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하 김형만의 한국유학이야기-37] 조선 후기 세제개편과 농촌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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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하 김형만의 한국유학이야기-37] 조선 후기 세제개편과 농촌사회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21.12.03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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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C 농업기술 발달로 부농 출연… 양반 신분제 균열 조짐
왜·호란 영향 국토 황폐화 속 세제 폐단 속출 수조체제 개편 불가피
대동법 실시 공납제 폐지 등 세제 개혁… 이앙법 도입 이모작 가능

[목포시민신문] 전란에 의한 전지(田地)의 황폐, 이에 따른 세입의 감소는 이미 전란 전에 문란해져 여러 폐단을 야기하던 직전제(職田制)와 수조체제(收租體制)를 개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사실상 직전제의 폐기는 그 뒤의 토지점유관계에 큰 변화를 초래하게 되었다.

왕궁과 제궁가(諸宮家), 여러 관아와 군영의 재원 확보를 위해서는 아무런 제도적인 규제도 마련하지 못한 채, 왕명에 의한 절수(折受ㅡ떼어 받음)’의 형식으로 전지(田地)가 직접 그들에게 할급(割給)되게 된 것이다. 이것은 면세지의 확대를 초래하는 것이었다. 토지공유에 관한 원래의 규제가 무너지고, 궁가·관아·군영에 의한 토지매점의 경향만이 늘어갈 때, 권신이나 호세가 또한 그대로 있을 리가 없었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권세를 이용하여 민전(民田)을 매점·횡점(점탈)하여 그들의 사점지(私占地)를 확대하여 갔다.

한편으로 전란 전에 이미 제대로 시행될 수 없었던 전세(田稅)의 제도도 고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정부는 한편으로는 양전(量田)을 계획·실시하여 전란 후의 전지(田地)의 상황 파악에 노력하였으나 면세지의 확대와 은결(隱結)이 더욱 증가하고 실제로 징세의 대상이 된 전지의 면적액은 도리어 감소되어 갔다. 그 위에 전세(田稅)에는 각종 명목의 여러 가지 부가세가 부과되었다. 또 원래 전세는 전주(田主)의 부담이었으나, 17·18세기경부터 전주들은 농민(소작인)에게 전가시켜 갔다. 따라서 법정 전세액의 경감이 실제로 농민의 부담을 경감시킨 것은 아니었다. 여기에는 또 종래의 공납(貢納)이 전세화(田稅化)됨으로써 농민들은 전세의 몇 배가 되는 세미(稅米) 또는 군포(軍布)를 부담하게 마련이었다.

서인 특히 노론계의 소수 벌열(閥閱)을 중심으로 한 지배체제가 굳어져 갈 무렵, 국가적으로 심각하게 문제가 된 것은 재정적인 궁핍이었다. 전란에 의하여 농토가 황폐해져서 경작면적이 줄어들었고, 게다가 양안(量案)이 산일(散佚)되어 은결(隱結)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국가 조세 수입의 감소를 무엇으로 보충하느냐 하는 것은 지극히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이미 임진왜란 이전부터 일부에서 주장되어 오던 공납(貢納)을 미곡(米穀)으로 바치게 하는 수미법(收米法)이 다시 논의되기에 이른 것이다. 원래 공납제도는 여러 가지 불편을 수반하고 있어서 방납(防納)이 행해지게 되었고, 이에 따라서 공납자들의 부담이 더욱 무거워졌다. 공납자인 농민들은 이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유망(流亡)하는 등 소극적이나마 반항을 계속해 왔다. 이에 공물을 미곡으로 대납시킴으로써 방납에 따르는 공납자들의 피해를 덜자는 것이 수미법을 주장하는 이유였다. 이 주장은 임진왜란 후에 조세의 감소로 인하여 재정의 곤란을 당하고서야 비로소 그 보충을 목적으로, 광해군 즉위년(1608) 경기도로부터 점차 실시하여 숙종 34년에는 전국에 실시되기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대동미(大同米)라는 명칭하에 전() 1결에 대하여 미() 12말씩을 징수하였는데, (大同布)나 전(大同錢)으로 대납하게도 하였으며, 이를 선혜청이 관할하였다.

이 대동법(大同法)이 실시된 뒤에도 필요에 따라 농민들로부터 공물을 받아들이기는 하였으나, 원칙적으로 공납제도는 폐지되었다. 이같이 공납이 전세화(田稅化)함으로써 사회적으로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우선 농민들의 경제적인 부담이 가벼워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공인(貢人)이란 어용상인을 중심으로 한 상업자본을 발전시켰고, 아울러 공인으로부터 주문을 받아 생산하는 독립적인 수공업을 일으켰다. 이러한 여러 현상은 사회적인 커다란 전환을 초래하였던 것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날 당시에는 국초의 오위(五衛)가 사실상 유명무실한 것이 되어서 각지에서 일어나는 의병(義兵) 이외에는 이렇다 할 군사력이 없었다. 이에 임진왜란 중에 훈련도감을 설치해서 군사를 양성하게 되었고, 점차로 총융청·수어청·금위영·어영청 등이 숙종 때까지 설치되어 오군영(五軍營)이 성립하였다. 이후 이 오군영이 국군의 중심 부대가 되었다. 이와 같은 군제(軍制)의 개편은 종합적인 계획에 의했다기보다는 내외의 변란에 대처하여 왕도의 경비를 강화하려는 의도가 더 농후하였다. 그 편대에 있어서도 그 일부는 반농반병(半農半兵)의 향군(鄕軍)이 교대로 상경(上京) 숙위(宿衛)하였으나, 훈련도감군(三手兵)에서부터 발전된 모병제는 점차로 보편화되어 갔다. 이제 국민에 대한 병역의 의무가 수포대역(收布代役)에서 발단된 납포(納布)의 의무로 대체되었다.

