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하 김형만의 한국유학이야기-42] 동학의 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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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하 김형만의 한국유학이야기-42] 동학의 발생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22.01.28 14:02
  •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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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천 평등사상 기반 동학 조선말 사회적 모순 해결 대안 부상
보국안민의 부패한 정치 개혁 주장…시운(時運)따라 해결할 것 믿어
종교운동 그치지 않고 농민 중심 현실 개척 사회운동으로 떠올라

[목포시민신문] 18세기 이후 신분 계층의 분해는 봉건적 신분 관계가 동요되는 실마리가 되었으며, 19세기에 들면서 왕실 외척에 의한 문벌정치(門閥政治) 아래에서 정치의 기강은 무너지고, 특히 삼정(三政)의 문란으로 민생은 도탄에 빠져, 유학은 이미 왕도정치의 이념이나 경국제민(經國濟民)의 실현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미 오래전부터 정권에서 이탈된 양반은 확고한 경제적 기반이 없이는 점차로 몰락의 길을 걸어야 했고, 그리하여 오래전에 몰락한 양반의 후예는 실질적으로 평민이나 다름없는 신분 계층으로 전락하여 갔다. 더욱이 이들에게는 유교가 실생활에 도움을 주지 못함에 따라, 믿을 만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조선왕조 들어 억불책(抑佛策)으로 말미암아 그 교세가 위축된 불교는 후기에 들어서 더욱 쇠미해갔다. 그러한 속에서도 불교는 명복의 기원이나 치병(治病구복(求福)의 기도와 같은 개인 구제의 종교로서, 궁중·양반가나 일반 민간의 부녀자 사이에서 그 명맥을 유지하며, 토속신앙과 결부되어 일종의 미신으로 변해서 하나의 타락된 종교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도교 또한, 한편으로는 민간신앙화되어 제천(祭天제성(祭星) 등으로 미신화되어 갔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노자·장자의 허무사상이 일부 유학자들의 은둔사상, 현실초월의 태도를 뒷받침해주어, 고명인사로서 선인(仙人)을 자처하는 풍조는 오래 계승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관념은 정치적으로 불우한 양반 중에서, 자신이 소외당했거나 불만스럽게 생각되는 현실에 대해서 외면하거나 세속사를 일체 초월하는 자세를 취하게 될 때, 노자·장자의 사상으로 접근되기가 쉬웠다.

따라서 전통적으로 정치적·사회적 지도 이념이었던 유교의 위신이 떨어졌다고 해서 양반지배계급에 있어서 불교나 도교가 유교에 대신할 수는 없었다. 일반 국민의 대다수는 무격(巫覡)을 대표로 하는 고래(古來)의 샤머니즘에 침염되어 있었으며 그 근저에는 귀신신앙이 깊이 뿌리박혀 있었던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정감록과 같은 예언 사상이 널리 유포되었다. 그것은 인생의 길흉·화복이나 왕조의 운명·성쇠를 예언하는 비기(祕記) 등을 믿어서 유언비어와 같이 민간에 전파되어 인심을 현혹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전란이나 사회적 불안이 쌓였을 때 그 같은 예언 사상이 널리 전파되게 마련이었다. 이와 같은 예언 사상은 현실 부정적인 성격을 지녀서 정치적 불만은 그러한 비기에 의해서 표시되고 그것이 또 반란에 이용되었다. 실제로 19세기 후반기에 들어서 이러한 사상을 이용한 괘서(掛書) 사건이 빈발하였다.

결국 유교정치의 파탄, 유교의 권위 실추가 국민을 사상적인 혼돈 속에 몰아넣었으며, 국민 전반에 걸친 정신적인 지주가 될 수 있는 어떤 새로운 이념이 요구되는 상황이었다.

