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하 김형만의 한국유학이야기-39] 삼정의 문란과 농민의 항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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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하 김형만의 한국유학이야기-39] 삼정의 문란과 농민의 항거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21.12.19 18:53
  •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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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기관 관영고리대업체 전락… 전국 곳곳 민란 봉기로 혼란
세도가-지방 수령-아전 뇌물 벼슬 만연 유교적 관료제 붕괴
전정·군정·환곡 삼정 아전 농민 수탈 수법 변질 화전민 전락
홍경래의 난 등 진주 삼남지역 몰락한 양반 중심 민란 속출

[목포시민신문] 정조 때 홍국영에서 비롯된 세도정치(勢道政治)는 순조 때 안동김씨, 헌종 때 풍양조씨, 철종 때에 다시 안동김씨 일문이 권력을 장악하여 외척세도정치(外戚勢道政治)가 행해지게 되었다. 왕실의 외척이 정권을 독차지함에 따라 그 척족일문(戚族一門)이 정부의 고관현직(高官顯職)을 거의 독점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른 전제적인 신권(臣權)의 비대는 왕권의 약화를 초래하게 되어 정치의 기강은 더욱 문란해졌다. 왕정(王政君主政治)이라는 것은 명목에 지나지 않게 되고, 유교적인 관료정치라는 것도 하나의 허구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따라서 과거제도도 19세기 들어 순조 이후에는 더욱 그 난맥상을 드러내었다. 응시자격에 엄격했던 신분적 제약은 무너져서 뇌물에 의한 응시, 합격증의 남발 등 시험의 공정성은 기할 수 없게 되었던 반면에, 권귀자(權貴者)에 의부(依附)하지 않고서는 출세하기가 어려웠다. 따라서 실제로 재능있는 학자는 이처럼 문란해진 과거제도를 외면하는 기풍이 더욱 현저해졌다.

중앙에서의 정치기강의 문란은 곧 지방의 행정과 재정의 난맥상을 초래하기 마련이어서, 지방의 수령(守令)이나 이서(吏胥)들의 탐학은 19세기 세도정치 하에서 현저하게 격심해졌다. 흔히 뇌물로 관직을 얻게 된 지방관(守令)은 재임 기간에 그의 재부(財富)를 보충하려 노력했을 뿐만 아니라, 더욱 늘리기에 급급하였다. 그들은 흔히 지방 출신의 하급 지방 관리(吏胥)들과 결탁하여 사리(私利)를 꾀하였다.

이서배(吏胥輩아전)는 원래부터 일정한 법정 급료가 없이 그들 자신이 맡은 실무적인 직장에서 그들의 생계를 꾸리게 되어 있었다. 그들이 애초에 그 직임을 맡기 위해서는 그 대가를 미리 수령에게 바쳐야 했다. 그것을 흔히 임채(任債) 또는 임뢰(任賂)라 했다. 고액의 돈을 내고 직임을 사는 것이다. 그리하여 일단 어떤 직임을 맡게 되면 수령에게 바친 대가를 벌충할 수밖에 없었다. 그 방법은 주로 두 가지가 있었다. 그 하나는 농민으로부터 어떠한 구실을 붙여서라도 되도록 많이 거둬들이는 길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소속 지방관청의 세곡(稅穀)이나 세전(稅錢)의 일부를 불법적으로 기취(欺取)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아전들의 거의 관습화된 악폐(惡弊)는 한편으로는 국가의 수조체제(收取體制)를 더욱 문란케 함으로써 국가 재정을 좀먹었으며, 다른 한편으로 의지할 곳 없는 일반 백성은 고혈을 빨리며 어육이 되어갔던 것이다.

19세기에도 국가 재정의 기반은 여전히 전세(田稅)로 귀일된 각종 명목의 부세(賦稅)와 정남(丁男)에게서 거두는 군포, 그리고 농민에게 미곡을 대여했다가 거두어들이는 이식(利息) 등이 가장 주요한 것이었다. 이것을 흔히 전정(田政군정(軍政환곡(還穀)삼정(三政)’이라 하여, 실질적으로 세 가지 재정적 기반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국가 재정은 환곡에 의존하는 경향이 더욱 현저하게 되어, 원래 농민에 대한 구급책에서 시작되었던 미곡대여의 국가적인 사업은 일종의 영리를 목적으로 한 국가적인 고리대사업으로 변질되었다.

수령·아전의 부정·탐학은 이러한 수취체제를 더욱 문란케 하였다. 그리하여 정치기강의 문란과 재정의 곤란은 서로 원인이 되어 양반관료체제는 물론, 농촌사회의 기반 또한 붕괴되어 갔다. 이러한 폐해는 누구에게나 절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근본적인 시정책은 제대로 강구되지가 않았다.

