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하 김형만의 한국유학이야기-40] 조선말 성리학의 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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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하 김형만의 한국유학이야기-40] 조선말 성리학의 재연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21.12.27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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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 퇴조 속 기성 성리학 실권세력으로 다시 등극
실학파 인사들 채제공 물러간 후 조정 채용 길 막혀 개혁 기획 상실
이기-주기론 구태 벗으며 새로운 이론 체계 정비 왕성한 활동 시작

[목포시민신문] 남인계 학자들을 중심으로 실학파(實學派ㅡ경제학파) 운동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동안 한때 유학계의 학풍이 일변한 감이 없지 않았으나, 완명(頑冥)한 당파적 감정으로, 정조 때 다소 등용되었던 실학파 인사들도 채제공이 물러간 후에는 갑자기 채용의 길이 막혔다. 또 이 학파는 때마침 서학(西學)에 물들거나 믿는다는 혐의를 받고 여러 해 동안 탄압을 받게 되자 세력이 크게 좌절되어, 학자들은 한갓 우울과 불평을 품을 뿐, 마침내 병든 나라와 좀먹은 국민을 구제하고 소생시키는데 그 많은 탁월한 경륜과 해박한 지식을 크게 펼쳐볼 기회조차 얻지 못하였다.

실학파가 저같이 부진함에 따라 이 학파 때문에 다소 세력을 잃었던 성리학은 다시 대두할 기회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때마침 경향 각지에 성리학을 연구하는 명유(名儒)가 배출됨에 따라 완전히 구세력을 만회하게 되었다. 그간 국민에게 염증과 공허감을 주며 형식에 흐르는 구태를 벗지 못하던 성리학은 새롭게 이론을 전개하고 체계를 정비하여 일신한 면목으로 왕성한 활동을 시험하기 시작하였다.

사칠리기론(四七理氣論)을 중심으로, 리기호발설(理氣互發說)과 기발리승설(氣發理乘說)로 서로 견해를 달리하는 퇴계학파와 율곡학파는 이때에 이르러 퇴계학파는 주리설을 주장하는 학파가 되고, 율곡학파는 다시 두 파로 나뉘어 한 파는 퇴계학파와 정반대 입장에서 주기설을 주장하게 되고, 또 한 파는 퇴계, 율곡 양 학파의 중간에 서서 주기·주리의 양설을 다 취하지 않고, 주리편에 약간의 접근을 보이면서, 리기겸지(理氣兼指)의 학설을 주장하는 중간파(절충파)가 되었다. 이 세 학파는 각각 문호를 세워 서로 자파(自派)의 학설을 주장하게 된다.

영남학파의 주리설은 퇴계의 고제들에 이어 갈암 이현일을 거쳐 한주 이진상에 이르러 리의 개념을 더한층 확충하여 심즉리(心卽理)’라고 단언하여 주리설의 절정을 이루었다.

근세 유학을 참으로 대표할 만한 학자는 세 사람이 있으니, 노사 기정진, 화서 이항로, 한주 이진상이다. 그중에 노사와 화서는 별로 전수(傳受)한 연원도 없이 다 각각 독력으로 평지에서 굴기한 독학자들이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노사는 관찰이 비범하고 연구가 독실하여 화담 서경덕, 퇴계 이황, 율곡 이이, 한주 이진상, 녹문 임성주와 더불어 리학(理學)의 육대가(六大家)’라 지칭된다.

노사 기정진의 주리설은 보통 다른 주리파 학자들이 이원적(二元的)으로 리를 기에 대립시켜서 생각하는 정도의 것이 아니라, 훨씬 그 정도를 높여 일원적(一元的)으로, 리와 기를 대립시키지 않고, 기를 리 가운데 포함되는 개념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주리파 중에서 이채를 띠는 동시에 그 최고봉이 되는 것이며, 또 그를 유리론자(唯理論者)라 칭하게 되는 것이다.

조선 초 성리학의 도입과 수용 과정을 통해 통치 이념으로 자리 잡은 성리학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사회 정치적 위기 속에서 가중되는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19세기라는 역사적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리학은 시대적 혼란의 원인을 뚜렷이 분석하거나 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가운데, 다른 한편에서 후기 실학(實學)으로 지칭되는 일부 학자들이 새로운 학문을 형성해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학풍은 지식인들의 주류를 형성하지 못하였다.

세도정치로 인한 타락과 부패한 관료의 학정에 이은 삼정의 문란은 민생을 도탄으로 몰아갔고, 여기에 서구 제국의 잇따른 무력시위와 개항 요구는 이러한 모순을 더욱 증대시켰다.

당시 성리학자들은 주자학을 기반으로 하여 나름대로 시대의 과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당면한 내우외환의 현실 문제를 성리학의 도통(道統)에 기반한 척사위정(斥邪衛正)의 문제로 현실화시키는 한편, 학문적 갈등을 주자학 이해의 바탕 위에서 해결하려 하였다.