그것은 정남(丁男) 1인에 대하여 1년에 포() 2필을 징수하여 이를 군포(軍布)’라 했으며, 당시의 평균 시가로 쌀 12말에 해당하는 것이며, 풍년의 경우에는 20말에까지 이르기도 하였다. 1호의 정남수에 따라 배수로 누증하게 되어있어, 인두세(人頭稅)와 다름이 없었다. 이는 다른 어느 세액보다도 엄청나게 과중한 것이었다. 그것도 양반자제는 사실상 군역의무를 지지 않았으며, 일반 농민 중에서도 서원에 투탁(投託)하거나 향교의 교생으로 들어가고, 혹은 양반이라 호칭하여 그 의무를 피하는 자가 많았기 때문에, 실제로 군포를 납부해야 하는 자는 피잔무의(疲殘無依)의 궁민(窮民)들이었다. 한편 정해진 액에 대한 군포 징수의 책임이 지워진 지방 관아에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아서, 이른바 황구첨정(黃口簽丁), 백골징포(白骨徵布)나 족징(族徵), 인징(隣徵)은 군포 징수에 따르는 통폐(通弊)로 널리 지적되었다. 이러한 군포를 빙자한 탐관오리의 가렴주구(苛斂誅求취렴(聚斂)의 작폐를 견디지 못하여 유망(流亡)하는 농민의 수는 더욱 증가하여 갔다. 따라서 농촌은 더욱 피폐하여 갈 뿐이었다.

토지경제에 기초를 두고 있는 국가가 농촌의 황폐 위에 설 수 없음은 분명하다. 여기서 군포의 징수를 개혁할 필요를 느끼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한 시정책이 계속 논의되어오다가, 영조 26(1750)에야 징수액을 반감하여 정남 1인에 한해 1필의 포를 거두게 하고, 이에 따른 군사재정의 부족은 종래 궁방이나 권문세가에 사점(私占)되었던 어세·염세·선박세 등과 결작(結作)의 징수로써 보충하게 되었다. 결작이란 전결(田結)에 대한 일종의 부가세로서, 평안·함경 두 도를 제외한 다른 6도의 전결에 대하여 1결에 미() 2말을 징수하는 것이었다.

서예가 월정(月汀) 정주상 선생의 천마행공(天馬行空) ㅡ 천마가 하늘을 날듯,
文勢, 筆勢가 뛰어나거나 사상, 행동 등이 걸림없이 자유로움을 말함.

이와 같은 조치를 근간으로 해서 이른바 균역법(均役法)의 시행을 보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농민의 군포 부담액은 형식상 반감되었으나, 한편으로는 어··선세의 과중한 부담으로 말미암아 어민·염부 등이 이산하게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전세의 증액과 군포 징수에 따른 전과 다름없는 여러 폐단으로 말미암아 농민의 부담은 사실상 경감된 것이 아니었다.

그 위에 양반계급에 대해서는 여전히 군포 납부의 의무를 지우지 못하였다. 그리고 균역법에 있어서도 대동법에서 보는 바와 같이 군포 부담의 일부가 전세화 됨으로써 사실상의 전세율(田稅率)이 더욱 가중되기도 하였다.

17세기로 들어서면서 농업은 기술적으로 크게 발전하였다. 우선 벼의 이앙법이 발달하여 벼와 보리의 이모작이 가능하게 되었다. 벼의 이앙은 과거보다 수리(水利)가 더 절실해져, 제언·보 등 저수지가 많이 만들어졌다. 또 밭농사에서는 견종법(畎種法)이 널리 보급되었다. 이앙법과 견종법의 보급으로 인하여 농촌사회는 광작(廣作)을 하는 부농(富農)과 토지를 떠나는 이농자(離農者)의 양자로 분화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대부분 영세소농 출신인 이농자들은 농촌에서 임노동(賃勞動)도 하였지만, 때로는 유민(流民)이 되어 걸식을 하거나 작당하여 도적이 되기도 하였다. 한편 농촌사회에서는 특수작물 재배에 대한 상업적 생산이 발달하였다. 인삼·담배·목면(木棉) 등의 재배가 그것이다.

농업기술의 향상으로 인한 생산고의 증대, 농업경영 방식의 발전, 상업적 농업생산의 발달 등에 따르는 부의 축적으로 농민들 가운데 일부는 부농으로 발전하여 새로운 평민지주(平民地主)가 되었다. 이들은 심지어 일정한 양의 곡식을 바치고 공명첩(空名帖)을 사서 양반 신분으로 상승하기조차 하였다. 그 반면에 정권에서 소외된 양반으로서 소작농으로 전락하는 경우도 생겼다. 이리하여 양반과 상민의 관계는, 비록 그 구분 자체가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현실적인 재부(財富)에 토대를 두고 크게 변질되어 가고 있었다. 물론 대다수의 농민은 더욱 영세소작농으로 전락하거나 혹은 임노동자나 유민이 되는 자도 많았다. 이러한 모든 현상은 조선 후기 사회에서 신분질서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었다.

/ 다음 호에는 한국유학 이야기 38번째로, '실학파의 출현'이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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