 자체 내의 분열과, 일부 세력이 낙론으로 접근해 감으로 말미암아 세력이 크게 약화된 데다가, 마침내 순조 6(1806) 김달순의 옥사를 계기로 중앙정계와 거의 단절된 채 영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반면에 낙론계 인사들은 중앙학계를 주도하는 가운데 정치적 입지를 넓혀 나감으로써, 탕평정국(蕩平政局) 아래 학계와 정계에서 호론에 대한 확실한 우위를 점하기에 이르렀다. 대체로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이 같다고 보는 낙론은 사회현실의 문제에 포용적 입장을, 인성과 물성이 다르다고 보는 호론은 배타적 입장을 보인다고 할 수 있겠다.

요컨대, ·락을 막론하고 모두 ()와 분()이 서로 분리된(理分相離)’ 폐단이 있었으니, 노사 기정진의 학설을 보면, ()와 분()은 원융(圓融)하니 이른바 체용일원(體用一元) 현미무간(顯微無間)’한 것이므로 동() 가운데 이()가 있고 이() 가운데 동()이 있어 동이(同異)를 모름지기 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노사의 리기관(理氣觀)에서, 특히 그의 리일분수관(理一分殊觀)을 통하여, 조선 성리학의 성숙된 결실을 볼 수가 있다. 대개 그의 설명은 조리가 분명하고 분석이 정밀하여 환하게 심성(心性)의 진면목을 볼 수가 있고, 그 자신도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 호락(湖洛)의 장구한 취송(聚訟)은 이에 이르러 해결점이 있게 된 것이다.

/다음 호에는 한국유학 이야기 37번째로, '17,18세기 세제개편과 농촌사회'가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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