기정진은 조선 성리학사의 말기에 위치하면서, 특히 그의 리기론의 핵심인 리일분수(理一分殊) 체계를 통해 성리학 자체 내의 오랜 논쟁이었던 인물성동이론을 종합 지양하여 해소하였으며, 19세기 제국의 침탈 등 시대적 혼란기 속에서 구체적인 현실 인식과 비판을 통해 내수외양론(內修外攘論)을 골자로 하는 경세론을 펼치는 한편, 실천적 도학 정신을 바탕으로 척사위정(斥邪衛正)의 기치를 높이 들어 한말 의병(義兵)의 진원(震源)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노사의 학문정신은 문인들에게 영향을 미쳐 노사학파라는 하나의 문호를 열기에 이르렀다.

화서 이항로는 평일에 애군여부(愛君如父) 우국여가(憂國如家)’ 여덟 글자를 선비가 힘쓸 바 표적이라고 문도들에게 역설하였다. 또 주자를 본받고 송시열을 흠모하여, 존왕양이(尊王攘夷)의 춘추대의를 주창하였다. 그러므로 후일 조선말기에 척사위정을 부르짖으며 창의호국(倡義護國) 운동을 제창한 이들은 거의 화서와 노사 연원을 받은 유자로 독점된 감이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화서의 주리론은 먼저 리기합일설을 반대하고, 리와 기는 대등한 것이 아니고 차등이 있는 것이니, 분명히 단정적으로 이물(二物)이라는 것을 역설하였다. 즉 리는 존귀하고 기는 비천하며, 리는 명령하는 것이고 기는 명령을 받는 것이며, 리는 주인이요 기는 객이 되는 것이니, 리가 주가 되고 기가 역()이 되면 만사가 다스려져서 천하가 평안할 것이나 만일 기가 주가 되고 리가 이(ㅡ버금)가 되면 만사가 어지러워 천하가 위태로울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 문도로는 김평묵, 최익현, 유중교, 유인석 등이 있다.

처음휴영(處陰休影) 처정식적(處靜息迹) : 그늘에 있으면 그림자가 없고, 고요하게 처신하면 자취가 그친다.

조선 리학계에서 서화담이 일찍이 주기론을 일원론적으로 주창하였으나, 그 후 얼마 동안은 이것을 주장하는 사람이 별로 없더니, 율곡이 퇴계의 리기호발설을 공격하자, 퇴계의 학설을 옹호하는 학자들이 리발설을 변명하고 주장한 나머지 율곡학파를 주기파라 부르게 되고, 또 율곡학파도 리발설을 공격하고 자파의 이론을 변명하고 연구한 나머지 자기들도 점차 기학의 입장을 취하게 되어, 마지막에는 당당히 주기설을 주장하는 단계까지 도달하였다.

율곡, 우암, 남당에 이어 녹문 임성주에 이르러서는성즉기(性卽氣)’를 주장하며, 우주의 본체 심()의 본체가 모두 한 개의 기라고 역설하여, 주기파는 그 정점에 도달한 것이다.

녹문은 특히 화담과 더불어 전후에 상응하여 기학의 일원론자이다. 그러므로 녹문은 보통 주기론자와 구별하여 유기론자(唯氣論者)라 하는 것이다.

조선 성리학이 리기문제에서 퇴계의 학설과 율곡의 학설 두 계통으로 나뉘어, 남인 중심의 영남학파는 퇴계의 설을 준봉하다가 주리파로 변하여 발전하고, 서인 중심의 기호학파는 율곡의 설을 옹호하다가 주기파로 변하여 발전하였으나, 그 중간에 자파(自派)를 떠나 반대파의 학설을 지지한 학자도 있고, 또 자파의 학설과 반대파의 학설을 절충하여 주장한 학자도 있었다.

한편 조선말에 두 거유(鉅儒)가 있었으니, 간재 전우와 면우 곽종석이다. 간재는 호남 출신이고 면우는 영남 출신으로, 두 사람 모두 화서, 노사와는 달리 뚜렷한 사승(師承)이 있었다. 간재는 율곡과 우암의 학술을 조술하였고 면우는 퇴계와 한주의 학문을 종지로 하여, 모두 방대한 저술을 남겼고 당시인들이 일세의 쌍벽으로 간주하였다.

진실로 그들의 학문과 기상은 천 길 절벽을 대한 듯하여 비록 시세(時勢)가 바뀌어도 끝내 뜻을 고치지 않았고 세인들이 완고하다고 비난하여도 의연하게 흔들리지 않았다. 깊은 곳에 궁거(窮居)하여 안신입명(安身立命)의 의리를 가르치며 부지런히 입언수교(立言垂敎)에 힘쓰면서 일생을 마쳤다. 이로 보아 두 사람은 조선 말기를 대표하는 산림유(山林儒)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간재의 유자무책변(儒者無策辨)이나 면우의 나라는 망하여도 도는 망하지 않으며(國可亡, 道不可亡), 군주는 굴복할지라도 도는 굴복하지 않는다(君可屈, 道不可屈)’는 말로 미루어보더라도, 이들의 출처관(出處觀)과 시국관(時局觀)은 서로 비슷한 점이 있는 것 같다. 유학의 종장이라는 중망을 받던 이들이 평일에는 리기심성을 논하고 의리를 말하다가 국난에 처하여서는 태백산 속으로, 바닷가 섬으로 숨어 들어간 구차한 처신에 국내의 많은 인사로부터 나유(懦儒)’라는 기롱을 받고, 일부 유자들로부터 부유(腐儒)’라는 지탄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 다음 호에는 한국유학 이야기 41번째로,' 벽이단론'이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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