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하 김형만의 한국유학이야기-38] 실학파의 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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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하 김형만의 한국유학이야기-38] 실학파의 출현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21.12.10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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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 개화사상 영향…현실 정치 미실현 20C 주권 상실로 이어져
율곡-이수광-김육-유형원 거치면서 시대적 학문으로 위상 갖춰
19C 들어서 정약용, 김정희, 최한기에 철학적 기반 확립 기여

[목포시민신문] 실학(實學)실제로 소용되는 참된 학문이라는 뜻으로 유학의 전통에서 허학(虛學)과 대립된 말로 폭넓게 쓰여 왔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조선 후기 사회에서 나타났던 유학의 새로운 학풍이자 사상 조류로, 당시 사회 문제의 해결을 위해 성리학의 관념성과 경직성을 비판하며 경세치용과 이용후생, 실사구시를 강조하던 학문 태도를 실학이라 지칭하게 되었다. 실학(實學)16세기 말에서 19세기까지 근 3백여 년에 걸쳐 전개되었는데, 이러한 실학이 일어나게 된 역사적·사상적 배경은 무엇인가?

당시의 조선 사회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대참화를 겪고 국력의 약화와 민생의 위기에 직면해 있었으며, 사림(士林)들의 당쟁으로 정치권의 지도력과 도덕성에도 문제를 드러내었다. 또한, 17·18세기 벌열(閥閱) 정치가 행해져 소수 양반 가문이 정권을 독점함으로써 많은 몰락 양반이 생겨났고, 농촌에서는 부농(富農)이 생기는가 하면 반대로 영세민들은 이농(離農)을 강요당하여, 유리민(流離民)의 수가 급증하게 되었다. 도시에서도 도매상인들이 상공업을 지배하여 부를 축적했지만, 반대로 영세상인은 몰락하고 물가가 앙등하는 사회 문제가 대두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외에도 실학의 발흥에는 사상적 배경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첫째, 성리학의 말폐(末弊) 현상을 지적할 수 있다. 퇴계·율곡에 의해 그 전성기를 맞이했던 성리학은 이후 예론(禮論), 의리학(義理學)의 방향으로 전개되어 갔지만, 유학의 본래 정신과는 달리 경세치용의 실천유학에서 멀어지며, 공소한 이론유학에 몰두한 나머지 관념화되고 경직화되어 새로운 사상적 변화가 요청되었다. 둘째, 명분론이 갖는 한계가 드러나게 된 것이다. 임진, 병자 양란 이후 배청(排淸)의 기치를 걸고 북벌론에 이르기까지 대의명분론이 강하게 대두되지만, 현실은 무력함을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의리론이 민족 자주성의 천명이라는 의미는 가질 수 있었지만, 국고의 고갈과 민생의 아픔을 해결해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셋째, 17세기를 전후하여 전래한 양명학(陽明學), 서학(西學), 고증학(考證學)이 실학의 발흥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미쳤다.

성리학자들은 퇴계에서 보는 것처럼 양명학을 이단시하여 철저히 배척하였지만, 실학파(實學派)들은 양명학에 호의를 가졌으며, 특히 지행합일론(知行合一論)은 그들의 취향에 맞았다. 서학은 17세기 초부터 중국에서 전래되었다. 그 내용은 천주교를 비롯하여 서양의 과학, 기술, 문화 등 폭넓은 것이었다. 실학파들은 성리학과 다른 서학에 깊은 관심을 갖고 철학적인 접목을 시도하게 되었고, 서학의 앞선 과학, 기술, 문화는 새로운 지식체계를 열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청조(淸朝) 실학의 객관적·실증적 학문 태도는 주자 성리학의 권위로 경직되었던 당대 학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는데, 이는 그대로 실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어 새로운 경전(經傳) 해석과 국학(國學) 연구를 가능하게 하였다. 이와 같이 한국의 실학사상은 성리학, 양명학, 서학, 고증학 등과의 상호 영향 하에서 발흥되어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일반적으로 실학의 유파는 다음과 같이 세 부류로 구분한다. 첫째는 성호 이익을 중심으로 하는 경세치용(經世致用) 학파로서 토지 제도, 행정기구 등 제도상의 개혁에 치중했던 학파이다. 둘째는 박지원을 중심으로 하는 이용후생(利用厚生) 학파로서 상공업의 유통과 생산 기구 등 일반 기술 쪽의 혁신을 목표로 하는 학파이다. 셋째는 김정희를 대표로 하는 실사구시(實事求是) 학파로서 경서(經書) 및 금석(金石), 전고(典故)의 고증을 위주로 하는 학파를 말한다. 따라서 경세치용 학파는 주로 농촌 출신의 학자들로서 반계 유형원을 계승하면서 멀리 다산 정약용에까지 이어지고, 이용후생 학파는 주로 서울 출신의 학자들로서 박지원을 비롯하여 홍대용, 박제가 같은 북학파(北學派)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들 학파에 앞서서 간접적 혹은 직접적으로 실학을 유도하고 계몽함으로써 실학의 준비 시기를 마련한 이들이 있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 구암 한백겸, 지봉 이수광, 교산 허균이 이들이다. 이들은 따로 실학계몽파(實學啓蒙派)’로 일컬어 구분하기도 한다.

