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하 김형만의 한국유학 이야기-43]한말 유학의 민족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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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하 김형만의 한국유학 이야기-43]한말 유학의 민족의식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22.02.11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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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진운 결정하는 개혁과 발전 장애 요인 지목 받으며 쇠락
유생 중심 민생 등진 채 권력화되면서 척왜양이 척사적 의리정신 강화
박은식, 신채호, 정인보 등 ‘조선사 개척자’로 국권회복운동 중추적 역할

[목포시민신문]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추구해 왔던 조선 정부가 이미 유교 정신을 망각하고 부패한 권세가에 좌우되어 민중을 위한 정치 이념을 실현하지 못하고 있을 때, 기독교 신앙이나 동학의 전파에 상당수의 대중이 귀속하자 사회적인 분열과 불안정은 더욱 가속되었다.

따라서 이미 19세기 후반은 조선조 사회가 정치적으로 붕괴하는 과정에 있었으며, 사림 계층과 농민 대중의 전통 질서에 대한 집착은 더욱 폐쇄화·보수화되어 갔다.

이때 서학의 문화적 전래에 뒤따라 서양의 군사력이 한반도 해안에 밀어닥치자 국가적 위기의식은 절박하게 감지되었다.

고종의 즉위와 함께 대원군이 집권하면서 척족 세력을 물리치고 왕권을 강화하며, 국내의 제도 개혁을 추구하고자 하였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가 거듭 일어나자 국가의 존망을 걸고 서양의 침략을 격퇴하였으나, 서양에 대한 적대감의 고조와 더불어 배타적인 폐쇄 정책은 격변하는 역사의 조류를 외면하는 결과를 낳았으며, 새롭게 밀어닥치는 외세의 세찬 물결 앞에서 자기를 가늠하고 지킬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고 표류하다가, 마침내 조선조의 멸망과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라는 민족적 수모를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국가 존립의 위기를 맞이하게 된 절박한 상황에서 유학자들은 민족의 존속을 위해 유교 이념의 의리정신을 바탕으로 민족의식을 발양하고 실천했던 것이며, 또한 이질적인 서양 문화에 대한 배척·비판은 전통문화의 자기보존 의지, 주체적 자주의식으로 표현되었던 것이다.

한말에 의리정신을 구현했던 인물로서, 1기에는 거의 모든 유학자가 척사위정(斥邪衛正)’을 주장하는 벽이단론(闢異端論)’을 통해 의리정신을 제시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특히 조선조 유학의 정통을 이루는 리학파의 중심인물인 이항로와 기정진 등을 통하여 척양척왜(斥洋斥倭)의 척사론적(斥邪論的) 의리정신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위정척사파의 시대 상황의 위기론이나 외국 세력에 대한 배척적인 자주론은 제2기에 와서 이항로의 제자인 김평묵·유중교·최익현 등에 의하여 전승되고 확대되었다. 이들도 초기에는 척양척왜의 폐쇄적인 방어 정책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개항 이후 외국 세력의 군사적·경제적 침략 앞에서 개화(開化)에 반대하는 수구(守舊)보다 국가의 자주(自主)를 주장하는 데로 나아가게 되었다.

국가가 자주권을 상실한 채 제3기에 이르러서는 제2기에서 보인 바, 상소(上疏)를 통한 국론의 환기와 경고적인 방법을 넘어서 의병(義兵)의 무력적 항쟁을 지도하는 데로 전개되었다. 전국에 일어났던 항일 의병은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등의 국가 위기에 발양되었던 바로 민족 전통의 의리정신이 이러한 한말의 국가 멸망 앞에서 다시 한번 유림(儒林)을 중심으로 민중 속으로부터 일어났으며, 경술국치 이후에는 독립투쟁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이러한 의리사상은 민족정신의 주축이요 핵심으로서, 우리 민족과 더불어 불멸하게 살아있는 생명 바로 그 자체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894년 과거제도가 폐지된 데 이어 1910년 나라가 일제에 의해 합병당한 이후, 서구사상과 기독교 세력이 새로운 근대적 질서에 부합하는 것으로 받아 들여져 급속히 성장해 가는 반면, 유교는 장차 민족의 진운(進運)을 결정짓는 개혁과 발전에 있어 장애 요인이 되는 것으로 지목받기도 하였다. 특히 서양식 근대 교육제도가 일반화되고 전통적인 교육제도가 합법적으로 승인받지 못함에 따라 유교 체제의 붕괴는 결정적으로 가속화하였다.

이와 같이 유교가 급속도로 쇠퇴하게 된 것은 타종교에 비해 태생적으로 종교적 성격이 희박하고, 지식인 본위의 가르침으로 내려왔다는 데서 보다 큰 원인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유림의 일부 선각자들은 유교개혁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들은 기정사실이 된 근대적 체제를 수용, 지향하는 가운데 유교의 가르침을 시대에 맞게 재구성해야 할 것으로 인식하면서 이에 대한 노력을 기울였다. 또 유교를 재건하는 방법으로는 유교의 제도적 개혁과 함께 종교조직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보았다.

