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영의 희망편지] "감정"이라는 우주를 유영하고 있는 건 아닐까
상태바
[김희영의 희망편지] "감정"이라는 우주를 유영하고 있는 건 아닐까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22.01.28 09:5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목포시민신문] 찻잔에 담긴 타인의 동경이 이토록 상냥하고 따뜻한 적이 있던가. 물결 하나 일지 않는, 어느 고요한 호수처럼 커피잔은 고즈넉했다. 침묵으로 일관했던 수많은 하루 중, 오늘은 유난히도 수다가 길어졌다. 타인의 따뜻한 경청 때문이었을까. 감추어두었던 속내를 꺼내 보였던 건 아니었다. 우스울 것도 없는, 그저 실없는 농담이나 이야기들을 늘어뜨렸다. 젊음을 그리워하기도, 나이 듦을 한탄하기도, 도전에 대해 희망차보기도, 실패에 대해 낙담해보기도 한 대화들. 예전 같으면 의미 있는 대화들이라고 여겼을 말들이, 지금은 그저 부질없는 오지랖이 아니었나 싶은, 겉으로 꾸며진 듯한 그런 말들.

경청하는 이의 눈은 난처해하면서도 한편으론 아늑해 보였다. 찻잔의 잔잔한 호수처럼, 그 사람의 두 눈도 아늑하고 깊었다. 신나게 옛일들을 쏟아내다 문득 입을 다물어버렸다. 어느 순간 그가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아닌, 다 알고 있다는 듯한 눈빛이 되었을 때였다. 아차, 내가 주제넘었구나. 머리를 저었다.

내가 생각하는 멋진 어른의 기준이 있었다. 누군가의 힘듦을 끝까지 들어주고, 고개를 끄덕여주고, 눈물을 흘리며 힘들어할 때는 말없이 안아주기도 하는. 명확한 해답을 제시해줄 순 없어도, 제 안의 답을 찾을 수 있게끔 기다려 줄 줄도 아는. 그러나 그런 어른이 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공감한다는 말로는 타인에게 전혀 위로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말을 덧붙이게 되었고, 그 말에 살이 붙게 되었고, 살이 붙은 말의 몸짓은 결국 무너지지 않을 단단한 참견이 되었다. 참견하는 어른은 되지 말자고 그토록 스스로를 타일렀는데, 자각하고 있으면서도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타인과의 대화가 어색해지게 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내 인생 사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도, 타인의 인생에 왈가왈부 떠들어대는 것도 주제넘은 참견이 되는 것 같았다. 정말 편한 친구가 아니면 무슨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다. 결국 어색한 대화는 '왜 이런 말을 하고 있지?'로 귀결되곤 했다.

최근 치유하는 글쓰기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한 적이 있었다. 1:1로 만나 수필 쓰는 법을 간단히 가르쳐주고, 그 사람의 고민과 걱정을 들어주는 프로그램이었다. 그걸 진행하면서 나는 우리나라의 상담원으로 일하시는 분들이 정말 힘드시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들어주는 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정답을 찾아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 시간에 나는 그동안 단단히 쌓아왔던 나의 무엇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 기분을 매주마다 겪었다. 프로그램을 듣는 분들이 흡족해하며 돌아서도, 나는 그렇지 못했다. 속으로 몇 번이나 '내가 정말 도움이 되었을까?', '단순히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될까?'라는 질문을 끝없이 던졌다. 질문은 허공에서 부서져서, 다시 마음 위에 눈으로 쌓였다.

치유하는 글쓰기는 두 달간의 여정으로 끝이 났지만, 어디서 이야기를 들으셨는지 또 언제 프로그램을 진행하느냐고 물으시는 분들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선뜻 "내년에도 하겠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정말 유익한 시간이었느냐고, 상처는 어느 정도 치유가 된 것 같았느냐고, 내가 정말 도움이 되었느냐고. 이 질문에 확신이 생길만한 답이 내 안에 생기지 않는 한 나는 다시 그 프로그램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최근 소설을 다시 쓰고, 읽기 시작하면서 '공감력'에 대한 결핍은 더욱더 깊어졌다. 어떤 한 인물이 되어 이야기를 이끌어 나갈 때, 어느 순간 길을 잃었다. 자신만의 독특한 성격과 삶의 배경과 가치관을 가진 인물은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가게 될까? 예전 같으면 지극히 작위적인 이야기들을 썼을 테다. 그리고 이런 인물이라면 '반드시' 이럴 것만 같다는 식의 설정을 했을 테다. 예를 들면 '교회의 목사는 반드시 착하다' 라던지, '범죄자는 반드시 나쁘다' 라던지. 그러나 그 '반드시'의 법칙을 깨는 설정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인물 조사를 위해 다큐멘터리나 뉴스에 집중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점점 더 사람을 모르게 되었다. 이럴 때, 이런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글쎄, 내가 쓴 글 속의 인물이더라도, 잘 안다고 말할 자신이 없게 되었다.

다시 고요한 찻잔으로 돌아와서, 나는 그 사람의 두 눈에 담긴 침묵을 보았다. 어떤 때의 나는 타인의 마음을 쉽게 이해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아주 오만한 판단이었다. 나는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있는 중에도, 그 사람의 마음을 전혀 읽을 수 없었다. 두 눈에 담긴 고요는 그야말로 침묵이었다. 내 말에 경청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찻잔을 건드리지 않으면 파동조차 일지 않는 커피처럼. 커피의 그 잔잔하고 시커먼 적막처럼. 나 또한 말과 생각과 감정 따위의 것들을 담아두게 되었다. 그 고요한 커피잔 속에.

나는 타인의 마음을 전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계속해서 누군가를 공감하기 위해 애쓰고, 노력할 것이다. 그 마음이 작가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일 테니까. 공감은 때론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과 제스처만으로 해결되지 않았다. 실제로 몸을 껴안아주지 않더라도, 마음이 따스함을 느낄 수 있어야 하는 것. 공감이라는 건, 나의 영혼이 타인의 영혼을 안아주는 게 아닐까. 모든 사람의 감정과 생각은 획일적이지 않으니까. 우리는 어쩌면 숱하게 흩어진 별들로, 감정이라는 우주를 유영하고 있는 건 아닐까. 단순히 기분이 좋다, 나쁘다로 판단할 수 없는. 겉으로는 잔잔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해일이 휘몰아칠 수도 있는. 감정이라는 것은, 그만큼 공감하기 힘든 거대한 우주일 것이라고. 그러니 공감이라는 말도 속단할 수 없는, 내가 당신의 마음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한 애씀인 것이라고.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