종래 천주교는 양반 중에서 정권에 참여하지 못한 남인(南人)의 시파(時派) 학자들이 많이 믿었었다. 그러나 이들의 수는 박해와 더불어 점점 줄어들고, 19세기에 이르면 대체로 신분이 높은 사람보다 낮은 사람, 유식한 사람보다 무식한 사람, 부유한 사람보다 가난한 사람들이 천주교의 신자가 되었다. 그러나 주로 서울과 그 부근에 신자가 집중되어 있어서, 천주교가 농촌의 종교이기보다는 도시 중심의 종교였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이 천주교에 이끌린 것은 우선 모든 인간은 한결같이 천주(天主)의 자녀라는 평등사상에 공명한 때문이었음이 분명하다. 중인이나 상민들이 천주의 자녀로서 양반들과 동등한 자격으로 천주를 예배할 수 있었다는 것은 감격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부녀자들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고 생각된다. 또 현실에 낙망한 그들에게 천국에 대한 설교는 그대로 복된 소식이었을 것이다. 내세신앙은 그들이 천주교에 귀의한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였을 것으로 믿어진다. 이로써 천주교의 양반사회에 대한 비판이 더욱 심각해져 가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천주교가 서울 중심으로 퍼져 갔다고 하면, 동학(東學)은 농촌 속에서 자라났다. 농민들의 사회적 불만이 동학이라는 종교운동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동학은 철종 때에 최제우가 제창하기 시작하였다. ··선 삼교(三敎)의 장점을 취하여 서학(西學, 천주교)에 대항한다고 하였으나, 그 교리 속에는 천주교에서 취한 것도 있으며, 또 민간의 무격신앙에서 받아들인 것도 있었다. 이리하여 이루어진 그의 사상은 동경대전·용담유사등에 나타나 있다.

그는 인내천(人乃天), 즉 인간과 천(, )을 한 가지로 생각하였다. 그에 의하면 인심(人心)은 곧 천심(天心)이요, 사람을 섬기는 것은 곧 천()을 섬기는 것과 같았다. 이러한 사상은 사회적인 신분이나 계급을 초월한 모든 인간의 평등을 부르짖은 것이었다. 사회적으로 압박받는 농민들에게 환영받은 까닭이 주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동학이 농민들에게 환영받은 또 하나의 이유는 주문(呪文)을 외우고 산제(山祭)를 지내는 등 농민들의 전통적인 무격신앙과 서로 통하는 점이 있어서 쉽사리 이해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월정(月汀) 정주상 선생의 '웅비(雄飛)' ㅡ 힘차고 씩씩하게 뻗어 나아감.

일찍이 몰락한 양반의 후예인 경주의 최제우는 가운의 영락과 양반사회의 모순과 파탄 속에서 사회윤리의 퇴폐상을 절감했다. 그는 또 조선 내에서 천주교 교세가 팽창하여 가는 상황에서 서양인의 중국 침공 소식을 전해 듣고 국가의 운명에 대한 위기감에 직면하여, 이러한 내외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미 퇴폐한 종래의 전통사상을 지양하고 새로운 윤리관의 확립이 필요하며, 또 서양세력에 대항하기 위해서도 서학(천주교)에 대항할 수 있는 새로운 종교적 힘에 기대야 할 것이라고 믿게 되었고, 그가 창도한 새 종교의 이름을 동학(東學)이라 했다. 그가 창도한 동학은 정신적인 지주를 잃었던 몰락한 양반의 후예, 즉 잔반(殘班) 계층과 빈궁과 질병 속에서 허덕이는 농민들에 의해서 널리 받아 들여져, 하나의 교단적인 조직을 이루어갔다. 동학의 세가 날로 번성하여 가는 것을 본 정부는 민심을 미혹시키는 또 하나의 사교(邪敎)로 간주하여 이를 금압(禁壓)하게 되었다. 철종 14(1863) 말에 교조 최제우와 그의 무리 20여 명이 체포되어, 이듬해 고종 원년에 최제우는 사형에 처해졌다. 이로써 동학교도들은 일시 흩어지는 듯했으나, 이미 민중 속에 뿌리박은 동학의 교세는 다시 2세 교주 최시형의 은밀한 노력에 의해 만회·확장에 성공하였다. 고종이 즉위하여 대원군이 집권하게 되면서 서원의 철폐, 양반에 대한 탄압, 천주교에 대한 박해 등으로 빚어진 정치적·사회적 추세는 도리어 동학의 교세를 확장시키기에 유리한 풍토를 마련해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하여 경상·전라·충청 삼도를 위시하여 그 밖의 지방에까지 널리 퍼지게 되었다.

동학은 잔반(殘班) 계층과 농민들의 처지를 대변하는 것이며, 외세의 위협에 대하여 국가의 운명을 고수하려는 염원이 아울러 깃들어 있는 것이기도 했다. 동학은 퇴폐한 유교윤리나 불교·도교와 같은 기왕의 외래 종교를 부정하고, 새로 유포되는 서학(천주교)을 배격하면서, 새로운 종교적 신앙의 힘을 얻어 위기에 당면한 내적, 외적 상황을 극복해야 하며, 또 극복할 수 있는 것으로 믿었다.