이러한 사정은 그 시대의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그즈음 중국에서는 康有爲(강유위) 등이 공교회(孔敎會)를 조직하였다. 조선에서는 강유위의 공교회의 모델을 참고하면서 조선유학의 개혁을 진행하였다. 유학계의 이러한 동향에 일제는 조선인의 항일 정신을 마비시키기 위해 일부 친일파를 앞세워 어용 유교단체인 대동학회를 만들어 조선 유학계를 장악하려 하였다.

이와 같은 여건은 조선의 유학자들로 하여금 유학계를 과거보다 강력히 단합된 모습으로 재구성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라는 인식을 갖게 하였다. 조선 유학계의 개혁은 이제 시대적 요구처럼 되었다. 이런 시대적 요구에 부응해 유학자들은 이전보다 더 종교의 성격과 형태를 강화한 유교단체를 조직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박은식 등의 대동교(大同敎), 이승희의 동삼성한인공교회(東三省韓人孔敎會), 이병헌의 공교회 등이 출현한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유교개신론을 주창하는 이들이 출현하게 되는데, 이들은 유교의 보편적 장점만은 강조하면서 실행하거나, 시대에 맞게 개신(改新)하여 현실에 확대·구현하려는 태도를 취한 학자들이다. 이런 학자들이 바로 백암 박은식, 위암 장지연, 단재 신채호 등이고, 이들보다 조금 뒤의 위당 정인보였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이들에게 한 가지 공통되는 사상이 있는 점이다. 그것은 이들이 모두 그 시대의 특징적 사조로 대두되었던 민족주의를 신봉한 것이다.

더욱이 한때나마 이들의 신분은 대개 신문 제작의 언론인으로서 애국계몽운동을 소신껏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시대의 흐름을 민감하게 파악하여 일반 민중을 그 시대적 환경에 잘 적응케 하는 언론인과 선각적인 계몽가로서 이들은 모두 민족주의 이념 아래에서 사고하고 행동하였다.

古之得道者窮亦樂通亦樂 ㅡ 도를 깨달은 옛사람들은 곤궁해도 즐거워하고 영달해도 즐거워하였다.

이들이 지닌 또 하나의 공통점은 민족주의에 바탕을 둔 역사학에 깊은 조예를 쌓은 학자들이란 점이다. 특히 박은식, 신채호, 정인보는 조선사 연구에 일가견을 이룬 조선사 개척자로 꼽힌다. 그리고 이들이 이룬 조선사 서술들은 그 방법부터가 민족 주체적 자율사관또는 민족의 발전사관이었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업적으로 평가된다.

또한, 당시 이건방·박은식·정인보로 대표되는 양명학계에서는 양명학의 사상을 바탕으로 애국계몽운동,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이 한결같이 양명학을 통해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려 했던 것은, 일제에게 국권을 빼앗기고 압제의 고통을 당하는 터에, 국권회복의 당위성은 굳이 번잡한 설명과 궁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이들은 양명학의 양지(良知)’에 의한 인간의 주체성과 능동적 자각을 부르짖었다. 박은식이 외쳤던 국혼(國魂)’이나 정인보가 기치로 내걸었던 오천년 민족의 얼,’ 그리고 문일평 등이 국사 연구의 근본정신으로 제시하였던 조선심(朝鮮心)’ 등은 모두 양명학의 이른바 양지와 근본적인 관련이 있는 것이다.

한편, 한말 양명학자로 당의통략을 지은 이건창은 원론에서 조선시대 당쟁의 원인을 여덟 가지로 들고, 그 가운데 도학태중(道學太重)’을 첫 번째로 꼽았거니와, ‘도학태중을 논함에 있어서는 도학을 핑계로 파당을 만들어 당세를 호령하고 온갖 자사자리(自私自利)를 도모하면서도, 남들에게는 그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게 한다고 비판하면서, 간접적으로 송시열 일파의 가도학(假道學)’을 겨냥한 바 있다.

그는 송시열과 그 일파가 춘추대의에 가탁하고 주자의 권위를 빙자하여, 사실상 패도(覇道)로써 세상을 호령하며 온갖 사리(私利)를 채웠다고 맹박하면서, ‘이는 진실로 주자의 죄인이요 춘추의 죄인이다고 단죄했다. 그리고 송시열 이후에 그의 학파에 의해 거짓 학문(假學)과 거짓 대의(假大義)가 오랫동안 정책 이념과 사상적 노선이 되어, 마침내 나라를 망치게 되었다고 한탄하였다.

이러한 이건창의 이른바 진가론(眞假論)은 종제인 이건방의 일진무가(一眞無假)’의 학문정신으로 구체화되어 강화학파의 마지막 학통을 이은 정인보에게 계승되었다.

/다음 호에는 한국유학 이야기 44번째로, '조선 유학의 반성과 새로운 모색'이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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