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리의 생동력 뒷받침한 민족사 정화 근거 작용
1866년 병인양요 이후 위정척사로 전승 이항로·기정진·최익현 등 대표
천주교와 통상 요구 등 외세 배척 운동…한말엔 반일 독립운동 이어져
[목포시민신문] 벽이단론(闢異端論)이란 유학 이외의 여타 이단(異端)과 사설(邪說)을 배척함으로써 정통 유학의 순수성을 보존하려는 이론을 말한다. 이단이란 도(道)의 그릇된 형태를 말하며, ‘벽이단’이란 ‘이단을 물리친다’는 의미이다. 이 벽이단의 정신에는 밖으로는 이단에 대립하는 자세와 함께 안으로는 정도(正道)를 보존하려는 의지가 병행되어 있다. 벽이단 정신의 본질적 의미는 진리의 역사적·현실적 판단에 있으며, 이단에 대한 무조건적인 배척 정신에 있는 것은 아니다.
공자는 ‘이단을 공부하면 해로울 뿐이다’ 했으며, 맹자는 양주의 위아주의(爲我主義)와 묵적의 겸애주의(兼愛主義)를 배척하며, 벽이단 정신의 논리적 체계를 수립함과 동시에 후대 유학자들에게 정통주의의 전형을 제시하였다. 맹자의 강력한 벽이단 정신은 ‘양주와 묵적의 도가 사라지지 않으면 공자의 도가 드러나지 않는다’는 말로 표현되고 있으며, 그러한 의미에서 맹자는 유학사에 있어서 변론을 통한 벽이단론의 사실상 선구자라 할 수 있다.
당나라 말기에 이르러 불교와 도교의 횡행으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가 야기되면서 다시 유학의 입장에서 불교와 도교를 배척하려는 경향이 대두되었다. 이러한 경향을 주도했던 인물은 한유·이고 등이었다.
이들을 이어 송대 성리학자들은 불교와 도교에 대한 비판 과정에서 벽이단의 논리를 더욱 정밀하게 하였으며, 그것은 또한 성리학 자체의 문제에 대한 논리적 체계화에 있어서 중요한 계기를 이루었다. 즉 성리학은 불교와 도교의 철학 체계에서 일정한 영향을 받았지만, 사실상 그것이 유학사에 남긴 업적은 유학의 근본정신을 철학적으로 완성시켜 이론적으로 불교와 도교를 극복한 것이었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불교와 도교에 대한 벽이단의 정신은 유학을 사상적으로 정립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성리학의 벽이단 정신은 성리학 학파 간의 대립에 있어 상대방을 비판하는 논리로도 적용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상호 간에 지니고 있던 유학의 근본이념을 발전시키는 긍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명말·청초에는 서학(西學)이 유입되어 유학의 전통과 제도를 부정하게 되자 유학은 서학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배척하였는데 이 역시 벽이단 정신의 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여말·선초에 성리학이 발흥하면서 그 배타성을 드러내어, 기존의 사상체계를 주도하고 있었던 불교를 배척하였다. 특히 정도전은 〈불씨잡변〉을 저술하여 불교 교리에 대해 논리 정연한 비판을 가하였다는 점에서 조선 초기의 가장 특출한 벽이단론자였다.
이러한 벽이단 정신은 조선 전기의 사림파에 의해 의리정신으로 계승되었으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통해서는 민족의 자존과 주체 의식을 선양하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영·정조 때부터는 서양문명과 천주교라는 새로운 세력이 조선에 유입되고, 서양의 선박이 해안에 출몰하는 등 제국주의 세력의 직접적인 침략 움직임도 대두되었다. 이러한 상황의 변화에 대해 유학에서는 위정척사(衛正斥邪) 운동의 전개로 대응하였다. 그것은 국가의 전통 질서를 보존하려는 주체의식의 발로였으며, 그 저변에는 또한 벽이단 정신이 놓여있었다.
1876년 병자수호조약 체결 이후 일제의 침략이 가속화되자 대중의 자발적인 척왜(斥倭) 사상은 의병(義兵) 활동으로 구체화 되었다. 이들의 활동에는 이항로와 그의 제자인 김평묵·최익현·유중교·유인석 등의 유학자들에 의해 제공된 벽이단 정신이 이념적 지주로 역할 하였다.
조선의 역사를 통해서 이민족이 침략해 올 때마다 이들 외적을 오랑캐로 규정하고 배척했던 것은 존왕양이(尊王攘夷)의 춘추대의(春秋大義)와 위정척사(衛正斥邪)의 벽이단(闢異端) 정신이 주체 의식의 유학적 표현으로 전개되었던 결과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조선의 유학은 송대 성리학의 벽이단 정신을 그 핵심 속에 융합하여 엄밀한 비판 정신을 발휘하였다는 것에서 그 기본적인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비판 정신은 조선 초 불교 세력을 배척하는 데 효과적으로 작용하였으며, 조선유학사 전체를 통하여 양명학·서학 등 반주자학적인 사상을 철저히 배격함으로써 주자학적 정통성의 관철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러한 국가적 이념의 통일성은 미약한 국력으로도 국가의 안정과 자주성을 확보하는데 기여하였으며, 비록 벽이단 정신의 과잉으로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는 폐단을 낳기도 하였으나 전체적으로는 의리 정신의 생동력을 뒷받침해 주며 민족사의 정화로서 유학 이념의 저력을 발휘하게 해주는 근거로 작용하였다.