조선 왕조 후기에 들어서는 궁방, 관아에 소속되는 전지(田地)가 점점 증대되어, 이들 면세전은 확대되어갔던 반면에, 실제 전세(田稅)를 부과할 수 있는 전지의 총면적은 점점 더 감소되어 갔다. 여기에는 또 양반세가나 토호들이 간리(奸吏)들과 결탁하여 그들의 점유지를 부세 대상에서 누탈시켜서, 사점지임에도 불구하고 징세 대상에서 빠지게 된 은결(隱結)이 점점 더 증가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18세기 말에서 19세기 말에 이르는 사이에는 면세지·진황지·재해지의 면적은 증가된 반면에, 부세 대상 전지의 면적은 오히려 감소되었다.

실제로 전지에 대한 측량·조사(量田)20년마다 시행하게 되어 있으나, 정부에서는 해마다 징세를 위하여 재실(災實災害與否)이나 진기(陳起廢耕地起耕地)의 여부를 실지 답사하여 그 재해나 황폐의 정도에 따라 세율을 체감하여 주는 것이 상례였다. 이와 같은 관례는 도리어 수령이나 아전들에 역이용되어서, 피해도 없는 전지를 재해지로 허위보고하여, 징세감면을 통해 수령과 아전들이 사리사욕을 채웠다.

또한, 징세 내용에 따른 폐단은 일반적으로 남징·과징에 있었다. 전정(田政)은 토지의 결수를 기준으로 하여 받는 각종의 세였다. 이 토지세는 전세(田稅), 삼수미(三手米), 대동미(大同米), 결작(結作) 등 여러 종류가 있었으나 그 총계는 총 수확량의 10분의 1도 안 되었고, 이것은 결코 많은 양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지세가 사실상 무거웠던 것은 각종 부가세와 수수료 때문이었다. 대개 지방의 관례에 따르는 이러한 부가세와 수수료를 합치면, 수확고의 2분의 1이 될 정도로 많은 양을 징수하는 경우도 있었다. 게다가 관리들은 황폐한 진전에서도 세를 징수하였는데 이를 백지징세(白地徵稅)라고들 하였다. 또 사적으로 소비한 공금을 보충하기 위해 도결(都結)이라 하여 정액 이상의 세를 흔히 징수하였다.

군정(軍政)은 매정(每丁)에 대하여 군포 1필씩을 징수하였다. 비록 균역법(均役法)에 의해 반감되었다고는 하지만 전세보다 많은 양의 것이었다. 게다가 여기에 황구첨정(黃口簽丁백골징포(白骨徵布족징(族徵인징(隣徵) 등의 각종 협잡이 있어서 농민을 괴롭혔으니, 농민들이 곤란을 받기는 전정(田政)보다 이 군정(軍政)의 경우가 더 심하였다.

환곡(還穀)은 춘궁기에 가난한 농민에게 국가의 미곡을 빌려주었다가 추수기에 10분의 1의 모곡(耗穀)을 가산하여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모곡은 원래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인한 손실을 보충하는 뜻이 있었으나, 실제로는 이자의 구실을 하였다. 이리하여 빈민의 구제를 위한 환곡이 일종의 고리대로 변하여 그 폐해가 삼정(三政)중에서도 가장 심하였다.

관리들은 필요 이상의 양을 강제로 늑대(勒貸)하기도 하고, 반작(反作)이라 하여 출납 관계에 대한 허위 보고를 만들기도 하고, 허유(虛留)라 하여 창고에는 하나도 없으면서 문부에는 있는 것 같이 꾸미기도 하고, 반백(半白)이니 분백(分白)이니 하여 반은 겨를 섞어서 1석을 2석으로 만들기도 하는 갖가지 방법으로 농민을 괴롭혔던 것이다. 이렇게 지방 관리들은 농민으로부터 부당하게 거둬들이며 점점 살쪄 갔으며, 말단에서 행정을 담당하는 향리들 또한 그러하였다.

이러한 것들은 농촌사회의 몰락을 더욱 재촉하는 것이었다. 농민의 대다수가 영세민이며 소작농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흔히 공채 또는 사채에 허덕이게 되고, 마침내는 유망민·화전민으로 전락하고 혹은 도시로 유입되었다.

이에 따라 봉건적인 수취체제는 완전히 붕괴되어 갔으며, 이에 대처할 적극적인 재정적 조치나 개혁은 없이 국가 기관이 관영고리대업체나 다름없이 되었던 것이다.

유송(游松) 조병연 화백의 '홍매(紅梅)'

농민들의 불만과 불평은 각지에서 괘서(掛書방서(榜書) 등의 사건이 연거푸 일어나는 등 사회 내부에서 음성적인 형태를 띠고 나타나기도 하였으나, 이에 그치지 않고, 도적의 무리가 되어 각지에서 화적(火賊), 수적(水賊)이 횡행하였으며, 점차 조직화 되어 도적단들이 나타나기에 이르렀다.