경세치용 실학의 내재적인 학맥은 이이-유형원이익정약용으로 볼 수 있고, 북학파 실학은 이재김원행홍대용박지원박제가로 이어져 기호 유학의 낙론 계열에 연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체로 실학사상은 율곡 이이에서 시작하여 지봉 이수광, 잠곡 김육을 거쳐 반계 유형원에 이르러 학()으로서의 성격을 이루었다고 보는 것이 통설이다. 이는 이익이 국초 이래로 시무(時務)를 아는 이는 오직 율곡과 반계 두 사람뿐이라고 한데서도 알 수 있다. 이처럼 이익은 실학의 기원을 율곡에 두고 있으며, 이렇게 볼 때 율곡은 조선조 후기 실학의 선구적 위치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한국 실학은 17세기 후반 반계 유형원을 통해 비로소 실학적인 성격을 갖춘다. 그는 벼슬을 마다하고 52년의 생애를 재야에 은둔하여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며, 반계수록을 통해 전제, 교선제, 임관제, 직관제, 녹제, 병제, 군현제 등 제도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이 시기에 반계와 더불어 큰 비중을 차지했던 실학자가 있으니 서계 박세당이다. 그는 농서로서 색경을 저술했고, 독자적인 경전 주석을 통해 사변록을 남겼다. 그의 비판정신과 주체의식은 실학정신과 그 맥을 함께 한다.

한국 실학은 18세기에 와서 특히 성호 이익에 이르러 학파적 정립을 보게 된다. 이른바 성호학파(星湖學派)라고도 불리는 이들은 기호 지방의 남인들이 중심이 되었는데 반계를 계승하여 경세치용(經世致用)에 주력하였다. 성호 또한 평생을 초야에 묻혀 학문에만 전념했던 위대한 학자였다. 성호사설은 그가 40여 년간에 걸쳐 기록한 백과전서적 저술로 대표적인 것이다. 그의 제자로는 하빈 신후담, 순암 안정복, 권철신, 이가환 등이 있다.

서예가 남전(南田) 원중식의 '학필구정(學必求精)' ㅡ 학문은 반드시 깊고 자세함을 추구해야 한다.

성호가 18세기 전반의 실학을 담당했다면, 후반기의 실학은 이른바 북학파(北學派)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들은 주로 노론의 일부 지식인들로 청나라를 왕래하면서 발전된 서양 문물을 직접 접하고 영향을 받았는데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가 대표적 인물이다. 이들은 주로 상공업의 유통과 일반 기술의 발전을 추구한 이른바 이용후생(利用厚生) 학파이다.

실학은 이제 19세기에 들어오면서 정약용, 김정희, 최한기에 의해 철학적 기반을 확립하고 그 전성기를 맞는다.

정약용은 한국 실학자 가운데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위치에 있다. 그는 종으로는 반계와 성호의 학통을 잇고, 횡으로는 북학 및 서학을 섭취하여 실학사상을 집대성(集大成)하였다. 그는 자찬묘지명에서 자신의 저술에 대해 육경(六經)과 사서(四書)는 수신(修身)의 바탕이 되도록 하고 일표이서(一表二書)는 국가 경영에 도움이 있게 함이니, 본말이 구비되었다고 볼 수 있다하였으며, 또 당시의 제도와 정법(政法)에 대하여 모든 관리가 구비되지 못하고 올바른 선비가 봉록이 없으며 탐욕의 풍속이 크게 일어나 백성이 병들었으니, 이러한 제도와 정법을 이제 고치지 않으면 반드시 국가는 망하고야 말 것이니, 어찌 충신지사(忠臣志士)가 수수방관할 바이겠는가라고 하여, 당시의 제도와 정법의 개혁을 극력 주장하였다.

또한, 김정희는 이시기의 대표적인 실학자로 경학, 사학, 시문, 금석, 고고, 서화에 능했던 대학자요 예술가였다. 그는 경세치용이 아닌 북학파의 영향을 받아 실학을 실사구시적(實事求是的) 입장에서 전개한다. 그의 실학은 한학의 훈고 또는 고증학풍과 송학의 의리정신을 절충하고 있다는 데 특징이 있고, 금석학, 고증학, 훈고학은 성인지도(聖人之道)를 구현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다.

끝으로 한국 실학의 독창성과 철학적 기반을 훌륭하게 마련한 이가 최한기이다. () 중심의 그의 철학은 실학사상과 개화사상의 중간적 위치에 있다.

이제까지 16세기 말부터 19세기에 걸쳐 전개되었던 한국 실학의 흐름과 그 특징을 개관해 보았다. 역사적으로 한국 유학은 성리학(性理學), 예학(禮學), 실학(實學)의 순서로 전개되었는데, 실학은 다시 개화사상과 접목되기도 하였다.

비록 실학의 정신이 현실 정치에 실현되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는 20세기에 주권 상실의 부끄러움을 맞았지만, 실학자들에 의해 제기된 근대정신은 오늘의 현실에서도 많은 교훈을 던져준다.

/다음 호에는 한국유학 이야기 39번째로, '삼정의 문란과 농민의 항거'가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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