위정척사론은 공자와 맹자·주자로 이어지는 정학(正學)의 도통(道統)을 지키고 불교·도교·육왕학(陸王學)·서학(西學) 등 사학(邪學)을 배척하는 유교의 벽이단 이념을 대변하는 사상이다. 다만 여기서 정학이란 유학을 말하고 사학이란 서양의 학문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서 위정척사론이 서학의 충격에 대응해서 나타난 것은 병인양요(1866) 이후이며, 그 대표적인 인물로는 이항로·기정진·김평묵·최익현·유인석 등이 있다. 당시 위정척사론을 불러일으킨 서양이란 이질성의 충격은 역사적으로 두 단계로 나타나고 있다. 첫째는 초기적 형태로서 천주교와 같은 문화적인 형태이고, 둘째는 후기적 형태로서 통상요구와 같은 구체적인 정치·경제적 형태였다.
서양의 충격이 주로 천주교와 같은 문화적인 초기 형태였을 때 이에 대응하기 위한 위정척사 사상은 문화적으로 자기질서를 강조, 보존하려는 형태로 나타났다. 이것이 18세기의 벽위사상(闢衛思想)이었다. 서양의 충격이 통상의 강요나 이것을 관철하기 위한 물리적인 공격으로 나타났을 때, 한말의 위정척사 사상은 기층사회 자체를 보존 수호하기 위한 정치적, 민족적 형태로 나타났다. 이것이 19세기 중반의 어양사상(禦洋思想)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이질적 충격은 일본이 가세하게 됨으로써 더욱 복잡하게 되었다. 여기서 한말의 위정척사 사상은 일본의 개항(開港)을 거부하는 척화의식(斥和意識)으로 나타났고, 그 같은 일본의 충격이 제국주의 침략과 같은 구체적인 모순으로 전환되던 19세기 말엽부터는 여기에 민족적으로 저항하는 의병(義兵)과 같은 구체적인 형태로 표출되었다.
서양의 충격에 대한 반응으로서 나타난 근세의 위정척사론은 종래의 벽위론(闢衛論)과는 달리 서학에 대한 이념적 투쟁에 그치지 않고, 그 배후의 구미 자본주의 열강에 대한 반침략적 대결의 자세를 견지하였다. 또한, 이러한 위정척사의 의식 성향은 당시 도학의 사림(士林)조직에 널리 공유되어 있었다.
사림들은 성리학·의리론 등에 있어 유파별로 입장의 차이가 있었지만, 대외적 도전에 직면하여 이에 대응하는 행동양식에 있어서는 ‘순의정신(殉義精神)’의 발휘라는 일정한 공동성을 견지하고 있었다. 물론 이들이 보여준 발현형태는 다양하다.
첫째는 의거(義擧)하여 적을 토벌하고 물리치겠다(擧義掃淸)는 입장을 가진 화서학파와 노사학파, 둘째는 목숨을 바쳐 절의를 지키겠다(致命遂志)는 연재(송병선)학파와 의당(박세화)학파, 셋째는 바닷가 섬으로 들어가 전통을 지키겠다(去之守舊)는 간재학파, 넷째는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은둔하여 안정하겠다(入山自靖)는 면우학파 등이 있다. 이 중에서 거의소청의 노선을 견지하여 의병활동을 주도한 화서학파와 노사학파는 이른바 위정척사파로 지칭되며, 그들이 보인 행동양식은 주자학적 사유에 바탕을 둔 정치적 성향을 가장 철두철미하게 대변하였다.
위정척사 운동이 끼친 영향과 가치를 말하자면, 외세를 배척하는 운동 가운데 일본을 배척하는 운동은 국권을 옹호하는 데 그 공적이 실로 많았다. 그러나 기타의 서양사상을 배척하는 것이라든지, 또 옛 사상과 습관을 완고하게 고수하는 운동과 같은 것은 근대 조선의 개화혁신(開化革新)에 있어 장애물이 되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그들의 이 수구(守舊)운동이 하나부터 열까지 전혀 유해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그 변혁기에는 파괴에 급급한 나머지 옛 문화 전통의 아름다운 점과 장점까지도 잃어버리는 폐단이 있는 것처럼, 최근 외국으로부터 새로운 문화 사상의 수입에 급급하여 종래의 유교문화 가운데 인륜도덕(人倫道德)과 같은 것을 파괴하려는 폐단이 있는 것을 방지하였다. 그런 면에 있어서는 이 운동이 마치 방파제와 같이 적지 않은 효력을 보여준 것은 또한 속일 수 없는 사실이다.
다음 호에는 한국유학 42번째 이야기로, '동학의 발생'이 연재됩니다.
부처 Monkey처럼 창조신보다 높다는 불교에 영향받아 일본불교계 일본 신도는 하느님보다 높다는 성씨없는 점쇠賤民일본천황(후발로 하급군인들이 옹립)의 존재때문에 종교성이 없어, 일제 강점기때, 한국영토에서 수천년 세계종교 유교를 왜곡하다가, 원자탄 맞고 패전.이후 유교국으로 복귀한 한국에서 문제없다가, 최근 다시 루머.야사 형식으로, 학교교육을 무시하고, 일제잔재로 남은 세력들을 통해 일본 신도처럼 유교가 종교가 아니라며 생경한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한국에 주권.자격.학벌없는 불교 Monkey계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나 초급대출신등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