이런 가운데 민란(民亂)이 또 빈발하였다. 그 주체는 물론 농민이었으나, 대개는 몰락한 불평양반인 잔반(殘班)들에 의해 지도되어 대규모의 반란으로 확대되는 경우가 많았다. 순조 때에 일어난 홍경래의 난은 그러한 대표적인 것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인심은 더욱 동요되어, 소규모의 민란은 거의 쉴 새 없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철종 때의 진주민란은 그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것이었으며, 곧 뒤를 이어 익산에서 농민들의 반란이 일어나고, 이와 때를 같이 해서 삼남(三南)의 거의 전역에서 농민들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러한 민란들은 대개가 악질관리의 제거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으나, 동시에 벌열(閥閱)정치 및 세도정치에 의하여 병든 양반사회 자체에 대한 반항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아래를 덜어서 위에 보태면 결국 기초가 허약해져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국가도 예외는 아니다. 농본민생(農本民生)의 정강을 내걸고, 실제로는 농민들을 상대로 핍박과 가렴주구를 일삼으며 제 살을 갉아먹는 어리석음을 범한 양반사대부 위정자들이 결국은 백성을 나라를 이 꼴로 병들게 한 것이었다.

/ 다음 호에는 한국유학 이야기 40번째로 '조선말 성리학의 재연'이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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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한 2021-12-20 04:22:36
유교도의 여러 단체가 있는데 최고 교육기구는 성균관대이며,문중별 종친회가 있고, 성균관도 석전대제로 유교의 부분집합중 하나임.

윤진한 2021-12-20 04:21:59
성균관의 정통 승계 성균관대는 국내외에서 6백년 넘는 역사를 행정법.국제관습법으로 인정받고 있음.@Royal성균관대.세계사의 교황반영, 교황윤허 서강대는 국제관습법상 성대 다음 Royal대 예우.패전국 일본 잔재이자, 불교 Monkey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는 한국영토에 주권.자격.학벌 없어왔음..*성균관대,개교 6백주년 맞아 개최한 학술회의. 볼로냐대(이탈리아), 파리 1대(프랑스), 옥스포드대(영국), 하이델베르크대(교황윤허,독일),야기엘로니안대(폴란드) 총장등 참석.

http://blog.daum.net/macmaca/1467

http://blog.daum.net/macmaca/733

@한국 유교 최고 제사장은 고종황제 후손인 황사손(이 원)임. 불교 Monkey 일본 항복후, 현재는 5,000만

윤진한 2021-12-20 04:20:42
프랑스.소련.폴란드등이 승인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제법.국내법적 위상을 상기하고, 패전국 일본잔재로 한국영토에 주권이 없어온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패전국 일본잔재로 적산재산 형태)를 국립대로 강행할때, 전국적인 반대와 서울대생들의 등록거부.자퇴등이 있었던 상황도 인식해야합니다.

국제법상 일본이 항복후, 포츠담선언(카이로선언 포함)에 따라, 한국영토에서 일본의 모든 주권은 없어왔음.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는 한국영토에 주권.자격.학벌이 없어왔음. 현행헌법 임시정부 구절(한일병합 무효, 을사조약등 불평등 조약 무효, 대일선전포고)에도 맞지 않는게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임.해방후 미군정부터 국사 성균관(성균관대)교육을 시켜온 나라 대한민국임.

국사 성균관(성균관대)나라. 조선.대한제국 유일무이 최고 교육기관 성

윤진한 2021-12-20 04:20:06
그리고 태학의 별칭도 가진 교육기구 성균관임)입니다. 중국 공산화 이후에도, 유교가 세계사 교육의 학설로 수천년 전통과 자격이 이해되어 왔고, 중국의 태학(한나라 태학, 위나라 태학), 국자감(수.당.송, 원.명.청의 국자감. 원.명.청의 국자감은 청나라 말기 경사대학당을 거쳐 베이징대로 승계)을 가르치는 세계사 때문에, 고구려 태학.신라 국학.고려 국자감, 조선.대한제국 성균관의 대학교육 역사가 상호보완되어, 학술적으로 성균관대(성균관의 교육기능 승계)의 한국 최고대학 자격이 세계사를 이해하는 유서깊은 외국대학 총장들이 성균관대 6백주년 행사에 참여한 것입니다. 중국의 문화대혁명으로, 유교가 한 때 침체를 겪었지만, 세계사 자격의 수천년 유교역사는 그대로 이어져서 교육되어 왔습니다.
@카이로선언이후 프

윤진한 2021-12-20 04:18:19
주권없는 왜구 서울대 중심 대중언론의 어떤 도전이나 위압이 있어도 국사,세계사, 헌법,국제법 자격으로 타당한 국사 성균관자격 성균관댸가, 조선.대한제국 유일무이 최고 교육기관 성균관의 정통을 승계하였기 때문, 한국 최고 대학 학벌이며 가장 오랜 역사의 성균관대 학벌임은 변치 않습니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왜곡을 겪었지만, 해방이후 미군정당시 등록만 하면 발행이 가능하던 대중언론들에서, 주권.자격.학벌없는 왜구 잔재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와 그 추종 카르텔이 형성되어, 성균관대에 항거해왔지만, 국사 성균관자격 성균관대 최고 학벌과 역사는 변하지 않고 이어져왔습니다. 국사, 세계사, 헌법, 국제법등을 종합하면 한국 최고 대학 성균관대는 600년 역사와 전통을 가진 宮 성균관대(泮宮,學宮의 별칭을 가진 성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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