동학은 종래의 유교철학의 일면을 기저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불교적·도교적 요소 나아가서는 서학(천주교)의 형식까지도 섭취한 흔적이 있는 반면에, 이들을 배격·거부하였다. 또한, 음양오행설을 섭취하고 정감록에서는 궁을(弓乙)’을 끌어들여 부적으로 삼아, 지상에 천국을 상징하였다는 것이다. 그것이 유교윤리와 퇴폐한 양반적인 사회 질서를 부정하고 지상천국을 예언하는 데 있어서 반봉건적이고 혁명적일 수도 있는 성격을 품게 되는 것이었으며, 또 외세의 위협에 거항(拒抗)하는 데 있어서 민족주의적인 국가의식이 배태될 수 있는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의 종교 사상이었으며, 또한 민족적 종교로서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염원하는 사회사상적인 일면을 지녔던 것이다.

이처럼 동학은 보국안민을 부르짖으며, 부패한 정치를 개혁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시운(時運)에 따라서 때가 오면 이는 가능해질 것이라고 주장하고 또 믿었다.

한마디로 동학은 단순히 종교운동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농민을 중심으로 현실을 개척하려는 사회운동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다음 호에는 한국유학 이야기 43번째로, '한말 유학의 민족의식'이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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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한 2022-01-29 07:53:53
대한제국 유일무이 최고교육기관 성균관승계,한국 最古.最高대).Royal서강대(세계사반영,교황윤허,성대다음예우)는 일류,명문.주권,자격,학벌없이 대중언론항거해온 패전국奴隸.賤民불교Monkey서울대.주권,자격,학벌없는 서울대.추종세력 지속청산!
http://blog.daum.net/macmaca/733

http://blog.daum.net/macmaca/2967

윤진한 2022-01-29 07:53:10
복구령으로 전국민이 조선국교 유교의 한문성명.본관을 의무등록하는 행정법.관습법상 유교국임은 변치않으며 5,000만이 유교도임.@인도에서 불교도는,불가촉賤民.조계종승려賤民한국과비슷.강점기 하느님에 덤비며(창조신내리까는 부처처럼)유교부정,불교Monkey일본.하느님보다높다는 성씨없는 일본점쇠賤民.후발천황(점쇠가 돌쇠賤民.불교Monkey서울대 전신 경성제대설립)옹립.한국은 세계종교유교국.수천년 유교,하느님,조상신,공자 숭배.해방후 조선성명복구령 전국민이 행정법.관습법상 유교국복귀. 동아시아(중국,한국,베트남,몽고) 세계종교 유교국중 하나인 한국이 불교Monkey 일본의 강점기를 겪으며 대중언론등에서 유교가 많이 왜곡되고 있음.http://blog.daum.net/macmaca/3131@Royal성균관대(조선.대한제

윤진한 2022-01-29 07:52:16
황사손(이 원)임. 불교 Monkey 일본 항복후, 현재는 5,000만 유교도의 여러 단체가 있는데 최고 교육기구는 성균관대이며,문중별 종친회가 있고, 성균관도 석전대제로 유교의 부분집합중 하나임.@일제강점기 강제포교된 일본 신도(불교), 불교, 기독교는 주권없음. 강점기에 피어난 신흥종교인 원불교등도 주권없음.

주권없는 패전국잔재 奴隸.賤民이자, 하느님.창조신을 부정하는 Chimpanzee계열 불교일본서울대Monkey와 추종세력들이 학교교육 세계사의 동아시아 세계종교 유교,윤리의 종교교육 유교, 국사등과 달리, 일본강점기때 일본이 유교를 종교아닌 사회규범으로 했으니까, 유교가 종교아니라고 최근 다시 왜곡하는데,이는 일제잔재 대중언론에 포진하여 루머수준으로 유교에 도전하는것임.한국은 미군정때,조선성명복구

윤진한 2022-01-29 07:51:24
유교나, 가톨릭이나, 후발로 만들어진 이단.도전신앙들은,동아시아에서는 전부 유교를 모방하여 다른것 섞은것이고 서유럽은 가톨릭 모방하여 다른것 섞은것에 불과함. @동아시아 세계종교인 유교나, 서유럽의 세계종교인 가톨릭의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절대적 초월자이십니다.

@ 공자님의 시호. 하늘이 보내신 성자이신 성인 임금 공자님은 황제 칭호인 문선제(文宣帝).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圣文宣王)의 오랜 전통으로 호칭되어 오고 있습니다.聖人에 이르신 스승(至聖先師). 은나라 왕족의 후손이신 공자님. 참고로 하면, 공자님 아버지 시호는 계성왕(啓聖王)이시고 공자님 어머니 시호는 계성왕 부인(啓聖王夫人)이십니다.

http://blog.daum.net/macmaca/3127@한국 유교 최고 제사장은 고종황제 후손인 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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